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5. 추락의 길(5) 확률은 이분의 일

fiction-google 2024. 3. 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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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잠이 들었던 조중구가 늦잠에서 깨고 보니 오전 열시가 넘었다. 조중구는 먼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꺼칠하게 변한 것 같았다. 조중구는 샤워와 면도를 한 후 어제의 일은 잊고 새로운 기분을 갖기로 결심했다.

"오빠, 밥부터 먹어."

조중구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동생 문숙이가 식탁에 국그릇을 갖다 놓았다.

"아버진 드셨니?"

"에이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안 드셨을라고? 그리고 아버진 병원에 가셨어."

"일요일인데?"

"일요일엔 병이 안 나나 뭐? 게다가 물리 치료실은 쉬는 날이 없다나 봐."

"그래? 그럼 누가 모시고 갔냐?"

"아빠가 누구와 가실 분인가? 내가 모시고 가려 해도 싫다 시는 걸."

"현구와 향숙이는 뭐 하고?"

"현구 오빤 어제 안 들어왔어. 향숙이는 사귀는 남자랑 약속이 있다고 일찍 나갔고."

"그럼, ?"

"? 내가 뭘?"

"넌 뭐 할 거냐고?"

"내가 하긴 뭘 해? 밥하고 빨래나 해야지."

덤덤하게 뱉는 문숙이의 말에 조중구는 마음이 언짢았다. 나이로 보나 이제까지 고생한 것으로 보나 제일 먼저 결혼을 해야 할 동생은 문숙이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순간 어제의 베팅만 성공했어도 문숙이에게 결혼 자금을 듬뿍 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 이번엔 네 결혼 자금으로 아파트 한 채는 확실하게 마련해 주마. 그러니 그전에 선이라도 봐서 신랑감을 먼저 마련해 두란 말이야."

"말은 고마워도 사양할라우. 오빠가 마련하려는 돈이 길에서 막 주워오는 건 아닐 것 아니야?"

"거 무슨 소릴 하려는 거냐? 그럼 내가 은행이라도 털려는 것으로 보이냐?"

"그만 둬요. 난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자꾸 돈 얘길 하지 말아 줘."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네 문제는 내게 맡겨라."

조중구는 언제부턴가 문숙이가 자신이 하는 일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느낌일 뿐 그야말로 설마일 것이었다. 조중구는 내키지 않는 아침 겸 점심밥을 대강 먹은 후 아파트를 나와 자신의 자동차로 갔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휴대폰으로 고달수의 번호를 눌렀다. 두어 번의 발신음이 울리기도 전에 고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는 경황이 없는데다 운전 중이어서 통화를 못했습니다."

조중구가 먼저 사과 겸 통화를 못 한 이유를 말했다.

"이해 합니다. 어제 일로 선생이 낭패를 보셨을 것을 생각하니 나 역시 잠이 오질 않습디다. 하지만 말이요. 이것 하나는 확실하오. 황 총무가 내 개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사실 말이요."

"그랬겠지요. 설마 내가 고씨를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의외의 사태가 생긴 탓에 당황해서였지요. 한데 말입니다. 서 회장이나 황 총무에게 우리 사이의 낌새를 눈치채게 한 일은 없겠지요?"

", 어제의 일을 말씀하시나 본데 어제는 내가 아는 척을 하려 든 게 아니오. 아니, 그 반대였소. 선생 차가 내 트럭 곁에 주차를 하려기에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려던 것이란 말이요. 선생 차와 내 차가 나란히있으면 서 회장 측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니겠소? 하필 바로 그때 황 총무가 보았던 거지요."

조중구는 비로소 고달수가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것을 알았다. 조중구는 일단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 외엔 다른 빌미를 준 적이 없단 말씀이지요?"

"그렇다니까요. 근래엔 연락도 공중전화를 이용했잖소?"

"좋습니다. 하기는 고씨가 눈치를 채게 했다면 서 회장이 거래를 계속할 리가 없겠지요. 어차피 잃은 돈은 잃은 돈이니 잊기로 하지요. 다음 게임에도 정보를 알려주세요. 그 정보대로 해도 잃으면 어딘가에 구멍이 생긴 것일 테니까요."

"그러지요. 이번엔 아예 고기를 빼돌려서라도 속에 약이 들었나를 확인할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지요. 약의 유무만 확실히 안다면 베팅액을 올려 단번에 잃은 돈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 어제 선생이 잃은 돈이 얼마나 됩니까?"

"근래에 회원이 늘어서 가장 많이 베팅했었지요. 삼억을 날렸습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액수군요. 그럼 내가 일억 원쯤 보탤까요? 어쨌든 내가 준 정보와는 다른 결과가 생겼으니 내 탓도 있지 않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정보를 이용하고 분석하는 것은 제 몫이지요. 그동안 너무 안일한 베팅으로 재미를 봐서 분석을 못 한 제 잘못입니다."

", 이번 판에서 선생도 데미지를 크게 입었잖소?"

"말씀 고맙습니다. 그럼 금요일에 전화 기다리지요."

통화를 마친 조중구는 차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간밤의 추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자동차 안은 오히려 땀이 나려 했다. 조중구는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 후에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눈을 반쯤 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요일이어서 인지 아파트 단지 안에는 어린아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롤러스케이트가 처음인 듯 서투르기 짝이 없어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아이의 옆에는 아빠인 듯한 남자가 연신 시범을 보이는 동작을 취하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중구의 눈에는 보기에 좋았다. 그래서 나도 장가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때 다시 넘어진 아이의 뒤에서 동생인 현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조중구는 가까이 다가오는 동생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 현구야."

", . 여기서 뭘 하우?"

현구는 뜻밖이라는 듯 눈이 커졌다.

"안 들어갈라우?"

"네가 여기로 들어와."

"? 내게 할 말이라도 있수?"

"일단 들어와."

조수석으로 돌아온 현구가 털썩 몸을 실었다.

"아버지도 계신데 결혼 전에 외박이라니?"

", 못 들어간다고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고 허락까지 받았는데 그 게 문제가 되우?"

"그래도 문숙이나 향숙이가 보기엔 좋은 일은 아니잖냐?"

"걔들 나이가 몇인데 그거 하나 이해 못 하겠수? 형이 구식이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유."

"그래? 하기는 그럴지도 모르지. 날짜는 잡았냐?"

"이젠 아버지도 웬만해지셨으니 내일이라도 상견례를 해서 날짜를 잡으면 되지만 그보다 말이우."

"말 해."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더란 말이 사실인 모양이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말이우.... 형이 사 준 빌라를 팔고 소민이네 집에서도 지원을 조금 받아 아예 압구정 아파트를 살까 하는데 형 생각은 어떠우?"

"압구정이면 요즘 한창 뜨는 동네 아니냐? 거기도 제법 비쌀걸?"

"아니오, 32평짜리가 일억 팔천이랍디다. 둘이 합치면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 하는 말이우."

", 그런 말을 어제 들었다면 문제도 아니었겠고만...."

"? 어제 들었었다면 이라니 무슨 말이우?"

"아니다. 그 문제는 네 처 될 사람과 의논해서 해. 집에 들어가 봐라."

"형은 안 들어갈라우?"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마."

현구를 들여보낸 조중구는 새삼 어제 잃은 돈이 엄청난 돈이었음을 실감했다. 강남의 40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날린 것이다. 조중구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열 번을 생각한들 물 건넌 송아지였다.

 

금요일이었다. 조중구는 퇴근 후 자신의 방에서 고달수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여덟 시가, 아홉 시가 가까워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마침내 아홉 시가 넘자 조중구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어째서 연락이 없습니까?"

", 방금 조사가 끝나서 그러지 않아도 지금 연락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소."

"조사라니요?"

"아 그 게 말이요... , ....."

조중구의 물음에 고달수는 기가 찬다는 듯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씀 하세요. 무슨 조사를 했단 말입니까?"

"오늘 낮부터 황 총무를 기다렸지요. 한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어두워서야 왔습디다. 그것도 쓸만한 진돗개를 보여달라더니 고기만 던져주고 돌아서더군요. 사진도 안 찍고 말이요."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단 말씀인지요?"

"여태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자기 말로는 시간이 없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로선 의심이 가는 행동으로 보였지요. 여하튼 황 총무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진돗개들이 이미 고기를 다 먹고 없지 뭐요. 그래서 당장은 약이 든 고기였는지는 확인을 못했소."

"아깝네요. 그것을 알았더라면 확실한 정보가 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조중구는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들은 귀머거리처럼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황 총무가 진돗개에게 진짜 약이 든 고기를 먹였는지 상대가 될 개에게 약이 든 고기를 먹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팀에게 베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진돗개가 고기를 먹었다니 일단 약을 먹은 걸로 간주를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말이요. 믹서로 시금치와 소금을 넣고 갈아서 고기를 먹은 진돗개 두 마리에게 강제로 퍼 먹였지요."

"? 시금치와 소금물이오?"

"그래야 개들이 먹은 고기를 토할 것 아니요?"

"뭐라고요? , 그래서 개들이 먹은 걸 토했나요?"

"그럼요. 옛부터 우리가 쓰던 방법인데 제놈들이 토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소?"

"약을 발견했습니까?"

"그게 쉽게 보이겠소? 뱃속의 내용물과 마구 섞였으니 말이요. 그러니 토사물을 사무실 책상 위에 펼쳐놓고 이제까지 샅샅이 조사를 했지요. 결국 약은 없습디다. 개란 고기를 대충 씹어 삼키지요. 본능적으로 다른 개에게 뺏길까 해서 말이요. 그러니 약이 들었다면 고기 속에 약의 형체가 약간은 남았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습디다."

"고약하겠지만 맛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톨페리아손은 본래 모과처럼 떫은맛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가루로 만들면 개들이 먹지 않을까 봐 알약을 고기에 숨긴 것일 테니까요."

", 그래요? 그럼 잠깐 기다리시오."

고달수가 전화기를 책상 위에 놓는 소리가 딸가닥 들리더니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 다시 고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과 맛은 전혀 없고 시금치 풋내만 납니다."

"그럼 약은 확실히 들어있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상대 개가 무슨 종인지 몰라도 진돗개들이 이길 것은 틀림없겠습니다. 참고로 하지요."

통화를 끝낸 조중구는 책상에 턱을 고이고 고달수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말은 찾지 못했다. 황 총무가 진돗개에게 고기를 던져주고 돌아섰고 고달수는 약을 확인하려 개들의 토사물을 검사했다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검사 결과 약은 없었다고 했으니 진돗개들이 약을 먹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내일 시합에서 진돗개에게 베팅을 하면 그만일 터였다.

다만 한 가지, 찜찜한 구석은 있었다. 낮에만 들렸다던 황 총무가 밤에 다녀간 이유는 무엇일까? 견주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고기를 주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어두운 밤에 방문한 목적이 있지 않을까? 조중구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다각도로 생각을 굴려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개들이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늦게 방문했다가 금세 돌아선 황 총무에겐 특별한 혐의를 두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열 시쯤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조중구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휴대폰을 둔 위치가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옷을 던져둔 침대 모서리였다. 조중구는 옷을 들어 휴대폰을 잡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에 신동우였다.

"내가 널 깨운 건 아니지?"

조중구는 신동우의 목소리가 밝지 못하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늙은이도 아니고 열 시에 자는 놈도 있냐?"

"요즘 애들 눈엔 우리 나이면 이미 늙은이야. 장가도 못가 본 늙은이들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넌 좀 한가해졌냐? 증설 작업은 끝났겠지?"

"그거 끝낸지가 언젠데.... 그 공장 팔려고 내놓았다."

"? 팔아버릴 공장에 뭣하러 시설을 늘렸단 말이야?"

"당장 물량을 소화하려니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팔 때도 유리하고 말이다."

"작자는 나섰냐?"

"거의 성사 단계지. 그보다 너, 내일도 시합장에 갈 거냐?"

"? 너도 가려고?"

"오늘도 시합 일시와 장소를 문자로 알려 왔더라. 그래서 네 생각이 난 거야. 금동이 말을 들으니 너 그새 준 재벌이 되었다며?"

"준 재벌 좋아하네. , 재벌은 아무나 하냐? 금동이나 너 정도는 돼야 재벌이지."

"축하한다는 뜻을 고깝게 들을 건 없어. 나도 이것저것 우울해서 말이야. 널 만나 개싸움이나 보러 갈까 하는데 어떠냐? 어디서 만나 같이 갈까?"

"거 좋지. 그러지 않아도 네가 요즘 시간이 있나 연락을 해 보려고 했었지."

"솔직히 말해 이제껏 집안싸움이 진흙탕 개싸움이었잖냐? 그러니 굳이 투견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이제 이전투구가 끝났단 말이냐?"

"끝났다기 보담은 우리 아버지께서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신 셈이지."

"교통 정리?"

"결국 동일이 놈과 공장을 나눠 갖기로 했다. , 우리 아버지가 은퇴를 선언하시는 날부터란 단서가 붙긴 했지만...."

", 형을 우습게 아는 동일이 그놈을 그냥 뒀냐? 제 놈이 공장에 대해서 아는 게 뭐란 말이냐?"

"그 게 동일이 뜻이겠냐?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여하튼 너의 아버지께서 얼마나 골치가 아프셨으면 그런 결정을 내리셨겠냐? 차라리 잘 됐다. 넌 따로 네 기업을 성공시키면 될 테니까."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일단락되었으니까. , 내일 어디서 몇 시에 만날까?"

"여섯 시쯤 만나지. 시합이 여덟시니 구로까지 가는 시간도 있고 하니까."

"그럼, 신사동 비바체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 게 어떠냐? 너 있는 곳에서 멀지 않고 거기서 곧장 올림픽 대로를 타면 될 것 같은데."

", 그 게 좋겠다. 그럼 내일 보자."

신동우와의 통화를 끝 낸 조중구는 내일 벌어질 시합에서 베팅을 얼마나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공탁금은 이미 주택을 담보로 빌린 오억 원을 넣어놓았으니 모자랄 걱정은 없었다. 다만 지난주처럼 고달수의 정보만 철석같이 믿고서 무리한 베팅을 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이제는 공탁금이 바닥나면 목돈을 구할 방법이 더 이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의 시합은 과연 서 회장이 조중구를 의식해 작전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고달수를 의심해서 정보를 교란하려던 것인지도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먼저, 서 회장이 조중구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고달수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기 위해 고기를 주었다고 가정을 해 보았다.

그러면 서 회장 측에서 기대하는 것은 조중구가 진돗개가 아닌 상대 개에게 베팅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조중구가 진돗개에게 베팅을 했다면 고달수와 한 패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고기는 먹었으되 약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조중구는 당연히 진돗개에 베팅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일단은 서 회장이 생각한 베팅이 아니니 그 의뭉스러운 영감의 의심도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는 길도 물어 가랬다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베팅 액만큼은 줄일 필요가 있었다. 고달수의 정보가 딱딱 들어맞는가를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보의 정확도가 들쑥날쑥한다면 무엇을 믿고 통 큰 베팅을 할 것인가? 지난주에는 그래서 바닥까지 다 털린 것이 아닌가 말이다.

다음 날인 토요일이었다. 조중구는 퇴근 시간을 앞당겨 회사를 나선 뒤 약속 시간에 맞춰 커피숍에 도착했다. 실내를 둘러보니 아직 신동우가 오지 않았다. 조중구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동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창밖에 신동우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조중구는 들어서는 신동우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정시에 도착했구나."

조중구가 웃으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사실은 아침에 인천 공장엘 갔다가 이리로 곧장 오는 길이다."

"그래? 그럼 저녁을 먹지 않았을 텐데 커피보다 위층으로 가서 뭣 좀 먹고 갈까?"

"저녁은 너도 안 먹었을 거 아니냐? 그러면 위층으로 갈 것 없이 그냥 여기서 토스트로 간단하게 때우고 말자.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지."

"저녁으로 토스트는 좀 그렇긴 하다만... 그러지 뭐."

조중구가 음식을 주문을 한 뒤 불쑥 도금동의 얘기를 꺼냈다.

", , 서 회장이 우리 동의당의 최대 주주가 된 사실을 아냐?"

"? 서 회장이?"

"그렇다니까. 그래서 지난주에 금동이가 서 회장을 만나 로비를 하려고 했었다니까."

"아하, 그래서 그 영감이 검단의 땅을 모조리 팔아치웠구나."

", 너희 공장을 검단으로 옮긴다더니 어떻게 됐냐? 땅은 확보했냐?"

"몇 주 전에 우리 아버님이 가셔서 설명회를 듣고 오셨지. 오천 평쯤 확보를 하셨다더라. 서 회장이 그 땅을 다 팔면 엄청난 돈일 텐데.... 그 돈을 동의당 주식에 쏟아부은 모양이군. 그래서 금동이가 서 회장을 만났냐?"

"금동이를 집에서 부르는 통에 만나지 못했지. 금동이는 을동이 놈 때문에 골치가 아픈가 보더라. 그 자식이 죽어도 경영권을 갖겠다고 설친다지 뭐냐?"

"어느 집이나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군. 동생 놈들이 죽어도 양보를 모르니 말이야."

"을동이나 동일이가 그렇지 우리 집은 너희들과 다르지. 내 동생인 현구란 놈은 내 말이면 꼼짝을 못하잖냐?"

"그 게 그렇지 않아요. 현구도 챙길 것이 있다 싶었으면 네게 꼼짝을 했을걸? 결국 네가 항복을 할 때까지 말이야. 그 게 인간 심리 아니, 형제의 심리거든."

"그러게, 돈 앞엔 형제가 오히려 남보다 못하니 말이다."

"그 게 그렇더라고. 그 돈이 아니어도 먹고사는덴 지장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양보는 죽어도 하기 싫더란 말이지. 우선 내가 그렇거든."

토스트 접시가 앞에 놓이자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남은 커피까지 바닥을 본 두 사람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로 가는 길은 내가 잘 알아. 하지만 시합하는 곳을 모르니까 중구 네가 앞장을 서라.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까."

"구로 역에서 가까운 곳이야. 만약 내 차를 놓치면 역 앞에서 전화를 해."

"그러지. 지금 떠나도 늦진 않겠지?"

"시간은 충분해."

조중구의 차가 먼저 출발했다. 잠시 후, 차가 올림픽 대로를 들어서자 조중구는 백미러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두워진 도로엔 강렬한 불빛만 반사될 뿐 신동우의 차를 확인할 수 없었다. 조중구는 속력을 유지한 채 그대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십여 분 후 조중구는 구로역 부근에 이르러 차를 세웠다. 그리고 신동우에게서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조중구의 차 옆으로 어느새 신동우의 차가 붙어 서더니 창문을 내리는 것이다.

"빨리 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하냐?"

", 난 네가 날 놓친 줄 알았지."

"라이트에 반짝이는 네 차 엠블럼만 보고 죽자고 따라붙었지. 네 차 잘 나가던데?"

"사실, 내 처지엔 과분한 차지. 하지만 역시 과욕을 부려볼 만한 차이기도 하더라고."

"네 처지가 어때서? 너 정도면 앞날이 탄탄대로 아니냐?"

"실없는 소리, 저쪽이야. 가자고."

조중구는 다시 차를 몰아 공장지대로 들어섰다. 아치형으로 커다랗게 자동차 서비스 공장이라 쓰인 정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엔 이미 주차할 곳이 없었다. 조중구는 할 수없이 차를 후진 시켜 골목길 옆에다 붙여 세웠다. 신동우도 마찬가지로 주차를 했다.

"아니? 웬 회원이 이렇게 불었냐? 지난여름 의정부에서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잖아?"

서비스 공장 정문을 들어서든 신동우가 약간은 놀란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신동우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난여름 보다 차들이 몇 배나 많았던 것이다.

"요즘은 매주 백여 명씩은 오더라."

"그럼 판돈이 엄청나겠구나."

"판돈이 많을 수밖에 없지. 베팅 액수가 몇 천만 원은 보통이니까."

"이거, 베팅을 잘하면 돈벼락을 맞겠군."

", 나라면 모를까, 동우 네가 돈 얘기를 하니까 좀 이상하다. 처음 내게 투견을 보여준 건 너잖아? 네 돈으로 첫 베팅에 백만 원을 걸었을 때 난 사실 잃을까 속으로 엄청 떨었었지. 월급날이 돼야 돈 구경하던 나였으니까."

"맞아, 그때는 그랬을 거다. 금동이란 놈도 그래서 널 말렸던 거잖아?"

"그랬었지. 그만 들어가자. 자리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공장의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작 전이어서 인지 담배 연기가 가득한 실내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수 인원일 때 보다 확실히 산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때보다 한결 생기가 돌아 활발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조중구와 신동우는 맨 뒷 줄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서 회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는 듯했다.

", 저 회장과 같이 있는 사람이 바로 이 공장 사장이라더라."

조중구는 옆자리의 신동우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 저 사람은 서 사장이잖아? 우리 공장의 고객이지. 우리 공장에서 부품을 사 가거든. 우리 아버지께 들으니 저 사람은 서 회장과 인척 관계라더라."

", 그렇구나. 그래서 계속 이 공장에서 시합을 했었군."

조중구는 링의 좌우로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향해 오는 곽재만 사장을 발견하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곽 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오더니 신동우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오늘은 무슨 바람으로 신군이 왕림을 하시었소? , 옛날 경마장에서처럼 서로 얼굴이라도 자주 봐야지 이렇게 소원해서야 원....?"

"이제부터는 시간이 날 듯하니 자주 뵙지요."

", 그러셔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곽 사장은 신동우에게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조중구의 귓가로 붙였다. 그리고는 빠른 어조로 말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따라갈 테니까 신호를 주시오."

곽 사장은 조중구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조중구는 이미 곽 사장이 그럴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여덟시 정각이 되자 링 안으로 황백구 총무가 들어섰다. 그는 핸드 마이크를 입에 대더니 테스트 삼아 후 후하고 바람소리를 냈다.

", 시간이 되었으므로 경기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시합은 도사 대 도사의 시합입니다. 전국 어디서나 투견 시합은 도사가 주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식상하다고도 합니다마는 사실 도사들이야말로 투견의 대명사지요."

"그럼 다른 견종의 경기는 투견 축에도 못 낀단 말이요?"

오늘도 어김없이 곽 사장이 말꼬투리를 잡았다. 황 총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곽 사장의 이의를 묵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우선 육중한 몸무게가 타 견종을 압도하여 링이 꽉 차는 듯한 중량감 있는 경기를 하지요. 게다가 오로지 전투력에 치중해 개량을 거듭한 품종이라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근성이 있어 무승부가 타 견종에 비해 월등히 적습니다."

"도사만 그런 게 아닐 거요. 다른 견종들도 죽기 살기로 싸우고자 하는 근성은 죄다 있습디다."   

또다시 곽 사장이 이의를 달았다. 그러자 앞줄에 앉아있던 서 회장이 곽 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곽 사장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슬그머니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했다. 자신의 말에 자꾸만 꼬리를 잡던 곽 사장이 서 회장의 눈총에 기가 죽자 황 총무는 고소한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멘트를 이었다.

"고로 오늘은 현재 서울 챔피언과 경남 챔피언의 빅게임을 준비했습니다. 서울 챔피언은 무게가 82킬로이고 경남 챔피언은 85킬로로 그야말로 슈퍼 헤비급에 속하는 개들이지요. 우선 개들을 보시고 난 다음 베팅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견주들 입장하세요."

백여 명의 사람들이 견주가 데리고 들어서는 도사견에게 눈길이 쏠렸다. 두 마리의 개들은 커다란 페넌트를 가운 대신 걸치고 있었다. 금색 레이스가 줄줄이 달린 붉은색의 페넌트엔 금색 실로 무슨 챔피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마리 모두 역전의 용사임을 증명하는 흉터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덩치만 봐도 질리는군. 저놈들 엄청난 대물일세."

앞에 앉은 노인이 옆 사람에게 한 말이었다. 조중구나 신동우도 그새 도사들의 싸움은 여러 번 보았지만 이렇게 묵직해 보이는 놈은 처음 보았다. 어떠냐는 듯 흡족한 웃음을 짓고 서있던 황 총무가 다시 나섰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베팅을 하기 전에 서울 챔피언인 이 개의 귀를 보십시오. 반쯤 잘렸지요? 바로 이 개를 A라고 하고 경남 챔피언인 이 개는 B라고 하겠습니다. 비슷한 크기와 색깔이니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귀가 잘린 개가 A, 이쪽은 B 올시다. 서울 또는 경남이라고 쓰셔도 무방합니다. 자 베팅들 하십시오. 시간은 삼 분입니다."

"어떤 쪽이 나아 보이냐?"

신동우가 물었다.

"너는?"

조중구가 되물었다.

"글쎄, 성공률이 높은 널 따라갈까 하는데?"

"나도 깜깜하긴 마찬가지지."

"그럼, 아무 놈이나 정해."

"글쎄, 아무렇게나 찍자. 경남 쪽으로...."

"그러자. 난 이백만 걸 테다."

이백만 원을 베팅한다는 신동우는 이억 원을 베팅하는 사람처럼 심각해 보였다. 조중구는 지난주처럼 손가락 두 개를 펴서 코를 긁으며 곽 사장을 흘깃 바라보았다. 역시 곽 사장이 실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중구는 베팅액으로 천만 원을 썼다. 지난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베팅액을 줄인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돈을 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상황을 살피려는 베팅이었다.

"베팅 시간이 다 끝났습니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링 안의 견주 분들은 신호에 맞춰 수건을 당기세요. , 준비하시고.... 푸세요."

신호를 기다린 두 마리의 개들이 엉겨 붙더니 초반부터 사생결단을 내려는 기세로 물고 뜯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한 쪽 귀가 반쯤 없는 서울 챔피언은 경남 챔피언에게 어깨를 눌리더니 벌렁 넘어져 버렸다. 그 순간 경난 챔피언에게 베팅을 했던 사람들이 와아 하는 함성을 질렀다. 초 단 시간에 승리를 거머쥘 판이었던 것이다. 다만 넘어진 도사가 일어서기 전에 그 목을 물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경남 챔피언은 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려서 쓰러졌던 도사가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일어난 도사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엄청난 기세로 상대에게 돌진했다. 그러자 이번엔 경남 챔피언이 서울 챔피언의 발밑에 나뒹굴었다. 경남 챔피언을 누른 서울 챔피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턱 밑을 덥석 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서울 챔피언에게 베팅 한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남 챔피언의 목을 문 서울 챔피언은 세차게 머리를 좌우로 휘졌기 시작했다. 경남 챔피언은 꼼짝도 못하고 네 발만 허우적 거렸다. 더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두면 경남 챔피언은 곧 숨을 거둘 것이었다. 황 총무는 급히 서울 챔피언의 승리를 선언한 후 견주들을 불렀다. 시합이 시작된 지 불과 삼 분 만의 일이었다.

"뭐야? 져도 아주 싱겁게 졌잖아? 그 통에 돈만 날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신동우가 풀석 웃었다. 하지만 조중구는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베팅 한 개가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중구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약 먹은 개의 증상이 나타나기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마리 중 그 어떤 개에게서도 심장에 이상이 생기거나 급격한 경직 상태에 이르는 개는 없었다.

그렇다면 개들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약효가 나타나기도 전에 너무 빨리 경남 챔피언이 재수 없이 목을 물려버렸을까? 조중구는 답답한 마음에 앞자리의 서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침 서 회장은 황 총무를 코앞에 불러놓고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조중구는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뚫어지게 두 사람의 행동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의문이 풀릴 리가 없으니 더욱 답답할 뿐이었다.

조중구는 마음속으로 베팅액을 줄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조중구는 다시 곽 사장 쪽을 바라보았다. 곽 사장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지 콧등을 찡그리며 코를 씰룩이고 있었다. 조중구는 고달수의 진돗개가 나오는 다음 경기에 기대를 해 보기로 했다. 고달수의 진돗개에게 베팅을 한다면 서 회장의 의심도 피할 수 있고 베팅 역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서 회장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는 만큼 베팅액도 줄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베팅에 성공하신 분들 축하합니다. 승리하신 회원분의 성함과 배당액은 다음 경기가 끝난 후 일괄 발표를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다음 경기를 설명드리겠습니다. ...."

"이거 보우, 황 총무. 전반 시합이 오 분도 안 돼서 끝나지 않았소? 그러니 시간이 남아돌 판인데 마이크도 쥐었겠다 막간을 이용해서 노래나 한 번 불러 보시오."

곽 사장의 말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황 총무가 만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곽 사장을 흘겨보았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곽 사장님께서 베팅에 실패한 회원들을 위해 농담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항상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시느라 애쓰시는 우리 곽 사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 설명 계속하겠습니다."

황 총무는 곽 사장이 끼어들 소지를 없애려고 스피커의 볼륨을 약간 더 높인 후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오늘 후반 경기는 롯드 와일러와 진돗개의 대결로 기획을 했습니다만 조금 전 회장님께서 새로운 제안을 하셨습니다. , 롯드 와일러 대신 전반 경기에서 이긴 서울 챔피언인 도사와 두 마리의 진돗개의 대결을 말입니다. 제 소견에도 경남 챔피언을 가볍게 이긴 서울 챔피언과 사냥으로 이력이 난 진돗개의 대결이 훨씬 박진감 있고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황 총무의 뜻밖의 제안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란스러움을 뚫고 곽 사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도사견은 이미 경기를 해서 힘이 다 빠졌을 텐데 또 싸울 여력이나 있겠소?"

곽 사장의 이의가 있자 갑자기 사람들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황 총무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아시다 시피 도사견의 체력은 한 시간을 싸워도 끄떡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게다가 전반 시합은 단 오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 썼을 뿐 체력 소모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체력이 많이 남았을까를 걱정할 판입니다."

",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은근히 도사가 이기고도 남는다는 뉘앙스가 풍기잖소?"

곽 사장이 재빨리 황 총무의 꼬투리를 잡자 아까부터 보고 있던 서 회장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곽 사장, 선택은 다수의 회원들이 할 것이니 그 정도에서 멈추시오."

서 회장의 말에 곽 사장은 재빨리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서 회장의 말에 동조를 하는 듯 박수까지 치는 사람도 있었다.

", 시간이 없습니다. 챔피언 도사와 진돗개의 대결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도사와의 대결을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가자 눈치를 살피던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아이구.... 세어 볼 필요가 없겠군요. 압도적 찬성으로 도사대 진돗개의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럼 준비가 되는 데로 경기를 시작하지요."

황 총무가 급히 견주들을 불러 개들을 데려오게 한 뒤 다시 링 안으로 들어와 마이크를 잡았다.

"전번 시합에서 이미 도사견은 보셨을 테니 진돗개를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견주는 선수견들을 데리고 입장하세요."

기다렸던 고달수가 보조자와 함께 진돗개 한 마리씩을 앞세워 등장했다.

"이 개들의 체중은 이십사오 킬로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민첩하기가 바람과 같아서 탱크 같은 산돼지의 덧니도 우습게 아는 개들입니다. 하므로 오늘의 경기도 두 마리가 합동 작전을 펼쳐 도사를 이길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도사에게 당한다면.... 그 뒤는 저도 장담하기 곤란하군요. , 도사견 견주도 입장하세요."

조금 전 경남 챔피언을 꺼꾸러뜨린 서울 챔피언 도사견이 입장해서 링 안으로 들어가자 황 총무는 곧바로 베팅을 종용하고 나섰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경기 올시다. 엄청난 힘을 지닌 도사와 족제비도 울고 갈 만큼 민첩한 진돗개의 대결입니다. 도사는 A, 진돗개는 B 올시다. 도사나 진도라고 써도 무방합니다. 자 베팅들 하십시오. 시간은 삼 분을 드리지요."

"이번에도 B ?"

수첩을 꺼내든 신동우가 조중구에게 물었다.

"그러자. 어쩐지 이번엔 확실할 것 같다."

"또 확률적이냐?"

"확률적 이론은 진작 집어치웠다. 확률을 계산한다는 건 점쟁이가 미래를 계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이다. 끝난 경기를 알아맞히기는 쉬워도 시작도 하기 전에 결과를 어떻게 알겠냐?"

"어라? 한동안 못 본 사이 네 인생관 자체가 바뀐 것 같은 데? 그 건 옛날의 네 이론이 아니잖아?"

"잔말 말고 베팅이나 해."

조중구는 손가락 두 개로 코를 긁으며 눈길은 신동우의 수첩 쪽으로 보냈다. 그런데 신동우는 자신과 반대인 A를 써넣는 것이었다.

"? 내 말이 믿기지 않아서 도사 편에 섰냐?"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잃으면 한 사람은 따야 본전이라도 할 것 아니냐?"

"한 사람이 따도 한 사람이 잃으면 제로란 생각은 안 하냐?"

"모두 잃어 마이너스가 되는 것 보담은 낫겠지. 여하튼 넌 네 신념대로 해 봐."

"그럴까?"

조중구는 고달수가 개의 토사물까지 맛보며 알아낸 정보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B라고 쓴 뒤 오백만 원만 베팅했다. 물론 그보다 많은 액수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서 회장의 의도를 알고자 시험하는 게임인 것이다. 게다가 정보도 없는 전반 경기에서 천만 원을 베팅해서 잃은 것도 경솔한 행동이란 생각을 했다. 여하튼 조중구는 결과를 두고 보기로 하고 쪽지를 통에 넣었다.

", 베팅을 다 하신 것 같으니 시합을 시작하지요. 양측 견주 분들은 제 구령에 유의해 주세요. , 준비하시고... 푸세요."

목줄이 풀리기를 진작부터 기다리던 도사가 곧장 진돗개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훈련을 받은 데다 본능까지 발동한 진돗개들이 펄쩍 뛰어 좌우로 갈라섰다. 먼저 치고 들어간 도사는 목표가 둘로 갈라지자 약해 보이는 상대를 고르는 듯 잠시 좌우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목표로 정한 진돗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놀란 진돗개가 펄쩍 뛰어 몸을 피하려는데 이미 늦어서 어깨 부분을 덥석 물리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진돗개가 동료를 구하려는 것처럼 도사의 꼬리를 물고 마구 당겼다. 그러나 도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돗개의 어깨에서 입을 뗄 줄 몰랐다. 꼬리를 물고 흔들던 진돗개는 도사가 꿈쩍도 하지 않자 도사의 머리 쪽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용감하게 도사의 귀를 물고 늘어졌다. 진돗개는 사납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사가 멈칫하더니 물었던 진돗개에게서 입을 뗐다. 그리고는 숨이 차서인지 입을 벌렸다. 도사의 입을 벗어난 진돗개는 물린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벼락같이 도사의 턱밑을 파고들어 목줄기를 물어버렸다. 도사는 두 마리의 진돗개에게 귀와 턱밑을 물린 상태로 입을 반쯤 벌린 채 서 있다가 곧 하체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사가 멈칫할 때 이미 가슴이 뭉클하던 조중구는 이제야 약효가 나타난 도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중구는 고달수가 알아낸 정보의 가치를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서 회장의 꼼수를 비로소 알아낸 것에 만족했다. 결국 서 회장은 조중구와 고달수의 관계를 의심했던 것이 아니라 고달수를 교란하려던 것이 확실했던 것이다.

"게임 끝. 진돗개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 도사가 위험해 보이는군요. 양측 견주 분들은 어서 개들을 떼어내시기 바랍니다."

황 총무가 급히 손을 휘저으며 진돗개의 승리를 알렸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경남 챔피언을 단숨에 깔아 뭉개던 서울 챔피언에 베팅을 한 모양이었다.

"축하한다. 역시 넌 운이 좋구나."

신동우가 씽긋 웃는 얼굴로 조중구를 돌아보았다.

"두 판에 한판을 이긴 게 운이 좋은 거냐?"

"그럼, 두 판 다 진 나는 어떻고?"

"그렇군."

잠시 후 황 총무의 발표를 들은 조중구는 진돗개에 베팅 한 배당금의 액수에 놀라고 말았다. 오백만 원의 베팅에 배당액이 이천오백만 원이나 되었던 것이다. 베팅액의 무려 다섯 배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사가 이길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조중구는 그제야 더 많이 베팅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과감히 일억쯤 투자를 했었다면 오억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조중구는 문득, 후회와 욕심 사이에서 이성을 찾기로 했다. 지난주에 잃은 삼억도 결국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천오백? 도대체 얼마를 베팅했길래 이천오백만 원이나 된단 말이냐?"

조중구의 배당금이 이천오백만 원이란 소리에 놀란 신동우의 말이었다.

"오백만 원을 걸었었지."

"그럼, 다섯 배잖아? 거 괜찮네."

"날마다 꼴뚜기가 난다더냐? 도사가 챔피언인데다 다른 도사를 쉽게 이기는 걸 봤으니 이번에도 이길 줄 알았던 사람이 더 많았던 거지."

"아무튼 그런 배당금만 보장된다면 몇 억쯤 베팅을 할 텐데 말이야."

"그러지 않아도 회원들이 늘어나니까 몇 억씩 베팅하는 사람도 여럿인가 보더라. 서 회장만 해도 요즘은 억 단위로 베팅을 하니까."

", 골치 아픈 일도 끝났으니 나도 본격적으로 여기로 와야겠다. 그리고 베팅도 너를 따라 하는 게 낫겠다. 도대체 너와 반대로 베팅해서 재미를 본 적이 없잖아?"

"글쎄, 그러다 둘 다 망하면 어쩌려고?"

"까짓, 그렇다고 공장까지야 들어먹겠냐?"

"허긴 넌 재미로 할 뿐이니까. 리스크도 적을 게다."

"그래서 배당액도 적다는 얘긴 왜 빼냐?"

"거 참, 언제부턴가 너랑 나랑 대화 내용이 서로 바뀐 것 같지 않냐?"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비꼬듯하는 말투가 중구 너의 전매특허였었지."

"처음엔 네가 날 투견 판에 끌어들였지만 이젠 내가 널 투견 판으로 다시 끌어들여야겠다."

조중구는 투견 시합을 보는 동안 신동우의 얼굴이 밝아진 것에 안도했다. 그동안 신동우가 집에서 겪었을 고충이 얼마나 컸겠는가?

"패가 망신하는 길로 끌어들이겠단 말이냐?"

"패가 망신의 길로 먼저 끌어들인 건 너라는 걸 잊지 마라."

"금동이 놈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가만, 다들 일어서잖아?"

공지사항을 알리는 황 총무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곽 사장이 조중구를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한데, 웃음 없는 그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역시 조 박사요. 나는 조 박사가 전반 시합에서 실패를 하기에 이번에도 그럴까 해서 반대로 베팅을 했다가 낭패를 보았소. 챔피언이라는 도사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질 줄은 몰랐구려. 허허."

웬만한 액수의 돈을 잃어도 웃음으로 넘기던 곽 사장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번 판에서 거액을 날린 모양이었다. 조중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가자 곽 사장도 맥없이 출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조중구와 신동우가 텅 빈 공장을 뒤에 두고 통로를 따라 밖으로 막 나설 때였다.

", 조 박사 아니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가 조중구의 발걸음을 세웠다. 돌아보니 서 회장의 아들인 서유석이었다. 서 회장과 나란히 걸어오던 서유석이 손을 번쩍 들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눈이 틀림없군. 한눈에 조 박사를 알아봤거든."

"서 전무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하하하, 나도 회원으로 가입을 했으니 오지 않을 수 있소?"

", 그러시군요."

조중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난번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쩐지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 이만... ."

조중구가 막 돌아서려는데 이번엔 서유석의 뒤에서 서 회장이 불쑥 나타나 조중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중구는 얼른 서 회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조 박사, 재미를 좀 보셨는가? 가만, 이 친구는 일진 금속 신 사장의 자제 아닌가? 자네 언젠가 부친과 함께 검단의 공장부지를 보러 온 적이 있지?"

", 그렇습니다. 오래전 일인데 어떻게 알아보시는군요."

"사람을 기억하는 게 내 사업이거든. 이번에 자네 부친이 그 땅 오천 평을 사셨지?"

", 입지와 주변 조건이 좋더군요."

"그럴 걸세. 사실 팔긴 좀 아까운 땅이었지. 하지만 동의당 주식을 사들이려고 할 수없이 팔았네."

"? 동의당이요?"

", 그렇군. 동의당의 도금동 이사가 자네들 친구랬지?"

서 회장은 새삼스럽게 조중구와 신동우를 둘러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서유석이 서 회장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님께서 이번에 동의당의 최대주주가 되셨소. 그리고 검단의 땅 역시 다 판 것은 아니오. 창고가 딸린 몇 천 평은 남겨 두었으니까. 그 창고는 상설 투견장으로 이미 단장을 마쳤소. 아마 다음 달부터 그곳에서 시합을 갖게 될 거요."

서유석이 서 회장을 대신해 동의당의 최대주주가 된 것을 과시하는 한편 투견장의 선전까지 하고 나서자 조중구는 그들 부자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궁금했다. 이번엔 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베팅에 일가견이 있는 조 박사이니 물론 오늘도 성공을 했겠지?"

서 회장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반의 경기는 판단 미스로 잃었고 진돗개에 베팅 한 다음 경기에서 간신히 만회를 했습니다."

"뭐라? 헤비급의 도사를 두고 진돗개에다 베팅을 했다고? 무엇을 믿고?"

"무얼 믿어서가 아니라 저야 워낙 투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어떤 개가 이길지 알 수없으니 베팅도 매번 운에 맡길 뿐이거든요. 사실 이길 개를 찾아내기란 까마귀의 암수를 알아맞히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하, 옳은 말이네. 조 박사 말이 맞는 말이야. 나 역시 일진이 좋은 날이 따로 있더라니까. 하하."

"아니? 회장님께선 요즘도 일진을 따라 베팅을 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난들 별 수 있겠나?"

", 그렇지요. 저도 지난주엔 일진이 나빴던지 베팅을 할 때마다 실패를 하더군요."

", 나는 조 박사가 베팅을 하는 족족 성공을 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먼."

서 회장은 안경 너머로 조중구를 빤히 바라보며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조중구는 그런 서 회장의 말하는 기색을 은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서 회장의 표정은 한결같아서 알아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조중구는 서 회장의 말에서 별다른 낌새는 없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따져보니 실제적 성공 확률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더군요."

"그래? 어쨌든 잘 해 보게. , 도금동군은 요즘도 바쁜가? 통 볼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 친구도 곧 우리와 합류를 할 겝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보기로 하지."

서 회장은 아들인 서유석과 함께 자신들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차들이 모두 빠져나간 마당 구석에서 라이트가 비치더니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나와 고개를 꺾는 것이 보였다.

"이제 아홉 시가 조금 넘었는데 어디 가서 뭘 좀 먹고 들어갈까?"

"그만두지. 난 여기까지 온 김에 인천으로 가 봐야겠다. 요즘 주문이 밀려 공장 사람들은 주말도 낮밤도 없거든. 야식이라도 좀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그럼 넌 오늘은 서울로 가긴 글렀구나?"

"사무실에 쓰던 침대가 있으니 괜찮아. 오늘은 너만 올라가라."

조중구는 할 수없이 신동우와 헤어져 혼자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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