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5. 추락의 길(1) 극과 극의 세상

fiction-google 2024. 3. 1.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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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절정에 이를 무렵이어서 TV에서는 연일 산을 오르내리는 행락객을 보여주고 있었다. 놀러 다니기 좋은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낙엽이 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듯 단풍을 찾아 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단풍이 꼭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심 속, 양재천변에 산재된 나무들도 제각기 노랗고 붉은 단풍잎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정시에 퇴근을 한 조중구는 자신의 주차 자리에 정확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지난달 새로 구입한 최신형 아우디 A6였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큼 미끈한 새 차였다. 천호동 빌라촌에서 강남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 조중구가 처음 느낀 것은 이웃의 차들이 엄청 좋구나 하는 것이었다. 거의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정도로 비싸고 미끈한 외제차 일색이었던 것이다.

조중구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쏘나타에 큰 불만이 없었지만 외제차 옆에 주차를 하고 보니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자신도 고급 아파트에 사는 주민답게 금년에 새로 출시한 아우디 A6를 사들인 것이다. 조중구는 천천히 현관으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뒤로 한 발 물러났다. 10층에 머물렀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와 문이 열렸다.

", 오빠."

공교롭게도 동생 문숙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었다.

", 너 어디 가니?"

", 아빠가 저녁밥 대신 라면을 드시겠다고 해서...."

"또 밥을 안 드신데? 어째서 밥보다 라면이 소화가 잘 된다고 하실까? 사다 논 라면이 없니?"

"떨어졌어."

"이 동네는 마트가 어디쯤이야?"

"큰길로 나가는 왼 쪽에 있어. 천호동에선 집 앞에 슈퍼가 몇 개나 있는데 여긴 집은 좋아도 슈퍼가 멀어서 살기엔 오히려 불편한 것 같아."

"그건 그렇구나. 그러면 나도 같이 가자. 가서 아예 라면을 박스로 사다 놓으면 될 것 아니냐?"

"아니야, 오빠는 집에 들어가, 내가 알아서 사 올 테니까."

"괜찮아. 같이 가자. 네게 할 말도 있으니까. 가만, 차로 갈까?"

"아냐, 주차하기만 불편할걸? 그냥 가.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야."

문숙이 앞장을 서자 조중구는 서둘러 동생과 보조를 맞추었다.

"향숙이는 아직 퇴근 안 했지?"

"갠 요즘 새로 남자와 열애 중이잖아."

"향숙이 보다 네가 더 급한 것 아니냐?"

"집에만 있으니 남자 사귈 기회가 있나 뭐? 하지만 그런 시간이 있데도 아직은 싫어. 내가 없으면 아버지랑 오빠는 어떻게?"

"별 걱정 다하는구나. 네가 없다고 집안일 할 사람 없겠니? 파출부는 뒀다 무엇에 쓰려고?"

"파출부가 아빠 식성을 어떻게 맞춰? 게다가 아빠도 불편해 하실 거야. 아니, 그보다. 난 우리 집안일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아."

"어쨌든 너도 나이가 있으니 선이라도 봐서 결혼할 생각을 해. 이젠 네 혼수쯤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

"혼수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현구 오빠 빌라를 사 준 것도 그렇고 향숙이에게 결혼 자금을 준 것도 그렇고... 어쩐지 우리 처지에 갑자기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 나는 겁이 나 죽겠어. 월급쟁이인 오빠가 갑자기 어디서 이런 엄청난 돈이 생겼을까를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이 떨리고 무서워 죽겠단 말이야."

문숙이는 말을 하는 사이에도 연신 조중구를 돌아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문숙이의 눈으로 보면 지난 몇 달 사이에 집안에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가난을 벗어나 본 적이 없던 가족 아닌가? 그런 가족이 갑자기 강남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하고 외제차를 타게 되었다면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복권에 당첨되지도 않은 조중구가 이런 엄청난 재주를 부린 것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무서울 것도 많구나. 신약 개발로 탄 포상금으로 사둔 주식이 대박이 났다고 하지 않더냐? 넌 걱정할 것 없어. 설마 겁 많은 내가 은행을 털었겠냐, 아니면 위조지폐를 찍었겠냐?"

"그래도....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살아도 마음이 편치 못한 건 사실이야. 아빠도 천호동에 살 때보다 행복하신 것 같지도 않고.... 대궐 같은 곳에 살아도 라면을 드시기는 마찬가지잖아? 오빠, 여기서 더 나가지는 말아요. 아니, 지금도 너무 과분한 곳까지 온 것 같아."

", . 돈을 벌어서 집안을 일으켜 놓아도 탈이로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 아버지 병원비를 걱정하던 때를 생각해 봐라. 결혼을 앞두고 돈이 없어 쩔쩔매던 현구나 상대가 내 건 조건을 맞출 수 없었던 향숙이는? 그리고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간 너 역시 가난의 희생자 아니냐? 지금이 과분하다고? 그럼 지난날이 정상이었단 말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정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앞으로 더 잘 살아야 해. 돈이야말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힘 자체란 말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 변화야.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란 말이야."

",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나는 어디까지나 합법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걸 모르냐? 오늘 네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야. 이젠 상대가 누구든 맞춰 줄 수 있으니까 너도 어서 결혼을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못했던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다시 시작하던지."

"그동안 오빠가 집안을 위해 총대를 맨 것만도 가슴 아팠어. 결혼도 포기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으니 나보다 오빠가 먼저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 그런 소리 마라. 난 자유를 위해서라면 독신을 고수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다. 내 성격은 내가 잘 알아. 구속은 싫어. 나는 자유롭고 싶거든."

"결혼이 어째서 구속이야? 내 생각엔 결혼은 타협일 것 같은데? 상황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 씩 맞추어 나가는 게 결혼 아닐까?"

"바로 그거야. 나는 타협하려는 그 생각 자체에 구속되기 싫은 사람이거든."

"어머머, 오빠도 궤변을 할 줄 아네."

마트 간판이 가까이 있었다. 조중구는 동생과 함께 마트로 들어서서 이것저것들을 둘러보았다. 조중구에겐 이런 곳은 익숙한 곳이 아니었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을 때 본 광경이 떠올랐다. 그때 엄마가 사 주었던 꽈배기 도넛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도넛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가?

조중구는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 있었고 그때는 돈이 없어 살 수 없었던 물건들이 이젠 사지 못할 물건이 없었다. 역시 돈은 좋은 것이었다. 가난의 원수를 갚는 데는 세상에 이만한 무기가 없는 것이다.

"온 김에 살 것 있으면 더 사라."

조중구가 느긋한 시선으로 진열된 생선들을 둘러보았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글쎄, 솔직히 말해서 옛날에는 먹고 싶은 게 많았는데 요즘엔 통 먹고 싶은 게 없다. 뿐이냐? 옛날엔 먹고도 배가 고팠었는데 요즘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이젠 정신적 허기를 면했다는 뜻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아버지 드릴 갈치나 사. 갈치는 드시잖아?"

"사다 둔 게 냉장고에 남았어."

"그럼, 네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만들려면 돼지고기나 참치캔은 사야지?"

"김치 찌개는 나만 좋아하나? 오빠들이나 향숙이도 좋아하지."

"그러고 보니 입들은 옛날 그대로구나."

결국 라면 한 박스와 참치 캔 두어 개를 산 조중구는 향숙이의 뒤를 따라 마트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백여 미터쯤 갔을 때였다. 휴대폰이 울었다. 발신자 표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고달수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생각이 언 듯 들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주말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던 조중구였다. 그러나 그동안 급한 불을 끈 데다 강남으로 이사까지 하고 나니 마음이 약간 느긋해서 예전만큼 초조하게 주말을 기다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 조중굽니다."

", 선생. 나요. 풍산개 두 마리가 고기를 먹었소. 그리고 이건 다른 정보요. 내일 도사 대 롯드 와일러의 시합도 있답디다. 그중에 도사가 고기를 먹었답디다. 도사 주인이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이라 알아낸 정보요."

"알았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조중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내일은 얼마를 베팅할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요 근래에 서 회장이 베팅액을 부쩍 늘려서 배당금을 왕창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회장의 그런 행동은 그동안 조중구가 과감한 베팅으로 돈을 몰아가자 거기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중구는 베팅액을 늘리려면 아무래도 적립금을 더 넣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무슨 전환데 그렇게 고민을 해?"

"고민을 하다니? 내가 말이냐?"

"지금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잖아?"

", 그래? 하지만 모든 게 잘 되고 있는데 인상을 찌푸릴 이유가 없지."

"아니야, 내 눈은 못 속여. 요즘 오빠가 종종 그런 전화를 받던데? 다른 말도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하는 전화 말이야.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오빠는 눈살을 찌푸렸거든. 오빠가 그럴 때마다 난 왠지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어.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문숙이의 말에 조중구는 접선을 하려다 들킨 간첩처럼 화들짝 놀랐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고달수의 전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에 몇 번의 통화 장면만 보고도 그런 낌새를 알다니? 조중구는 표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야말로 이 오빠를 범죄자로 몰아가는구나. 걱정 마라. 나는 준법정신만큼은 철저한 사람이니까."

"오빠를 믿기는 하지만... 세상이 어디 곧은 나무를 그냥 두는 세상이어야지."

",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 안 되겠다. 현구보다 널 먼저 보내야겠다."   

"에이 오빠는....?"

집으로 돌아온 조중구는 먼저 아버지 방에 들렀다. 아직 입원해 있어야 할 아버지였으나 병원을 죽기보다 싫어해서 통원 치료로 바꾼 것이다. 아직 깁스를 풀지 못 한 조중구의 아버지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중구가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별말이 없는 아버지였으나 사고 이후엔 더욱 말이 없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에 대해 몇 마디 나누려 든 조중구는 포기를 하고 물러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후 욕실로 갔다. 온수 쪽으로 꼭지를 돌리자마자 알맞은 온도의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조중구는 샤워기 아래에서 잠시 동안 서 있었다. 따뜻한 물방울이 머리에서 어깨로 등으로 마구 굴러 내리고 있었다.

조중구는 지난날을 생각했다. 집에서는 따뜻한 물 한 번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동네 목욕탕도 자주 갈 형편이 안 되던 시절 아니었던가? 대학을 다닐 때였던가? 도금동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본 욕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드시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이런 욕탕이 있는 집에서 살리라 마음먹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런 지금, 그때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마음먹었던 바는 성취한 것이니 방법을 문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저녁을 먹은 후 조중구는 발코니에 서서 양재천 변의 가로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산책을 나온 듯한 몇 사람이 가로등 아래로 지나고 있었다. 개울 건너편엔 몇몇 저층 아파트들이 뿌연 불빛에 싸여 있었다.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의 상반된 세상 풍경이었다.

양재천 건너 동네를 바라보던 조중구는 갑자기 또 다른 욕심이 울컥 솟았다. 동생들에게도 이런 아파트를 한 채 씩 사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가능한 욕심인 것만 같았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베팅만 잘 한다면 불가능한 욕심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창밖의 어둠을 향해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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