저녁 여섯 시쯤 되자 밖은 이미 어둠에 묻히고 있었다. 조중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합은 서 회장의 먼 인척이라는 서 사장 네 구로 서비스 공장에서 한다는 연락이 있었다. 서 회장과 그의 아들인 서유석이 적극적으로 나서 회원을 모집한 결과 요즈음엔 참가 인원이 팔구십 명에 달했다. 조중구가 처음 참가했을 때보다 거의 세 배로 불어난 숫자였다.
그러니 웬만큼 넓은 공간이 아니고는 지름 4미터의 링과 관중을 수용할 장소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서 회장은 검단의 창고를 전용 투견장으로 개조하고 있었다. 그 투견장이 완성되는 동안은 실내가 기중 넓고 주차공간도 넉넉한 서 사장의 공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중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 기어를 주차에 둔 채로 가속 페달을 살짝 밟았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엔진 소리가 온몸에 전해졌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그 소리는 마치 사냥권 안에 든 임팔라를 본 치타의 심장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중구는 자신이 초원을 달릴 준비를 마쳤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역시 좋은 차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조중구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남부 순환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남부 순환도로는 집에서 불과 오륙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구로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투견 시합은 여덟 시에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일찍 출발한 것은 강남역 부근에서 도금동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조중구는 근래에 회사 내에서도 도금동을 보기가 어려웠다. 물론 사무실과 연구실의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지만 매일이다시피 연구실을 들리던 도금동이 근래엔 통 발길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도금동의 집안 사정이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조중구의 생각대로 도금동은 요즘 동생과의 전투에 정신이 없었다. 유학파 동생이 이제는 숫제 형인 도금동에게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나선 것이다. 도금동의 아버지 역시 두 자식 중 어떤 자식이 더 경영에 자질이 있는지를 저울질하다가 오히려 형제의 사이만 틀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심장에 문제가 있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보니 심신이 지쳐서인지 판단력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 도금동과 했던 약속을 금주에는 작은 아들인 을동이와 똑같은 약속을 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도금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인 을동이에겐 경영권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대한 공헌도만 놓고 보아도 자신이 동생에 비해 월등하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을동이란 놈은 포기를 모르고 아버지를 조르다 못해 요즘은 대 주주들과 이사들을 찾아다니는 눈치였다. 도금동도 질 수 없었다. 금주 내로 최대 주주가 바뀔 것이란 정보가 들어온 것을 기화로 그 주주를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최대 주주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주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동생은 아직까지는 모를 터였다.
조중구가 약속 장소인 일식 집에 도착했을 때는 도금동이 이미 와 있었다. 출입구로 들어서는 조중구를 향해 도금동이 손을 번쩍 들었다. 도금동은 일식 조리사와 마주 보고 스툴에 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조중구가 웃으며 다가가자 도금동은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먼저 먹고 있다. 인사는 집어치우고 우선 배부터 간단히 채우고 가자."
도금동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은 한 개의 초밥을 집어 들었다.
"그러지. 급히 나오느라 나 역시 저녁밥을 먹지 않았으니까. 한데, 오늘은 어쩌다 네게 시간이 나냐? 근래엔 만나기는 고사하고 전화 통화도 어렵더구만."
조중구는 손을 들어 조리사의 시선을 끄는 것과 동시에 도금동의 안색부터 살펴보았다. 초밥을 씹던 도금동이 이그러진 얼굴로 풀썩 웃었다. 조중구의 손짓을 본 조리사가 다가왔다.
"오늘은 무슨 생선이 좋습니까?"
"오늘 공수된 마구로가 있습니다. 이 분이 드신 것도 마구롭니다."
"그럼 저도 그걸로 주세요."
푸른색 단풍잎 무늬가 찍힌 윗옷에 같은 무늬의 보자기로 머리를 질끈 동인 조리사가 연신 굽실대며 물러나 칼을 잡았다.
"을동이가 아직도 항복을 안 하더냐?"
"항복이 뭐냐? 이젠 아예 발 벗고 나섰다."
"아, 거 건방진 자식 아니냐? 제가 언제부터 회사에 헌신을 했다고...."
"그러게 말이다. 퇴근을 해서도 그 녀석을 만날까 집에 들어가기도 싫을 지경이니 원.... MBA를 내세우며 끝까지 제가 경영권을 갖는 게 합리적이라지... 헛."
"너의 아버지 의향이 가장 중요한데... 너의 집 아버지께서 그러시니....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지 않겠냐?"
"실은 그래서 오늘 네 전화를 받고 나온 거야. 투견 구경이나 베팅은 부수적인 문제고 투견 시합이 끝나면 서 회장과 조용히 면담을 좀 하려는 거다."
"뭐야? 그렇다면 지난번 북경 오리 식당에서 동의당에 투자 어쩌고 하던 서 회장이 최대 주주가 되었단 얘기냐?"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 주 내로 그럴 거라는 정보가 있었거든."
도금동의 대답에 조중구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서 회장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벌고 있는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발설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자신 역시 서 회장과 다름이 없는 것 아닌가? 조리사가 자르르 윤기나는 참치 초밥 접시를 조중구 앞에 놓았다. 조중구의 젓가락이 접시로 향했다.
"그거 즐겁지 못한 소식이로군. 술수가 난무하는 자가 우리 회사 최대주주가 된다면 회사에 무슨 야료를 부릴지 알 수 없잖아?"
"술수라니? 서 회장이 무슨 술수를?"
"그런 게 있다. 너까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대신 왜 그 자가 전심전력으로 동의당의 최대주주가 되려는지 그건 알아봐. 내 생각엔 서 회장이 동의당에 관심을 갖는 게 네겐 좋은 일이 아닌 것 같거든."
"글쎄, 어쨌든 오늘 서 회장과 얘기는 좀 나누고 봐야겠어. 을동이란 놈이 먼저 손을 쓰기 전에 말이야."
"가만 지금이 여섯 시 사십 분이니까 이거만 먹고 일어서자. 그러면 시간 맞춰 도착할 테니까."
"넌 오늘도 따겠지?"
도금동이 화제를 바꿔 문득 물었다. 지난여름 이후 조중구의 놀라운 베팅 실력을 신동우와 함께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던 도금동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가 투견 판의 베팅으로 단숨에 아파트와 고급 외제차를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알 수 없지."
조중구가 간단하게 받았다.
"글쎄, 그 게 운 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운이 아니면?"
"그러니까 글쎄라고 하지 않냐. 하지만 어쩌면 너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자신은 못 느끼고 있던 문제를 네가 지적해 주 듯 내 눈엔 보이는데 네가 못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잖아? 어쩐지 네 베팅 성공률이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러니 당분간은 관망을 하는 게 어떠냐? 이를테면 얼마 동안 투견장을 가지 않는 것 말이야."
"음, 나도 그 점을 생각 안 해 본 바는 아니지만 정당한 승부를 했으니 켕길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누가 내 뒷조사를 하더라도 먼지 한 톨 찾지 못할걸?"
"네 입으로 그렇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어디든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 아니냐? 그럼 지나치다 싶은 베팅은 삼가라고."
"알았다. 한데, 내가 돈을 좀 땄다고 동우나 네 배가 아픈 건 아니겠지?"
"미치겠군, 동우나 내가 돈이 없어서? 너도 알다시피 여태 돈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나잖아? 오히려 동우와 난 네가 소원하던 돈을 왕창 딴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돈 얘기만 없으면 사실 너란 놈은 제법 쓸만한 놈이거든. 이제부터 돈타령을 듣지 않는 것만도 어디냐? 이젠 네 아버지와 동생들도 한결 여유가 생겼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실 돈이 생기니까 좋은 점은 동생들이 떳떳하게 시집 장가를 갈 수 있는 것이더군. 현구란 놈만 해도 아차 하면 내 꼴이 날 뻔했거든."
"현구 결혼 날짜는 정해졌냐?"
"나야 모르지. 정해지면 저희들이 알아서 알려 주겠지."
"그런 덴 또 무심하구나."
"무심? 그렇다고 저희들 결혼에 나까지 유심할 필요가 없잖아?"
"야, 일곱 시가 다 됐다. 가려면 어서 가자."
"그렇군. 일어서자."
앞장을 선 조중구가 카운터로 다가가 지갑을 꺼냈다. 도금동 역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으나 조중구의 손에 막혔다. 도금동은 조중구가 계산하는 것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밤 기운이 제법 써늘했다.
"난 장소를 모르니 네 차 뒤를 따라가야겠다. 허니까, 만약 네 차를 놓치면 일단 구로까지 간 다음 전화 하마."
"그렇게 해. 남부 순환도로만 타면 되니까."
조중구와 도금동이 각자 자신의 차로 다가갈 때였다. 도금동의 휴대폰이 울었다. 운전석의 문 손잡이를 잡았던 도금동이 전화기부터 꺼내 들었다.
"예? 지금이오?"
전화를 받던 도금동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알았어요. 곧 갈게요."
도금동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 있었다.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운전석에 오르려 든 조중구가 그런 도금동을 보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도금동이 조중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 엄마 전화다. 이 거, 투견장은 다음에 가고 집으로 가 봐야겠다. 을동이란 놈이 퇴원하신지 며칠 되지 않는 아버지를 설득해 무슨 녹음을 하려 한다고 알려 오셨다. 내 이 자식을 그냥 둬서는 안 되겠어. 이런 놈이 무슨 MBA 출신이란 말이야?"
"음, 그렇다면 어서 가 봐라. 너도 을동이가 억지로 녹음을 하려 했다는 걸 증명해야지. 너도 너의 엄마 육성을 녹음을 하라고. 너의 아버지 말씀도 넣어서 말이야."
"헛, 그러자니 집구석이 투견 판처럼 되고 마는 것 아니냐?"
손을 흔든 도금동이 차를 몰고 사라지자 조중구는 미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방금 도금동이 남긴 투견 판이란 말 때문이었다. 어떤 가정은 투견 판으로 무너지려 하는데 조중구 자신의 가정은 그야말로 투견 판으로 인해 일어난 경우가 아닌가? 쓴 입맛을 다시며 조중구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구로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조중구가 투견장이 있는 서비스 공장에 도착한 시간은 일곱 시 사십 분쯤이었다. 주말의 늦은 저녁 시간이어서 차들이 많지 않은데다 속력을 냈으므로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장 마당엔 이미 주차된 차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장 밖 길가에도 길게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중구는 자리를 찾다가 건물 모퉁이에 세워진 트럭 옆에 약간의 공간이 있는 걸 발견하여 그리로 차를 몰았다. 주차할 공간이 충분할 것 같았다. 조중구는 조심스럽게 차를 갖다 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옆자리에 주차된 트럭의 창문이 열리더니 고달수가 기침을 하며 아는 채를 했다. 조중구는 고달수를 얼핏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어 경고를 했다. 그리고는 공장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건물의 반대쪽 트럭에서 난데없이 황백구 총무가 내리더니 조중구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건물 모퉁이마다 밝혀진 조명등의 불빛으로 단번에 알아 본 것이다. 순간 조중구의 가슴이 뜨끔했다. 고달수에게 아는 채를 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든 것을 황 총무가 보지 못했을 것이란 보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 어서 오십시오. 조 박사님."
조중구를 향해 황백구가 먼저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를 했다. 조중구도 무덤덤하게 받아넘기기로 했다.
"오, 총무님이시군요. 한데, 경기장에 계셔야 할 총무께서 어째서 거기서 오십니까?"
"전반 경기를 치를 개의 견주에게 주의 사항을 알리기 위해서지요. 새로 계약한 견주라 규정을 잘 모르거든요. 견주는 누구와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부정이 있다는 소리가 나면 우리 동호회의 불명예니까요."
"그러시군요.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쓰시느라 바쁘시겠습니다."
'"바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만.... 참, 저쪽 트럭의 견주와 혹시 아시는 사이신지요?"
역시 황백구는 고달수가 창문을 내리는 것이나 조중구 자신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단정적 어조로 묻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조중구는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다.
"회장님이나 총무님과 달리 아직 투견과 보통 개를 구별 못하는 내가 더구나 투견의 견주를 알리가 없지요."
"아, 그러세요. 저 트럭의 창문이 열리자 박사님이 돌아보시기에 혹시 아시는 사인가 해서....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아, 그것 말입니까? 저 사람이 창밖으로 침을 뱉으려다 나를 보더니 멈칫하더군요. 하마터면 침을 맞을 뻔한 내가 차마 욕은 못하고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지요."
"하하하, 그랬었군요. 잘못 본 제 잘못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조중구는 고달수로 인해 낭패를 볼 뻔한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태연을 가장하여 공장으로 들어섰다. 공장 안은 사람들의 소음으로 제법 시끄러웠으나 어찌 보면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큰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사람들의 숫자에 밀려 사라진 것 같았다. 서른 명이 채 안 되던 지난여름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오, 조 박사 오늘은 일찍 오셨구려. 내 아까부터 조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오. 하하하."
곽 사장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중구에게 다가왔다. 조중구도 마주 인사를 하긴 했으나 곽 사장이 자신을 기다리는 이유를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곽 사장이 가까운 곳의 의자를 얼른 끌어와 조중구가 앉으려 든 옆자리에 놓았다.
"갑자기 회원들이 불어나 고요하던 절간에 법석을 벌인 꼴이 되고 말았소. 이래서야 어디 차분하게 투견을 감상할 수 있겠소?"
"글쎄요. 지난주에 비해 확실히 인원이 더 늘었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좋아졌소. 장내가 시끄러운 대신 판이 커졌으니 어쩌면 조 박사에겐 유리해진 상황 아니겠소?"
"아, 그거야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투견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도 늘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배당이 확 줄겠지요."
"눈이 아무리 밝아도 조 박사나 회장을 따를 사람이 있겠소?"
"저야 아시다시피 투견엔 문외한 아닙니까? 그야말로 순전히 운이지요."
"하하, 그러지 맙시다. 조 박사. 어쩌다 한 번쯤은 내게도 귀뜀을 해 주시오 그려. 그리고 내 세상없어도 오늘은 조 박사가 베팅하는 쪽으로 따라가야겠소."
"꼭 그러시다면 규정이야 어쨌든 어려울 게 없습니다만 그러다 실패를 하면 절 원망하실 것 아닙니까? 사실 전 베팅을 할 때마다 이긴다는 확신이 별로 없었거든요. 이제까지는 순전히 운이었단 말입니다."
"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다는 걸 조 박사가 증명해 오지 않았소? 그러니 설사 따라갔다가 다 잃어도 조 박사를 원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게요."
곽 사장이 오늘은 각오를 단단히 한 것 같아서 조중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먼저 거절을 할 경우를 생각하니 곽 사장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은데다 의혹과 의심만 깊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승락할 경우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승락할 경우, 곽 사장 몫만큼 자신의 배당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엄청나게 늘어난 회원들의 베팅액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편이 되면 곽 사장이야말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테니 전혀 손해날 일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러지요. 곽 사장님이 잃으면 저 역시 같이 잃는 것이니 절 원망하시진 않겠지요. 손가락 하나를 펴면 A고. 둘은 B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또 한번 저의 운을 시험해 볼 밖에요."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려. 한데 저 서 회장은 통 말이 안 통하더란 말이요. 그야말로 냄새가 나는데 말이요."
"예? 냄새라니요?"
"쉿, 조용히... 이젠 우리가 한 배를 타게 되어서 얘긴데.... 언제부턴가 저 회장이 총무란 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 듯 싶단 말이요. 지난주에 두 사람이 같이 식당에 있는 걸 본 사람이 있거든."
"그럴리가요? 회장님은 엄청난 재력가란 소문이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돈이 아쉬워서 쓸데없는 짓을 하리란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건 조 박사가 몰라서 하는 소리요. 회장은 정상적으로 돈을 모은 부자가 아니란 말이요. 아, 이런 얘기는 이런 곳에서 하는 게 아닌 것 같소. 우리 다음에 얘기합시다."
곽 사장이 갑자기 이야기의 허리를 뚝 자르더니 쇠창살 너머로 등장하는 황 총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황급히 조중구로부터 좀 떨어진 의자로 옮겨 앉았다. 조중구도 앞을 바라보았다. 황 총무가 다른 때와 달리 핸드 스피커를 갖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늘어난 회원을 상대로 멘트를 날리려면 스피커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아, 아. 회원 여러분 곧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이제부터 저의 통제에 따라주세요. 그래야 경기가 매끄럽게 진행되니까요. 자, 여러분 착석해 주십시오. 그리고 위험하오니 투견장인 링 가까이 접근을 하시지 마십시오. 링 밖에 그려진 라인 선, 금, 줄로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라인 선, 금, 줄이라니? 이보우 총무 양반 라인은 뭐고 선은 또 뭐며 금과 줄은 뭘 뜻하는 말이요? 역전 앞 전방을 가리키는 거요?"
경기 때마다 한 가지씩 지적하는 재미로 참가하는 듯 이번에도 곽 사장의 어김없는 지적이 있자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막상 지적을 당한 황 총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바야흐로 구미는 물론 한문 문화권의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어와 한문과 우리말을 동시에 쓴 것이지요. 이를테면 글로벌 마케팅용 언어 올습지요. 고로 여러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말을 마친 황 총무는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곽 사장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런 황 총무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어진 곽 사장이 머쓱해진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시계를 들여다보던 황 총무가 다시 핸드 스피커를 입에 갖다 댔다.
"에, 여덟 시 정각 올시다. 곧바로 시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경기는 두 살짜리 도사와 세 살짜리 롯드 와일러가 맞붙겠습니다. 두 마리다 투견 시합의 경력이 풍부합니다. 단 체급을 맞추기 위해서 도사를 준 대형으로 골랐습니다. 자, 그럼 먼저 개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견주들은 입장하세요."
견주들이 개들을 데리고 링 안으로 들어섰다. 조중구는 도사와 롯드 와일러를 대강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사실 조중구는 이미 도사가 질 것이란 정보를 고달수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살필 이유도 없었고 봐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옆 사람과 의견을 나누느라 웅성거렸다. 그러나 황 총무는 전과 달리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비교를 해 보셨을 줄 믿습니다.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도사의 체중은 60킬로이고 롯드 와일러는 54킬로 올시다. 도사가 약간 더 무겁지요. 게다가 도사는 십사 전 십이 승으로 전력이 막강합니다. 한마디로 준 대형견으로서는 보기드문 경우지요. 하지만 롯드 와일러의 전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십 전을 치루었으니까요. 기대가 되는 싸움이 될 겁니다. 그럼. 편의상 도사는 A라고 하고 롯드 와일러는 B라고 하겠습니다. 도사는 A, 롯드 와일러는 B 올시다. 베팅 시간을 드립니다. 쪽지는 삼 분 이내에 이 통에 넣어 주십시오. 삼 분, 삼 분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느라 웅성거리다가 막상 수첩에 적을 때는 모두들 손을 가려서 적고 있었다. 곽 사장이 흘깃흘깃 조중구를 돌아보았다. 조중구는 손가락 둘을 펴서 콧등을 긁었다. 곽 사장이 얼른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조중구는 얼마를 베팅할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칠팔 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라 어차피 승패는 반반 정도일 것이었다. 그러니 큰 돈을 따려면 베팅도 커야하나 리스크도 따라서 커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도사가 고기를 먹었다는 정보가 있는 이번 판만은 안전한 베팅이 될 것이다.
물론 잠시 전 황 총무가 도사의 자세한 전력을 밝힌 것은 교묘한 수작이었다. 전력이 말해 주 듯 도사가 더 세다는 걸 은근히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베팅이 도사 쪽에 더 몰리도록 하자는 음모가 담겼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결과를 알고 있는 조중구의 추측에 불과했으나 어쨌든 이번 게임은 반 이상이 도사에 베팅 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서 회장은 많은 돈을 먹기 위해 얼마를 베팅할 것인가? 참가 인원이 늘어서 베팅액도 커졌을 테니 보나 마나 지난주보다는 더 크게 놀 것이 분명했다.
조중구도 베팅액을 키워보리라 마음먹었다. 이미 여유 있는 돈을 모두 긁어 삼억 원의 공탁금을 적립해 놓았으니 베팅액이 모자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정답까지 알고 있으니 땅 짚고 헤엄치기 게임이 아니던가? 조중구는 얼른 B라고 쓰고 일억 원을 적은 다음 릴레이로 돌아오는 플라스틱 통에다 넣었다. 곽 사장 쪽을 슬쩍 바라보니 그는 아닌 보살로 옆 사람과 웃으며 무어라 주고받고 있었다.
"베팅 스톱, 베팅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통에 들어온 것만 유효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도사와 롯드 와일러의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견주 분들은 마주 보고 수건을 신호에 맞춰 놔 주세요. 자, 준비하시고...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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