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안의 두 마리의 개가 힘차게 튀어나와 앞 발을 번쩍 들어 맞부딪쳤다. 개들은 앞발로 상대보다 높은 위치를 잡기 위해 서로를 마구 누르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두 마리 다 힘이 남아돌아가는 초반이어서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자 앞발을 내린 두 마리의 개들은 스피드를 이용한 공격을 퍼붙기 시작했다. 상대의 아무 곳이든 물려고 빠른 입질로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허점이 보이면 단번에 급소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두 마리의 작전이 비슷한 가운데 차츰 입질이 빨라지는 쪽은 도사였다. 도사는 전적이 말해주 듯 경기를 노련하게 이끌고 있었다. 급소인 자신의 목을 내 줄 듯하다가 가볍게 머리를 휙 돌려버리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롯드 와일러의 턱밑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그러나 롯드 와일러의 동작도 힘차고 빨라서 좀처럼 허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개들이 그런 실속 없는 몸놀림을 어서 끝내고 자신이 베팅 한 개가 어서 상대 개의 급소를 물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 분이 지나도 싸움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두 마리 모두 여전히 급소를 물지 못하고 몸통만 여기저기 이빨에 긁혀서 피가 흘렀다.
그러든 어느 순간, 두 마리의 개가 상대를 누르려고 다시 상체를 벌떡 세웠을 때였다. 조중구가 보니 롯드 와일러가 웬일인지 앞발을 든 상태에서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롯드 와일러의 멈춤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의 정지 상태였다. 보나 마나 심장이 발작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엇? 저건... .'
바로 그 순간에 조중구는 롯드 와일러에게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챘다. 이제까지 약효가 나타난 개들의 특징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조중구였다. 역시 조중구가 옳게 보았다는 것이 잠시 후에 증명되었다. 롯드 와일러가 멈칫하는 사이에 도사가 그 허점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롯드 와일러의 목을 문 도사는 머리를 미친 듯 좌우로 흔들었다. 목이 물린 롯드 와일러는 전혀 반응이 없는데도 도사는 멈추지 않았다. 급히 총무 겸 심판인 황백구가 도사의 승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견주들을 불렀다.
베팅한 롯드 와일러가 아니라 도사의 승리가 선언되자 조중구의 머리가 텅 빈 듯했다. 이 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약을 먹었다는 도사는 멀쩡하게 살아서 승리까지 거머쥐었고 이길 거라 믿은 롯드 와일러는 무참히 패배를 하지 않았는가?
조중구는 침착하자고 다짐하며 조금 전 롯드 와일러가 멈칫하며 동작을 끊을 때의 상태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증상으로 봐서는 롯드 와일러가 약을 먹은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자신이 그 정보를 잘못 전달받은 것일 수도 있었다.
"조 박사, 이 게 어떻게 된 거요?"
곽 사장이 조중구에게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말소리만 작았을 뿐 얼굴은 강한 의구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직 사태를 다 파악하지 못한 조중구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전에 원망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는 곽 사장이 영 못마땅했다.
"모든 베팅이 다 성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잃을 때도, 딸 때도 있는 것이지요."
"헛, 조 박사 답소. 그럼 계속해 봅시다."
말과는 달리 굳은 얼굴로 곽 사장이 돌아가자 조중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건 분명 고달수에게 도사의 견주가 거짓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사의 견주가 왜 거짓 정보를 주었을까? 도사의 견주는 고달수와 잘 아는 사이고 새로 계약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고기의 내막을 모를 것 아닌가? 회장이나 총무가 고달수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채고서 그렇게 시켰을까? 도사에게 약을 먹인 정보를 흘려놓고 반대로 롯드 와일러에게 약을 주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은 어느 경우도 속단할 수 없다. 일단 다음 경기를 지켜보자.'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조중구가 링 가까이 앉은 서 회장에게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서 회장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황 총무를 손짓으로 불렀다. 황 총무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황 총무가 물러나자 서 회장은 느긋한 얼굴로 옆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 이번 베팅도 성공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남은 이억 원으로 한 방에 사 오억을 만들어 놔야 할 텐데... .'
조중구는 자신의 유동 자산 전부가 공탁금으로 적립되어있다는 사실에 약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삼억 원 중에 일 억은 잃었으니 이억이 남은 것이다. 이 돈마저 까먹으면 낭패가 아닌가? 그러나 조중구는 이번 시합만은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봐도 고달수의 정보가 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 장내에 계신 회원분들은 다음 경기가 이어질 예정이오니 착석과 아울러 정숙을 부탁드립니다. 다음 경기는 이 대 이의 경기가 되겠습니다. 경기에 임할 개들을 소개하자면 풍산개와 도베르만입니다. 애초엔 풍산개와 도사가 맞붙는 경기를 기획했으나 여러분들의 요청에 따라 색다른 개로 바꾼 것입니다."
"도베르만은 사역견이지 투견이 아니지 않소? 사역견이 어찌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풍산개의 상대가 될 수 있겠소? 키만 크고 날씬한 몸통으로 무슨 싸움을 한단 말이오?"
황 총무의 말꼬리를 잡은 곽 사장이 커다란 소리로 이의를 달았다.
"역시 곽 사장님이 예리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도베르만은 곽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아메리카 스타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키는 커도 날씬하지도 않고 물면 놓지 않는 근성을 지닌 독일 스타일의 구형 도베르만이거든요."
"구형 도베르만이라니? 구석기형 진돗개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소만 구형 도베르만이란 말은 처음이구려."
곽 사장의 승복을 모르는 이의가 이어졌다. 그러자 황 총무는 곽 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우선 개들을 보면서 말씀드리지요. 견주 분들과 보조원은 개를 데리고 입장해 주세요."
두 마리의 도베르만이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풍산개를 데리고 고달수와 보조원이 들어섰다. 그러자 황 총무는 한 손은 핸드 마이크를 쥐고 다른 손은 풍산개를 가리켰다.
"이 풍산개들은 재작년 한중 수교 후 북한에서 들여온 풍산개의 직계 자손들입니다. 이 개의 용맹성은 여러분들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개들의 체중은 30킬로입니다. 반면 이 쪽의 도베르만은 체중 40킬로로 풍산개 보다 10킬로가 더 나갑니다 키도 보시다시피 더 크고 근육이 또한 장난이 아니지요. 체형이나 성질이 사역견과는 거리가 먼 개량 전의 구형견인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니 어째 도베르만이 이길 것이란 말로 들리질 않소?"
곽 사장이 다시 이의를 달고 나섰다.
"아, 아닙니다. 제 말은 곽 사장님이 오늘의 도베르만이 투견이 아니란 말씀을 석명하자는 뜻이었을 뿐 승패에 관련된 내용은 없습니다. 고로 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오니 이해하십시오."
황 총무는 말은 곽 사장에게 하면서 여러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곽 사장 때문에 진행을 못하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사람이 어서 경기를 진행하라고 큰소리를 지르자 장내가 다시 어수선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관망하던 서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래서야 신사적인 경기를 할 수 없지 않겠소? 총무는 중립을 지키고 곽 사장은 이의가 있으면 회장인 나에게 하시오. 그래야 경기가 스무드하게 진행될 것 아니겠소?"
"좋소이다. 이제부터 회장에게만 이의를 제기하지요."
곽 사장이 쉽게 회장의 말에 승복을 하자 황 총무가 다시 스피카를 잡았다.
"아,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이제 곧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전에 베팅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편의상 도베르만은 A, 풍산개는 B로 정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도베르만은 A, 풍산개는 B입니다. 자, 액수는 무제한입니다. 베팅들 하시지요."
조중구는 망설이지 않고 수첩에다 A라고 적고 이어서 일억 원을 베팅했다. 고달수의 개들이 약을 먹었다면 도베르만의 승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 아닌가? 조중구는 곽 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곽 사장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중구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중구는 자신있는 태도로 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서 귀를 후비는 흉내를 냈다. 곽 사장의 볼펜이 재빨리 수첩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팅이 끝나자 양 쪽 견주들이 개들과 함께 링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무슨 할 말을 빼먹은 듯 황 총무가 황급히 다시 핸드 스피커를 들며 중앙으로 나섰다.
"아, 그리고 이번 경기는 이 대 이의 경기이고 다이내믹하고 스피디한 견종들이라 조기에 승패가 갈릴 수도 있으므로 시간 베팅을 끼우겠습니다. 즉 방금 끝낸 베팅과는 별도로 이번엔 어느 편이 이기든 시합이 십 분 이내에 끝난다와 십 분을 넘긴다를 알아맞히는 게임입니다. 이 역시 베팅액의 제한은 없습니다. 십 분이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은 전자를 쓰시고 십 분을 넘길 것이란 분은 후 자를 써 주십시오. 전과 후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베팅들 하십시오. 시간은 다시 삼 분을 드립니다."
조중구는 마음속으로 조금 전에 베팅 한 금액이 서 회장 보다 적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던 중에 시간 차 베팅이 있다는 말에 남은 일억 원으로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풍산개는 약을 먹었다니 싸움이 시작되면 격렬한 운동에 의해 약효가 마구 상승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약의 효과는 극대화되어서 짧은 시간에 근육이 경직될 것이다. 경험으로 보아 오륙 분이면 충분하리라.
'좋다. 전반 시합에서 잃은 일억을 두세 배로 되돌려 받을 기회다. 그러면 이번 게임으로 단 번에 사 오억 원은 문제가 없겠지.'
조중구는 십 분을 넘기지 않고 승부가 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전자와 함께 일억을 베팅했다. 결국 오늘의 두 게임에 적립금 모두를 베팅 한 꼴이었다. 조중구는 다른 시합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염려가 섞인 기대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베팅이 끝났으므로 본격적인 시합을 시작합니다. 도베르만 팀과 풍산개 팀은 제 구령에 맞춰 동시에 수건을 푸시기 바랍니다. 자. 준비 하시고.... 푸세욧."
두 마리의 도베르만과 두 마리의 풍산개가 동시에 튀어나와 부딪히자 그 스피디하고 격렬한 몸놀림에 사람들은 절로 환호했다. 눈부시게 설쳐대는 커다란 네 마리의 개들로 인해 링은 터질 듯 좁아 보였다. 도베르만이 긴 다리를 이용해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풍산개들을 괴롭혔다.
그러자 풍산개들은 두 마리가 붙어서서 다소 방어적 자세로 저항하는 모양새였다. 좌우로 갈라선 도베르만은 계속해서 풍산개들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삼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양 측의 개들 모두가 빠른 움직임에 비해 승패를 결정지을 급소를 물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이 흘렀다.
"오 분 경과."
황 총무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 총무가 시간을 알린 후에도 개들의 싸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도베르만이 더 세차게 공격했고 풍산개들이 방어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풍산개 한 마리가 코앞으로 다가온 도베르만에게 왈칵 덤벼들더니 다리 한 짝을 물었다. 뜻밖의 공격을 당한 도베르만이 앞 다리를 물린 채 재빨리 풍산개의 목덜미를 물더니 머리를 휘졌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쪽 다리를 물린 상태라 풍산개에게 결정적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풍산개가 한 쪽 발을 물고 있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풍산개가 물고 있던 앞발을 더 깊이 물어서 당기기 시작하자 도베르만이 오히려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찬스가 온 것을 감지한 풍산개가 물었던 앞발을 놓는 즉시 도베르만의 목을 물었다.
그런 와중에 다른 도베르만은 동료 개와는 달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재빠른 전진과 후진을 하던 도베르만이 먼저 풍산개를 덮쳐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트린 것이다. 도베르만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풍산개를 깔아뭉개며 풍산개의 목을 물려고 덤볐다. 밑에 깔린 풍산개는 급소를 물리지 않으려고 마구 목을 흔들며 빠져나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칠 분 경과. 현재 칠 분 경과했습니다."
바야흐로 개들이 서로 결정적 타격을 입히려는 찰나여서 잔뜩 긴장한 사람들의 귀에 황 총무가 경기 시간을 알렸다. 이번엔 좀 더 밝은 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풍산개를 깔아뭉갠 도베르만은 더욱 사납게 공격을 가했다. 위기를 느낀 풍산개는 급소를 물리지 않으려는 듯 더욱 빨리 머리를 휘저었다.
바로 그 순간 그렇게 활발하던 도베르만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조중구의 가슴이 또 한번 쿵 하며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도베르만이 동작을 멈춘 그, 일 이 초 사이에 밑에 있던 풍산개는 도베르만의 턱밑이 빈 것을 알았다. 풍산개는 밑에 깔린 자세 그대로 도베르만의 턱밑을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되자 공교롭게도 두 마리의 도베르만 모두가 풍산개에게 급소를 물린 셈이었다. 두 마리의 풍산개들은 각기 자세는 달라도 물고 있는 턱밑은 놓을 줄을 몰랐다.
"구 분 경과. 구 분이 지났습니다."
초시계를 들여다보던 황 총무의 목소리가 어느새 흥분되어 있었다. 황 총무의 멘트가 아니더라도 이미 상황을 파악한 조중구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번 시합도 약을 먹은 것은 풍산개가 아니라 도베르만이었던 것이다. 조중구는 제 자리에 앉아 있기도 어려울 만큼 정신이 아찔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조중구가 생각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빌어먹을.....'
풍산개에 베팅을 했던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중구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중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입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빌어먹을....'
"십 분 경과. 지금 막 십 분이 지났습니다. 십 분 후 쪽에 베팅 한 분의 승리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풍산개의 공격도 일 분이 지나면 승리한 걸로 하겠습니다. 자, 카운트 들어갑니다. 오십구, 오십팔, 오십칠, 오십육...."
황 총무의 카운트가 이어지자 한두 사람이 카운트를 따라 하자 차츰 호응하는 사람이 늘어나 소리도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오, 사, 삼. 이, 일. 땡입니다. 목을 문 채 일 분이 지났으므로 풍산개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이것은 도베르만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풍산개에 베팅하신 회원님께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조중구는 황 총무의 말은커녕, 환호와 탄식이 엇갈린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조중구는 잠시 혼란의 심연으로 빨려 들었다. 잠시 후 조중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배당액의 발표까지 끝나서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고 있었다. 조중구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문 밖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뒤에서 누가 등을 툭 쳤다. 돌아 보니 백발의 서 회장이 빙긋 웃고 있었다.
"아, 회장님."
"조 박사, 말없이 돌아서는 걸 보니 오늘도 베팅에 성공했나 보군."
"뭘요. 오늘은 실패했습니다."
"아, 그래? 자네가 실패를 한 걸 보면 오늘은 일진이 아주 좋지 못한 날이구먼."
"그런 것 같군요. 회장님께선 오늘도 일진이 여전하시지요?"
"허 허, 다 자네 덕분일세. 다른 날보다는 배당금이 좀 더 많더구먼."
조중구는 입이 쓰고 목이 말랐다. 나 때문에 배당금이 더 많았다? 조롱하듯 던진 서 회장의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제까지 나 때문에 배당금을 적게 먹었다는 뜻이 내포된 말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베팅에 성공한 이유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조중구 자신이 베팅에 실패함으로써 배당금을 더 챙겼다는 말은 어쩌면 오늘의 경기를 자신이 조작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도사나 고달수의 풍산개에게 고기를 먹인 것은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조중구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고달수가 아는 채 했을 때 황 총무가 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고달수와의 관계를 서 회장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조중구는 새삼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다음 번에 만회하면 될 것 아닌가? 일진이야 항상 변하는 것일 테니. 허 허."
들으라는 듯 억지웃음을 남기고 서 회장이 먼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조중구도 자신의 차를 세워둔 고달수의 트럭 옆으로 다가갔다. 마침 고달수는 풍산개들을 개장에 싣고 있었다. 조중구는 고달수를 애써 외면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는 오늘의 사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누가 운전석의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곽 사장이었다. 조중구는 창문을 내려 곽 사장을 바라보았다.
"조 박사. 나와 얘기 좀 합시다."
"여기서요? 회장님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봐도 상관없소. 나는 어차피 회장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상태니 말이요."
"그럼. 제 차 안에서 말씀하시지요."
"그럽시다."
곽 사장은 차를 돌아 조수석에 선 듯 올라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여태까지 잘 해오던 조 박사가 오늘은 웬일이오? 설마 나를 떼 놓으려고 일부러 지는 쪽에 베팅을 한 것은 아닐 것 아니오?"
"그 게....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승패를 미리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순전히 운에 의존하는 편이었지요. 저의 베팅 미스로 곽 사장님이 손해를 보셔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아서 삼억 원을 날렸습니다."
"뭐요? 삼 억씩이나? 허 허. 나보다 세 배나 더 잃었구려. 실인 즉, 내가 이러는 것은 조 박사를 원망하려 든 게 아니오. 조 박사의 실패에 나까지 덩달아 속이 상해서 해 본 소리였소. 괘념치 마시오. 난 이만 가 보겠소. 다음엔 필히 성공을 하시오."
곽 사장이 황급히 자신의 차로 돌아가자 조중구는 더욱 허탈한 심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고달수가 트럭을 몰고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차들이 모두 빠져나가 어느새 공장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조중구는 시동을 걸어 천천히 공장을 벗어났다. 계기판에 달린 시계를 보니 아홉 시 반이었다. 큰길로 나온 조중구는 영등포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가 없었다.
"고달숩니다.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아니면 다음에 만났으면 합니다만... ."
"급한 일은 아니나 중요한 일이어서 그럽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니 내일 내가 연락하지요. 지금은 좀 곤란하군요."
"그럽시다. 오늘의 일은 누군가의 장난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봤지요. 지금 운전 중이니 이만 끊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조중구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적립해 놓았던 공탁금을 모두 날렸으니 오늘의 실패를 만회하려 해도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기 때문이었다. 시합을 참가하려면 전 날까지 천만 원 이상의 잔고가 있어야 가능했다. 하기야 천만 원이 있다 해도 종잣돈으로는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물론 투견을 처음 접한 날의 베팅을 생각하면 천만 원도 당시의 조중구에겐 거금이라면 거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조중구는 최소 오천만 원 이상의 베팅을 해왔기에 천만 원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액수로 여겨졌다. 게다가 오늘 잃은 삼억 원을 되찾으려면 또 그만한 액수가 필요할 터였다. 조중구는 아직도 자신이 베팅 한 개들이 진 이유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앞으로의 베팅 자금까지 마련할 생각에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결국 조중구는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한 후에도 차에서 내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조중구는 어두운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겨들었다. 어째서 이제까지 잘 들어맞던 정보가 뒤집혔을까? 약을 먹은 것은 고달수의 풍산개인데 어째서 도베르만에게 톨페리아손의 부작용 증상이 나타났을까?
전반 경기만 해도 그랬다. 고달수는 분명히 도사견이 약을 먹었다고 했는데 약을 먹은 도사는 끝까지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반면 오히려 롯드 와일러가 멈칫하더니 무너졌었다. 결국 두 경기 모두 정답을 뒤엎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로 설명이 될 것인가?
지금쯤 고달수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아니, 뒤집힌 정보를 제공한 미안함을 자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고달수의 잘못이 아닌 것 만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조중구 자신과 같은 배를 탄 처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개가 약이 들었을 고기를 먹는 것을 확실히 목격한 후에 준 정보가 어째서 틀렸을까? 만약... 만약에... 바로 그 순간 조중구는 좌석에 기댔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 고달수의 풍산개가 고기를 먹은 것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기는 그냥 고기일 뿐 약을 넣지 않은 고기였다면? 즉, 고달수는 고기를 개들이 먹는 것만 보았을 뿐 그 속에 약이 들었는지는 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 회장 측에서 두 견주를 방문해서 시합에 나갈 개들 모두에게 고기를 준 것이야. 그러니, 실제로 약이 든 고기를 먹은 것은 도베르만이었구나. 그래서 고달수의 눈을 속인 것이 틀림없어. 전반 경기에서 도사가 이긴 것도 도사의 견주가 보는 앞에서 고기를 먹였으니 고달수도 도사 견주의 말을 듣고 약을 먹은 걸로 단정을 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정황을 미루어, 서 회장은 이미 고달수가 정보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고달수가 정보원이란 사실을 알았으면 왜 고달수를 그냥 두었을까? 설혹 고달수의 정체를 알았다 해도 그 사실을 안 것은 오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작 알았다면 그동안 조중구가 많은 돈을 따게끔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운전석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의 대부분이 과거와 현재가 마구 섞인 것이었고 차분하고 체계적이지도 못했다. 경마로 어쩌다 백만 원을 따서 날아갈 듯하던 생각이 나기도 했다가 처음 신동우를 따라 투견장을 구경했을 때도 떠올랐다. 그리고 경마와 투견을 손에 댄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 후회는 그동안 투견 판에서 딴 돈의 액수를 생각하니 뿌듯한 성취감으로 바뀌어서 오늘의 베팅이 실패한 것이 더 분했을 뿐이다.
조중구는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덧씌우다가 운전석에 기댄 채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다만 그가 잠에서 깬 것은 추위 때문이었다. 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에 머무는 계절이었으나 밤이 되자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든 듯 본네트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실내의 온도는 냉장고를 방불할 정도였다.
눈을 뜬 조중구가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을 깨닫자 흠칫 놀랐다. 밖이 캄캄한 걸로 보아 밤이었다. 조중구의 눈이 계기판의 시계로 쏠렸다. 한 시 사십 분이었다. 조중구는 오싹한 기운에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현관으로 걸어갔다. 지금으로선 따뜻한 자신의 방만이 구원일 것 같아서였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와? 아빠가 걱정하시던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린 듯 동생 문숙이가 조중구를 맞았다.
"어? 아직도 안 자고 뭐 하냐?"
"늦으면 늦어진다는 전화쯤은 해야 기다리지 않을 것 아냐?"
"아, 미안, 그렇게 됐다."
"오빠, 담부턴 제발 연락 좀 하고 늦어도 늦어. 가만히 보면 평일보다 토요일이 항상 더 늦더구먼. 오늘은 기록을 깼잖아?"
"웬만큼 몰아붙이고 그만 들어가 자라."
"알았어. 그만할 게. 오빠도 잘 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조중구는 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양복과 넥타이만 벗어던지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다행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대신 잠은 오지 않고 의식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조중구는 잠이 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탁상 위 괘종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조중구는 그 소리를 이기려는 듯 괘종시계를 무시하고 생각 속에 빠져들기로 했다. 오늘의 베팅이 실패한 원인을 알아내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서 회장이 과연 고달수와 조중구 자신 사이의 커넥션을 알고 있었나 하는 것부터 알아야 했다.
조중구는 그동안 고달수와의 접촉이나 통화를 극히 절제했고 조심했었다. 그러므로 설사 서 회장이 사람을 풀어 뒤를 캐려 했다 해도 아직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조중구 자신의 지나치리만큼 높은 베팅 성공률에서 회장이 막연한 의심만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론 어쩌면 고달수가 서 회장 측에 허점을 보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시합 전에 조중구에게 아는 척을 하려고 창문을 열고 기침을 하지 않았는가? 그때 황 총무가 보았으니 서 회장에게 보고를 했다면? 당연히 경기의 내용을 바꿀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말이 되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개를 바꿀 수는 있어도 이미 약을 먹인 개를 이기게 할 방법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견주들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해 상대 개들 모두에게 똑같이 고기를 먹이거나 먹이지 않는 수법을 쓴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 게임에서 조중구 자신이 베팅에 성공하는지를 눈여겨 살펴 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중구는 새삼 서 회장의 잔꾀에 놀아난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짐작일 뿐 확증이 없는 일이었다.
이어서 조중구는 공탁금을 마련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이미 집 안의 여유 자금은 모두 쓸어 넣었으니 외부에서 구하는 방법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먼저 도금동이나 신동우에게 빌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큰돈은 없어도 얼마간의 돈은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나 마나 기껏해야 몇 천만 원 일 것일 것인데 과연 충고나 잔소리 없이 빌려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걸렸다.
다음으론 신용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은행에선 물론 탄탄한 직장이 있고 아무런 연체금이 없으니 신용도를 바탕으로 일억은 빌려줄 것이다. 하지만 담보가 없으니 보증인을 세워야 할 것이었다.
다음이 회사에서의 가불인데 그깟 가불금이야 끽해햐 일이천만 원에 불과할 것이니 자존심의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주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것이 가장 쉽게 돈을 쥐는 방법일 거였다. 조중구의 아파트는 55평이었다. 현재의 아파트 시세로 볼 때 오억 정도는 대출이 가능할 거였다.
사실 오억이면 강남의 어느 곳이든 31평 정도의 아파트를 두 채나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조중구는 돈을 구하는 몇 가지 방법 중 마지막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주택을 담보로 한 것 말고는 어느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억 정도의 밑천은 있어야 몇 번의 베팅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다 한두 번만 더 정보가 정확하게 맞아준다면 잃은 돈을 쉽게 만회하고도 몇 억이 남을 것이다. 그러면 그 돈으로 대출금을 갚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조중구는 날이 밝는 대로 고달수에게 전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서 회장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고달수의 말을 들어보면 대강은 짐작이 가리라. 그런 다음 거기에 맞춰 새로운 방법으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오늘 잃은 돈은 열 번 중에 한 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어차피 잃은 돈에 연연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주엔 확실한 정보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란 생각도 함께였다. 조중구는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어 시시한 문제 한두 가지를 더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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