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택이 한열이와 함께 컨테이너가 있는 곳에 이르자 동방불패가 반갑다고 철망을 긁으며 짖어댔다. 동방불패가 아는 척을 하자 태산이에게 외면받았던 양구택은 한결 기분이 풀려서 철망 사이로 손을 넣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더니 빗자루를 든 배철권이 나왔다.
"아이고 선배님 오셨군요."
"엇, 동생이 여기 와 있는 줄은 몰랐네."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 해 죄송합니다."
"원 별 소릴 다 하는군. 더구나 야간 근무를 하면서 무슨 소린가? 오히려 낮에는 쉬어야 할 자네에게 개들까지 맡긴 내가 미안한 짓을 했지."
"원, 선배님도.... 한데, 개들과 짐을 오늘 다 옮기실 겁니까?"
"일단 개들을 먼저 옮기려고 하네. 내가 아직 운전을 못하니까 내 트럭에는 철망과 급하지 않은 물건을 실어 두고 내일이나 모레쯤 저 친구들이 와서 끌고 갈 걸세."
"그렇다면 그러실 게 아니라 선배님 트럭은 제가 몰아다 드리지요."
"뭐라고? 자네가? 아닐세 그럴 것 없네. 밤을 꼬박 새웠으니 낮엔 잠을 자야지."
"괜찮습니다. 한열이를 집에 데려다줄 겸 오히려 잘 된 일이지요."
"하, 이거 끝까지 자네 신세를 지게 되는 구먼."
"컨테이너는 청소를 했구요, 안에 있던 짐은 차에 싣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저 철망은 혼자서 엄두가 나질 않아서 철거를 못 했습니다."
"아, 그러지 않길 다행이네. 철망은 저 사람들이 뜯을 걸세."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한열이를 보내세요."
"그러겠네. 이것 참, 그동안 자네에게 너무 폐가 많았네. 내 따로 인사는 하겠네."
"별말씀을요. 오히려 태산이 덕에 한열이가 성격이 한결 밝아졌는걸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입원한 동안 자네뿐 아니라 한열이 덕을 단단히 보았으니 말일세. 하하."
"그럼, 가 보겠습니다."
배철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신의 경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고달수와 박철구는 투견장인 철망을 철거하려고 차에서 연장을 내리고 있었다. 양구택은 문득 여태까지 동방불패가 낳은 괴물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구택이 한열이를 찾아 컨테이너를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열이를 따라 여러 마리의 강아지들이 쫄랑거리며 나타났다. 개중에 금방 눈에 띄는 강아지가 있었다. 괴물 강아지였다. 다른 강아지의 거의 세 배나 되는 커다란 덩치에 회색빛과 누런색이 섞인 멋진 놈이었다.
"야, 이놈이로구나. 한 달 반 사이에 엄청나게 컸구나. 이제 젖은 완전히 땠나 보구나."
"아직은 아닌가 봐요. 동방불패와 같이 두면 젖을 먹으려고 못살게 굴거든요. 그래서 어제부터 제가 따로 뒀어요."
"잘했다. 이 정도면 젖을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네 강아지는 이름을 지었니?"
"그럼요, 이름을 우람이라고 지었어요. 크고 튼튼하게 크라는 뜻으로요."
"오, 그것 근사한 이름이구나. 그러나, 튼튼하게 자라려면 일단 주사를 맞혀야 된다. 내일 내가 홍역과 장염을 예방하는 주사를 놓아주마."
"그런 주사까지 맞혀야 해요?"
"그럼, 대부분의 강아지가 홍역과 장염을 이기지 못 해 죽고 마는 거란다."
"그럼 다른 강아지들도 다 맞혀 주세요."
"그래야겠지만 다른 강아지는 오늘 저 아저씨들 농장으로 데려갈 거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가면 저 아저씨들이 주사를 놓아줄 거야."
"오늘 데려가신다고요? 섭섭한데요?"
한열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 장난을 치는 강아지들을 한 마리씩 들어 올려 차례로 가슴에 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든 양구택은 지난날에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동물에게 지나치게 정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환경에 따라 생사가 쉽게 갈린단다. 그럴 때 동물에게 정을 깊이 준 사람은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는단 말이다. 동물은 동물일 뿐이야.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서는 안 된다."
"예? 태산이나 우람이까지 말이에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고 또 그래야만 나중에 네 마음이 덜 아플 거다."
"태산이나 우람이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나요?"
"친하게 지내는 거야 누가 뭐라 겠느냐만 너무 친해지면 헤어질 때 네가 힘이 들까 봐 그러지."
"안 헤어지면 되잖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과 달리 잘 안 될 때가 많으니 그렇지. 내가 처음 개 장수로 나섰을 때 얘기를 해 주마. 개 장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어떤 동네에서 개 한 마리를 사게 되었단다. 커다란 누렁개였지. 흥정이 끝나 돈을 준 후 개를 싣고서 막 떠나려는데 국민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아이가 책가방을 맨 채 달려오더니 오토바이에 실린 개장을 붙잡고 마구 울음을 터트리더구나."
"그 아이의 개였나요?"
"그랬지. 개장에 갇힌 개도 철망 사이로 아이의 손을 핥으며 엄청 낑낑대더구나."
"그래서요?"
다음이 궁금했던 한열이 양구택을 재촉했다. 양구택은 그때를 생각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가기는 가야겠는데 아이가 철망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갈 수도 없고 그 아이의 부모는 이미 돈을 받고 가버렸고.... 나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아이와 개가 한참을 서로 그렇게 울더구나. 그런데 그 아이의 눈과 개장에 실린 개의 눈빛을 보니 어찌나 애절한지 내 마음까지 아프더란 말이다. 아이와 개가 그만큼 서로에게 정이 든 것이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결국 내가 졌지. 개장에서 그 개를 꺼내 아이에게 돌려주었단다."
"돈도 안 돌려 받구요?"
"물론이지. 그때는 그냥 돌려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다."
"그 아이가 좋아했겠군요?"
"그랬지. 그런데 말이다. 며칠 후 그 길을 지나다 보니 지난번 그 아이가 다시 울고 있더구나. 그래서 왜 울고 있느냐고 내가 물었지."
"왜 울었데요? 개를 잃어버렸나요?"
"그 게 아니라 그 아이의 부모가 다른 개 장수에게 그 개를 또 팔았다더구나."
"예? 또요?"
"그래서 내가 차근차근하게 물어보니 다세대 주택인 그 아이의 집에서 그렇게 큰 개를 더 이상 키울 수가 없었던 거였어. 이웃의 항의를 견딜 수가 없었거든. 그 아이의 부모도 자식이 좋아한 개인 걸 번연히 알면서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란다. 그런 사정을 모른 나는 괜스레 헛 돈만 날린 데다 그 아이의 눈물을 보고 마음까지 아파한 손해를 봤고...."
"결국 그 아이는 그 개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군요."
"그렇겠지. 개와 깊이 정이 든 그 아이가 지금쯤은 어른이 되었겠지만 마음에 남은 그때의 상처는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게다. 그러니 너도 태산이나 우람이를 인간 취급해서 가족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말씀은 하세요. 그래서 우람이를 집에 데려가는 것을 꺼려하시나 봐요. 아직 집에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안 하시는 걸 보면요."
"네가 우람이와 너무 정이 들까 봐 걱정이 되신 거지. 부모란 그런 것이란다. 자식은 되도록 슬픔을 모르고 살았으면 해서란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사람과의 이별로 가슴에 큰 상처가 남기 마련인데 거기다 동물로 인한 슬픔까지 감당할 이유가 있겠냐?"
"전 그래도 태산이와 우람이가 좋아요."
"헛, 덩치만 컸지 아직은 어린 네게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그래,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양구택은 중학생에 불과한 어린 한열에게 어른의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자 자신의 개똥 철학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투견장을 해체하기 바뿐 고달수와 박철구에게로 다가갔다.
"잘 돼 가냐?"
"네 눈엔 이 게 잘 돼가는 걸로 보이냐?"
사다리 위에 올라선 박철구가 절단기로 이음새를 자르며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고달수는 문짝을 떼서 트럭에 싣고 있었다.
"이거, 무슨 지랄로 철망을 이렇게 높이까지 친 거냐? 개가 날아갈까 봐 그랬냐?"
박철구가 사다리 위에서의 힘 든 작업에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야 인마, 철망을 높이라고 말한 놈이 누구냐? 태산이가 넘어가지 못 할 정도로 높이라고 말한 놈이 네놈 아니냔 말이다."
"높이랬다고 이렇게 높이 할 이유가 뭐냔 말이다. 뜯어낼 때도 생각해야지."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지난번 보니까 태산이가 삼 미터 넘게 뛰어오르더라. 허긴 그 때, 태산이가 좀 더 높이 뛰었거나 철망이 여기서 조금만 낮았으면 쉽게 넘어왔을 테고.... 그럼 내가 지금 이 꼴이 안 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만, 삼 미터라고 했냐? 삼 미터 면... 가만, 이 정도 높인데... 이 높이를 뛰어오르더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오죽하면 네게 S. O. S 를 날렸겠냐? 그랬더니 철망을 더 높이라고 한 게 바로 너고.... 이제 알았냐? 그러니 불만 갖지 말고 일이나 계속해."
"이 높이를 뛰었단 말이지..... 흠, 개 올림픽이 있었으면 금메달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구나."
"개 올림픽이 있으면 넌 무슨 종목에 출전할 건데?"
"뭐라고? 이 자식이 이젠 동업자인 나를 개로 취급하네? 야, 달수야, 이 자식이 또 옛날 버릇이 나온다. 어쩌면 좋으냐?"
박철구가 갑자기 고달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뜯어내린 철망을 가지러 오던 고달수가 영문을 몰라 양구택을 바라보았다. 트럭으로 철망을 옮기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이다.
"무슨 소리야? 꾸물대다가 오전에 일을 못 끝내게 생겼구먼."
"그러게 말이다. 내 차에 철망을 다 실을 수 있겠지?"
양구택은 고달수를 상대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철망이야 둘둘 말면 부피가 얼마 되냐? 컨테이너에 있던 물건을 몽땅 싣고도 자리가 남을 것이다. 참, 이따가 네가 그 빈자리에 타면 되겠다."
"거, 참, 철구나 네가 하는 농담은 어쩌면 한결같으냐? 이 주먹이 단숨에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냐?"
"너도 이젠 늙었구나. 몇 년 전만 해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턱 밑까진 주먹을 뻗었었는데... 쯧 쯧."
"헛, 그러고 보니 그렇군. 네 말대로 나도 이젠 나이를 먹었나 봐."
"나이는 너 혼자 먹었냐? 철구도 나도 다 같이 먹었지."
"네 말이 맞다. 세월 한 번 금방이로군.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라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냐? 이제부터 부자가 되려는 마당에? 왕년의 삼총사가 다시 뭉쳤는데 빌어먹다니? 너 그 말 취소해라. 기분 나쁘다."
양구택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고달수가 정색을 하고 나서자 박철구도 사다리에서 내려와 함께 나섰다. 그리고는 인상을 쓰며 낮게 지껄였다.
"맞아, 말대로 된다는데 구택이 너 그딴 소리를 막 할 거냐?"
갑자기 두 사람이 따지고 드는지라 양구택은 얼떨떨한 가운데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알았다. 정정이다. 세월 한 번 빨리 가서 대박이로군. 됐냐?"
양구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달수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 자식도 이젠 진짜 늙었구나. 우린 농담을 한 건데 자신이 한 말을 다 고치니 말이야."
"맞아, 몇 년 전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지. 고집을 뻑뻑 부리면서 제 말이 맞다는 놈 아니었냐? 히힛, 내가 늙는 것보다 이 자식이 늙으니 기분이 왜 이리 좋으냐?"
어이가 없어진 양구택이 주먹을 불끈 쥐려다 깁스를 한 팔에 통증이 와서 인상을 찌푸렸다. 양구택은 말없이 고달수와 박철구를 노려 본 뒤 한열이가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간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앞장세운 한열이가 멀리 보였다. 그 뒤를 작은 점들이 따라가는 것도 보였다. 그중 조금 더 큰 점이 우람이라고 이름 지은 괴물 강아지일 터였다. 양구택은 천천히 바닷가로 향했다. 양구택을 발견한 한열이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양구택도 얼른 손을 들어 화답했다. 개들과 함께 한열이 양구택에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달려온 동방불패가 양구택의 주위를 껑충거리다가 손을 핥았다. 그러나 다가왔던 태산이는 양구택의 주위를 돌 뿐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양구택은 그런 태산이가 못내 섭섭했다. 그러나 한 편 태산이의 그런 행동을 이해했기에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아직 불편하실 텐데 뭣하러 이곳까지 나오셨어요?"
"운동 삼아 나온 거다. 아이쿠 이젠 저 강아지들도 잘 따라다니는구나."
양구택은 털 뭉치처럼 둘둘 굴러다니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아지들은 제 어미를 닮아 털이 북슬 북슬 해서 흡사 털 뭉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중에 유일하게 괴물 강아지만 털이 좀 짧았고 색깔도 형제 강아지들과 달리 누런색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일주일 전에 왔을 때랑 전혀 달라요. 이젠 저보다 빠르거든요."
"모르긴 해도 강아지의 일주일은 아마 사람의 육 개월과 같을 거다. 사람보다 월등히 성장이 빠르거든. 대신 수명도 사람보다 빠르지."
"그래요? 그럼 태산이의 수명은 어느 정도지요?"
"글쎄. 개들의 평균 수명은 십오륙 년이 한계야. 하지만 대형견일수록 수명이 짧아서 평균적으로 십여 년 정도일 게다."
"예? 그렇게 밖에 못 살아요?"
"그래서 아까 내가 그랬잖니? 정을 너무 주면 이별할 때 더 깊은 상처를 받는다고. 헤어지기 싫어도 개가 사람보다 먼저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십 년은 너무한 것 같아요."
"글쎄,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개가 사람만큼 오래 산다면 어찌 되겠니?"
"그건... 생각을 안 해 봐서 잘 모르겠어요."
"하하, 그건 나도 모른다. 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서 개 장수로 나서고 말았으니까. 그러니 그런 건 너 스스로 알아내거라. 그러려면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거다."
양구택은 개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죽은 아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은 자신이 퇴학을 당하던 그 당시의 나이와 꼭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권투를 배운답시고 고달수와 박철구를 꼬붕으로 삼아 껄렁거리고 다니던 그때가 떠오르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컨테이너가 있는 쪽에서 자동차의 크랙션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아마도 왕년의 두 꼬봉인 고달수와 박철구가 작업을 마치고 자신을 부르는 신호일 것이었다. 양구택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얘, 한열아 저 아저씨들이 일을 마쳤나 보다. 돌아가자꾸나. 참, 너의 아버지가 내 차를 운전하기로 했으니 너도 그 차를 타거라."
"강아지는 어느 차에 태우지요?"
"일단 빈 개장에 모두 싣고 가자. 가서 네 강아지만 빼고 나머지는 저 아저씨들이 가져 갈거니까."
고달수는 한열이와 함께 천천히 컨테이너로 돌아왔다.
"다 뜯어서 차에 실어 놨다. 이제 개들을 싣고 떠나면 된다."
박철구가 연장을 정리하며 양구택을 향해 히죽 웃었다.
"수고들 했다. 내가 사흘 동안 만든 것을 단 삼십 분 만에 뜯었구나."
"뭘 그까짓 걸. 삼십 년 된 개 장수를 단 삼 분만에 팔 다리가 다 뜯은 도사도 있는데."
박철구가 양구택의 깁스 한 팔을 가리키며 연신 히죽히죽 웃었다.
"야, 달수야, 내가 이 꼴이 나고부터 저 자식이 간이 커진 것 같지 않냐?"
"쟤 간은 학생 때 네가 다 키워놓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저놈이 먼저 나서 교장 아들인 준표 자식의 코를 뭉개버렸지."
고달수 역시 빙긋 웃으며 박철구 편을 들었다. 양구택은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두 녀석이 작정을 하고 자신을 놀리려 들기 때문이었다.
"자, 준비됐으면 개들부터 싣자. 태산이부터 달수 네 차에 실어."
"그러지, 한데, 저 녀석이 차에 올라가려고 할까? 개장을 내려서 집어넣을까?"
"그건 안 될 말이다. 개장 무게만도 무거운데 이백 킬로에 가까운 태산이까지 들어가면 그걸 누가 차에 올릴래? 내가 이 꼴이라 너흴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그럼, 태산이가 스스로 차에 오르게 하자."
"그 수밖에 없어. 그런데 저 녀석이 내 말을 잘 들으려 할까?"
양구택은 박철구의 차에 실린 작은 개장에 강아지를 한 마리씩 넣고있는 한열이 쪽을 바라보았다. 태산이는 주인인 양구택을 외면하고 한열이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가만, 저 한열이를 시켜서 태산이를 차에 올라가도록 해야겠군. 얘, 한열아. 강아지를 다 실었으면 태산이를 이 차에 좀 태워라."
양구택이 부르는 소리에 마지막 강아지를 집어 든 한열이가 돌아 보았다.
"예, 아저씨 곧 갈게요."
"헛, 잘 논다. 주인이란 작자의 꼴이 말이 아니군. 개가 주인 말을 듣지 않다니 만고에 없는 일 아니냐? 이게 픽션이 아니라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소재가 아닌가 말이야."
고달수가 한심한 표정으로 양구택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박철구도 얼른 가세했다.
"내 도사견 탓이었단 소리는 하지 마라. 싫다는 태산이를 강제로 도사들 우리에 집어넣은 건 너니까."
"아, 그만들 해. 난들 그러고 싶어 그랬겠냐? 나도 그동안 충분히 반성을 했단 말이다. 한데도 태산이가 아직 내 마음을 몰라주어서 그 게 문제일 뿐이야."
"반성도 좋지만 앞으로가 문제군. 저런 녀석을 어떻게 투견 판에 내 보내겠냐?"
"빠른 시간 안에 신뢰를 회복하도록 해야지. 농장에 데려가면 아예 같이 먹고 잘 거니까."
"어,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네가 태산이 처럼 개가 되어 생각하고 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 것도 없지. 암."
"아니? 이 자식은 진지한 이 시간에 입에서 농담이 술술 나오네? 이 게 나만의 문제냐? 동업자인 너희에겐 강 건너 불구경이냐?"
양구택이 정색을 하자 농담을 던진 박철구는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경험상 더 끌면 양구택의 본격적인 성깔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달수가 역시 박철구가 입을 다무는 까닭을 알기에 자신도 입을 닫았다.
"태산이를 이 트럭에 태우실 거예요?"
커다란 개장이 실린 고달수의 트럭으로 다가온 한열이 양구택에게 물었다.
"그래, 내가 몸이 불편해서 그러니 네가 트럭으로 올라가 태산이를 저기다 좀 실어다오."
"그러죠."
트럭 위로 올라간 한열이 개장의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태산이는 트럭 위의 한열에게 눈길을 떼지 않고 앉아 있었다.
"태산아, 이리 올라와. 괜찮아. 이리 올라와 봐."
한열이 손짓과 함께 부드럽게 부르자 태산이는 서슴없이 짐칸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트럭이 움찔하며 크게 흔들렸다.
"잘 했어. 이제 여기로 들어가. 우리 이사 갈 거니까. 옳지. 어서 들어가."
한열이와 눈이 마주친 태산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커다란 머리를 개장 속으로 들이밀었다. 한열은 창살 사이로 태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문을 닫았다.
"동방불패는 저 강아지 실린 차에 태워야죠?"
"그래, 이왕이면 동방불패도 네가 실어주렴."
"그러죠. 그런데 개장이 좀 작아 보이던 데요? 동방불패가 불편할 것 같아요."
"농장까지 기껏해야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괜찮을 게다."
박철구의 트럭으로 다가 간 한열이 동방불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아지들이 있는 개장을 가리켰다.
"넌 안 갈래? 태산이도 가고 강아지들도 다 가거든. 그러니까 너도 얼른 저 위로 올라 가. 아니, 내가 먼저 올라갈 게..... 자, 너도 올라와."
한열의 말에도 동방불패는 태산이와 달리 한참을 망설이며 적재함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 트럭 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내키지 않는 듯 미적거리다 개장 안으로 밀리 듯 들어갔다. 한열은 동방불패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방불패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양구택이 고달수와 박철구에게로 돌아섰다.
"자, 다 실었으니 천막을 씌우라고. 내 잠깐 후배에게 갔다 올 테니까. 한열아 너도 여기 있거라. 내가 가서 네 아버지가 바쁜지 보고 올 테니까."
고달수와 박철구에게 하는 얘기를 들은 한열이 양구택 앞으로 먼저 나섰다.
"떠날 준비가 되면 저보고 부르러 오라고 하셨는데요?"
"아니다. 너희 아버지가 다른 할 일이 있으면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다. 차에 급한 짐은 없으니까. 그러니 내가 가서 보고 오마."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갈래요. 집에 간다는 말씀을 드려야죠."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양구택은 한열이와 함께 컨테이너 뒤를 돌아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창고 쪽에 여러 대의 트럭과 승용차가 서 있었다. 양구택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열이를 돌아보았다. 차들을 발견한 한열이 역시 궁금한 표정이었다.
"어? 저 차들은 뭐냐?"
"글쎄요. 아마 현장에서 자재가 필요했나 보네요."
"일요일에도 작업을 한단 말이냐?"
"그럼요. 공사는 쉬는 날이 없데요."
"허긴, 노가다 판에서 쉬는 날은 비 오는 날이라고 하더라만... ."
양구택과 한열이는 걸음을 좀 더 빨리 걸었다. 그런데 경비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벌써 회장님이 오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걸 누가 책임질 거냔 말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열쇠 둔 곳을 모르다니?"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 잘못입니다. 망가진 창고의 문은 제 돈으로 고쳐놓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더 봐 주십시오. 과장님 제발."
"이런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어디 한두 번이래야 봐주지. 너 때문에 나까지 짤리게 생긴 마당에 봐 주긴 뭘 더 봐줘."
"과장님, 제발... ."
"아, 시끄러워, 넌 이 순간부터 해고야. 내 분명히 당신에게 해고 통보를 했어요. 이제부터 남남이니 존댓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해고를 당했으니 짐 싸서 어서 떠나 주세요. 아아 씨팔.... 이거 회장님 오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말이야."
"과, 과장님, 이러시면 저는...."
고함 소리가 난 경비실로 한열이가 재빨리 다가가자 자신의 아버지인 배철권이 무릎을 꿇은 채 낯 선 사람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한열이 아버지에게로 뛰어들었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이러세요?"
"오라, 여기 이 사람이 네 아버진가 보구나. 네 아버지가 창고의 열쇠를 잃어버려서 창고 문을 부수었다. 그런데 열쇠를 절대로 잃은 것이 아니고 어디다 둔지 깜박했다는데 그게 그거 아니겠냐? 내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말을 않겠다. 그러니 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 열쇠요? 아버지. 열쇠는 저기 벽에 걸려 있었잖아요?"
열쇠라는 말에 한열이 급히 경비실의 한 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몇 개의 옷걸이가 박혀 있었는데 한열이가 보았다는 옷걸이엔 수건이 걸려 있었다. 한열이가 급히 벽에 걸린 수건을 벗겨내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열쇠 꾸러미가 얌전히 걸려 있었다.
"보세요. 여기 열쇠 있잖아요. 아버지 열쇠를 찾았어요."
"아차, 그렇구나. 잘 보이게 거기다 둔다는게 깜박하고 수건을 또 걸었었구나."
배철권이 황망한 눈길로 한열이가 들어 보이는 열쇠 꾸러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앙에 버티고 선 과장이란 자는 냉소를 띤 얼굴로 싸늘하게 선을 그었다.
"이미 창고 문을 다 때려 부순 마당에 열쇠가 나오면 뭘 해? 한 번 해고 면 그걸로 끝이니 경비로 복직을 하려면 입사 절차를 새로 밟으시오. 그리고 당장 당신 짐과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비워 주시오. 지금 당장이오. 당장."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과장에게 한열이 앞을 막아섰다.
"아저씨, 창고 문은 다 고쳐드릴 테니 우리 아버지 해고하시지 말아주세요. 예?"
"헛, 늦었다는데도 그러네. 대신 입사 절차를 새로 밟는 건 나도 안 말려. 그리고 아직 학생인 너는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마라."
이번엔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밖에서 보고 있던 양구택이 다리를 절뚝이며 경비실로 들어섰다. 양구택은 과장이란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아니?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말이야. 이거 아랫사람이라고 제멋대로 해고를 해도 되는 거요? 이 사람도 엄연한 한 가정의 가장인데 그렇게 쉽게 툭툭 자르면 당신이 이 사람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거요 뭐요?"
뜻밖에 양구택이 끼어들어 언성을 높이자 과장이란 자는 어이가 없어 멀뚱히 눈을 굴리더니 목청을 한껏 높이는 것이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공적인 일에 끼어들어? 야, 조 십장. 이 사람들 좀 끌어내. 어서. 이거야 원, 야, 조 십장 내 말 안 들려? 빨리 와서 끌어내라고."
과장의 호통에 놀란 시늉을 한 조 십장이란 자가 자재를 싣고있던 인부들을 닦달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경비실로 들어와 양구택을 좌우로 잡고 밖으로 끌었다.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더러워서 여기 있으래도 더 이상 안 있을 테니 놓으라고. 좋다, 내 몸에 손만 대봐라. 경찰과 노동청에 신고를 확 해 버릴 테니까. 이거 봐. 동생. 자네도 얼른 짐 싸서 한열이 데리고 나오게. 이거야 순 깡패 같은 놈들 아닌가 말이야."
양구택은 끌려나오면서도 계속 악을 쓰며 저항했다. 그 사이 한열은 배철권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아버지도 나가세요. 물건은 제가 챙길 테니까요."
배철권은 그때까지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열은 그런 아버지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 보냈다. 그리고 나서 책상 서랍에서 비닐 가방을 꺼내 아버지가 쓰던 냄비나 그릇 등의 취사도구를 모조리 주워 담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옷과 수건을 담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양구택이 배철권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하고 있었다.
"가세. 왕년의 한국 챔피언인 자네가 이런 놈들 밑에서 굽실댈 것 없네. 여기가 아니어도 자네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네."
양구택의 진심 어린 위로에도 배철권은 아무런 말이 없이 하늘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양손에 비닐 가방을 든 한열이 아버지 곁에 나란히 섰다.
"가요, 아버지. 저도 양 씨 아저씨 말씀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여기보다 더 나은 곳에서 일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한열이를 봐서라도 자네가 이러면 안 되네. 자 가세."
양구택이 배철권의 등을 밀어 컨테이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갔을 때였다. 창고 쪽에서 자동차 크랙션 소리가 들리더니 몇 대의 승용차가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맨 앞의 검은 승용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더니 금세 창고 앞으로 와서 문이 열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사십 살쯤의 사내로 그는 다짜고짜 인부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책임자가 어떤 놈이야? 엉? 어떤 개새끼냔 말이야."
사내의 고함 소리에 놀란 과장이란 자가 경비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아앗, 전무님."
"네가 여기 책임자냐?"
"예, 예엣, 전무님. 자재 과장 마강숩니다."
"너 이 새끼,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 저 자재들은 왜 이제야 실어낸단 말이냐고. 엉? 네 눈엔 저기 회장님과 귀빈들이 오시는 게 안 보이냐? 회장님 오시기 전에 깨끗이 비우라는 김 부장의 지시를 못 받았단 말이야? 야 이새끼 너 이리 가까이 와."
사내는 주춤주춤 다가서는 마 과장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발로 차 버렸다. 정강이를 걷어차인 마 과장은 억하는 비명과 함께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너 이 새끼,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손님을 모신 회장님 마음을 어지럽혀? 시말서 써 와, 아니, 사직서 제출해. 너 따윈 당장 해고야 해고."
"전무님, 용서하십시오. 제 잘못이 아닙니다. 경비란 자가 창고의 열쇠를 잃어버려서.... 찾다가.... 그래서 문을 부수느라 늦은 겁니다."
"시끄러워. 시킨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한 너 같은 새끼를 믿고 어떻게 자재와 창고를 맡긴단 말이야? 꺼져. 주먹 날아가기 전에 눈앞에 보이지 말고 꺼지란 말이야."
전무라는 사내의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뒤따르던 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맨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은 황백구 총무였다. 황백구는 먼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서인곤 회장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차에서 내린 서 회장은 다른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데리고 경비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정강이를 차였던 마강수 과장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후다닥 달려가 서 회장에게 기역 자로 고개를 숙였다.
"어, 자네가 여기 책임잔가? 그런데 어째 일이 아직 안 끝난 것 같군."
"예 회장님, 곧 끝납니다."
"아, 괜찮네. 창고는 전무와 나만 보면 되니까. 어서 일들 해."
"옛, 회장님. 그럼."
죽음에서 기사회생한 마강수 과장이 다시 직각으로 허리를 굽힌 후 창고로 돌아섰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선지 전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야, 너, 나 좀 봐."
"예? 예엣 전무님."
전무가 부르는 소리에 새삼 놀란 마 과장이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섰다.
"하나 잊은 게 있어. 아까 경비란 자가 열쇠를 잊어버렸다고 했지? 하면, 그 경비란 새끼는 어디 있어? 열쇠를 잃어 이 꼴을 만든 경비란 새끼는 어디 있냐고?"
"아, 예. 제가 조금 전에 해고를 시켜서 보냈습니다. 아, 저기 가는군요. 저 바닷가 쪽으로 가는 사람 중에 왼쪽이 그 경비 놈입니다."
"그래? 저 자식을 해고만 시키고 그냥 보냈단 말이지? 흠, 그래선 안되지. 너 가서 저 자식을 이리로 데려 와. 아니, 그냥 둬. 여기서 그러면 곤란하지."
전무란 자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백여 미터나 떨어져 걸어가는 배철권 일행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요?"
전무를 먼저 발견한 한열이 배철권에게 알렸다. 배철권과 양구택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못 보던 사내가 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어이, 거기 서. 서라고."
사내의 고함 소리에 영문을 모른 세 사람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이어서 사내도 그들 앞에 다가와 마주 섰다. 그리고는 번질거리는 눈빛으로 다짜고짜 반말로 물었다.
"방금 해고당한 저 창고의 경비가 누구야?"
"접니다만, 뉘신지요?"
사내를 향해 돌아선 배철권이 침착한 어조로 반문했다.
"오, 네가 경비란 말이지? 너 이 자식, 정신을 어디다 빼놓아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배철권 보다 먼저 양구택이 발끈해서 먼저 나섰다.
"거기에 대한 문책으로 이 사람을 해고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도대체 당신이 누구길래 반말이오?"
"어라, 이건 또 뭐야? 너도 경비냐?"
"경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 눈엔 세상 사람이 모두 너의 집 경비로 보이냐? 어따 대고 반말이야?"
약이 오른 양구택이 깁스 한 오른팔을 앞세워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듯 사내가 풀썩 웃더니 다시 배철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아하니 낫살이나 먹은 영감이라 내가 접어주지. 대신 너, 엉터리 경비. 너는 내가 용서를 못 해. 그러니 잘못한 값을 몇 대는 맞아야지."
"이 게 무슨 경우요? 당신이 누군데 날 때린단 말이요?"
"아직 몰랐냐? 내가 바로 해공의 전무인 서유석이란걸."
서유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서인곤 회장의 아들로서 나이트 카바레를 몇 개나 운영하는 폭력 조직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공식 직함은 해공 건설의 전무 이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제 아비인 서 회장과 창고를 투견장으로 개조할 의논을 할 겸, 공장부지를 팔려고 고객들과 함께 온 것이다.
"높으신 분의 성함을 나 같은 쫄짜가 어찌 알겠소? 그리고 해고를 했으면 그것이 제일 큰 문책 아니요? 그럼 됐지, 내가 당신에게 또 맞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이요?"
"오늘 회장님께서 귀빈들을 모시고 사업 설명회를 하시려고 했는데 네놈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됐으니 그 일정을 망친 것 아니냐? 그러니 회사로선 막대한 손실을 본 것이지. 그 게 해고로 끝날 일이냐?"
서유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던 양구택이 눈을 치켜뜨며 다시 나섰다.
"그래서? 해고도 모자라 이젠 사람을 치시겠다? 그럼 어디 나부터 쳐 보시지?"
"이 영감은 뭔데 아까부터 자꾸만 나서? 다치기 싫으면 저리 꺼지란 말이야."
서유석이 말로는 모자라서 양구택의 가슴을 한 손으로 확 밀쳤다. 가득이나 팔다리가 다 낫지 않은 양구택은 단번에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앗. 아저씨."
"어 엇, 선배님."
놀란 한열이 들었던 비닐 가방을 팽개치며 얼른 양구택을 부축했다.
"저, 저 자식이 사람을 치네?"
양구택이 일어나려고 애를 쓰며 서유석을 노려 보았다.
"그러게 당사자도 아니면서 다 늙은 영감이 나서긴 왜 나서?"
"뭐라고? 야 이놈아. 내 나이 쉰도 안 됐다. 영감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사람을 치려는 걸 보면 주먹깨나 쓰는 모양이다만 그런 주먹은 나도 있다. 이놈아."
"뭐야? 이놈이라니? 이 영감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군."
한열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선 양구택이 다시 서유석의 코앞으로 다가 들었다. 그러자 인상을 일그러트린 서유석이 양구택을 향해 손바닥을 번쩍 쳐들었다. 그때 배철권이 재빨리 두 사람 사이로 끼어서 서유석의 행동을 말렸다.
"그만 두시요. 젊은 사람이 연장자에게 무슨 짓이요? 더구나 이 분은 환자 아니요?"
"그렇군. 이 영감이 아니라 네게 볼일이 남았었지. 볼일은 끝내야지. 자, 우선 이것부터 먹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유석의 전광석화 같은 펀치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두 사람의 사이가 워낙 가까워 팔을 뻗을 공간이 없자 서유석은 배철권의 턱밑에 아파 컷을 올려친 것이다. 그러나 서유석의 한 방은 배철권의 턱을 살짝 빗나가 허공을 치고 말았다. 서유석의 주먹이 올라오는 순간 배철권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기 때문이다.
"어라? 피해? 너 이 새끼 운동 좀 했구나. 좋다."
서유석이 성큼 한발 뒤로 물러나더니 느닷없이 배철권의 얼굴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배철권은 상체를 뒤로 휘청 흔들어 그 주먹을 또 피했다.
"어? 이 게."
두 번의 주먹이 다 오발로 흐르자 서유석의 번질거리는 눈빛이 악어처럼 변해서 본격적인 복싱 자세를 취했다. 주먹을 말아 쥔 서유석이 가볍게 상체를 한두 번 흔들다가 발을 앞으로 내 디디며 번개처럼 훅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서유석의 모션을 눈여겨 보던 배철권은 상체와 머리를 슬쩍 숙여 그 주먹을 흘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배철권은 자신도 모르게 크랩 가드의 자세를 잡았다. 즉 앞 팔을 아래로 내려 복부를 보호하고 왼손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두는 수동적 방어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배철권으로선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대신 공 매를 맞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배철권의 자세를 보자 약이 오른 서유석이 왼손을 쭉 뻗어 스트레이트를 꽂았다. 이 주먹 역시 빠른 스텝을 이용한 배철권의 몸놀림에 무산이 되자 이성을 잃기 시작한 서유석이 좌우로 훅을 날리며 마구 돌진했다.
그러나 배철권은 훈련을 통한 기술적 스텝을 구사하며 날아오는 서유석의 펀치를 모조리 피해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복싱 경기가 눈앞에 펼쳐지자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난 사람은 양구택이었다. 서유석의 펀치를 되받아 치지도 않고 오는 족족 흘려버리는 배철권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신명이 난 것이다.
"잘 한다. 그렇지. 위빙... 위빙해야지. 옳지. 흔들어, 그래, 바로 그 거야. 옳지."
양구택의 입에서 어느새 링 위에 올라간 선수를 코치하는 감독처럼 신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왼 주먹을 불끈 쥐고 상체를 이리 저리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더욱 화가 난 서유석이 마지막 힘과 기술을 발휘할 양으로 잠시 기회를 노리더니 왼손으로 훅을 날릴 것처럼 훼이크 모션을 취하다가 벼락같이 오른손 훅을 날렸다.
그러나 그 주먹마져 허공을 가르자 갑자기 서유석의 상체가 배철권에게 왈칵 쏠렸다. 그순간 서유석의 턱 밑에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배철권의 주먹이 딱 멈추었다. 소위 플리커 잽이라는 것으로 크랩 가드 상태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리듯이 치는 잽이었다. 만약 배철권이 턱밑에서 주먹을 끊지 않았다면 턱뼈가 부러졌으리라.
"링 위였다면 당신은 이 순간에 케이오가 됐을 것이오."
배철권이 서유석의 귀에 조용히 말했다. 서유석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새삼 배철권을 올려다보았다. 배철권은 서유석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양구택과 아들인 한열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시지요. 선배님."
이 순간 양구택은 왕년의 기분이 다시 솟구쳐 자신이 상대를 때려눕힌 듯 서유석을 향해 한 말씀을 읊었다.
"어이 젊은 친구.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아무개 회장의 말을 명심해. 그리고 오늘 일은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이 친구가 바로 무려 칠 년 동안 한국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던 배철권 선수니까 말이야."
배철권은 비닐 가방을 챙기는 한열을 데리고 컨테이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양구택이 다리를 절며 그 뒤를 따랐다. 서유석은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서유석은 그제서야 조직의 보스요 해공 건설 전무인 자신이 너무 가벼운 처신을 한 것을 느꼈다. 이 창피를 누구에게 까발리겠는가? 입이 쓴 서유석이 맥없이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양구택이 배철권 부자와 함께 트럭으로 다가가자 기다리기 지친 고달수와 박철구가 차에서 내려와 눈을 흘겼다. 박철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뭘 하다 이제 와? 이러다 점심도 먹기 전에 저녁밥 먹게 생겼잖아?"
"그렇게 됐다. 전무란 작자와 시비를 가리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핫하."
"시비라니? 갑자기 전무는 뭐고 시비란 또 뭐냐? 게다가 뭐가 좋아서 웃냐? 뭐 좋은 일 있냐? 조금 전에 보니 창고 쪽으로 검은 차들이 몰려가던데 혹시 그것 때문이냐?"
"그것 때문이 아니라 서 뭐라는 전무 놈이 웃겨서 그래. 그놈이 저 사람에게 덤볐다가 창피를 톡톡히 당했지 뭐야. 전직 프로 권투 선수를 우습게 본 서 뭐라는 그놈이 간이 서늘했을 것이다. 게다가... ."
"서 뭐라는 이름도 있냐?"
"서 뭐랬는데 잊어버려서 그렇지. 따지기는...."
박철구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자 하려 든 말을 잠시 잊은 양구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비닐 가방들을 적재함에 싣던 한열이 그 소리를 들었다.
"서유석이랬어요. 그 전무라는 사람 이름이 서유석이요."
"맞다. 서유석. 가는 세월 어쩌고 하던 가수 이름과 같다고 생각해 놓고서도 잊었구나."
"그래서 서유석이 어찌 되었다는 거야?"
박철구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고달수가 한발 다가서더니 박철구에게 물었다.
"야, 서유석이라는 사람이 혹시 투견 동호회 서 회장의 아들 아니냐?"
"글쎄, 내가 그걸 어찌 알겠냐?"
"그 작자가 네 겐 안 갔었나 보구나."
"무슨 소리야?"
"음, 언젠가 내 농장으로 서 회장이 젊은 사람과 함께 왔었거든. 한데, 그들을 모셔왔던 황 총무가 젊은 사람은 서 회장의 아들이자 해공 건설 전무라고 내 게 슬쩍 귀띔을 한 적이 있어. 그러니 그 전무가 바로 그 전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지."
고달수의 말이 끝나자 이번엔 배철권이 말을 이었다.
"아, 그럼 그 사람이 바로 아까 본 그 사람이 확실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해공 건설 전무라고 본인이 말했거든요. 회장도 곧 온다고 했었지요."
"어, 그래요? 그럼 여기서 꾸물거릴 이유가 없지. 야, 구택아 일단 여길 뜨고 보자."
"도망은 왜? 달수 너, 회장이란 사람에게 빚진 게 있냐?"
"야, 임마 내가 개를 공급하는 투견장이 바로 서 회장이 운영하는 곳이란 말이야. 그런 마당에 전무란 자와 다퉜다니 잘못해서 회장과 부딪치면 내 밥줄은 물론 아차하면 태산이까지 공개될 것 아니냐? 까짓, 내 밥줄이야 그렇다 쳐도 태산이를 보여선 안 되지. 그러지 않아도 항상 색다른 투견을 원하는 영감인데 말이야."
"그 건 그렇겠다. 그럼 일단 내 농장으로 전원 철수를 하고 보자."
"컨테이너는 어찌하기로 했냐?"
"가져가라고 이미 전화 했다. 오후에 가져 가겠지."
고달수와 박철구는 제각기 자신의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양구택은 배철권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는 가서 하기로 하고 자네는 아무 말 말고 내 말대로 하게. 우선 자네가 내 차를 좀 몰아주게나. 한열아, 너는 나와 함께 네 아버지 차에 타고 가자. 내가 농장으로 가는 길도 가르쳐 줄 겸 너와 네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양구택은 한열이와 함께 좁은 조수석에 앉아 배철권이 운전석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박철구의 트럭이 먼저 출발했다. 고달수의 차가 뒤를 이었고 마지막으로 배철권이 그 뒤를 따랐다. 세 대의 트럭이 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나오다 보니 창고 앞에 여러 대의 승합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맨 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가 백발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서 회장인 것 같았다. 고달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들고 양구택에게 신호를 보냈다.
"야, 구택아, 너도 보고 있냐? 저 앞에서 손짓하는 백 대가리가 서 회장이란 놈이다. 저놈이 부자라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저 땅과 창고가 모두 저 자 것인가 봐."
"알려줘서 고맙다만 이거야말로 과잉 친절이고 전파 낭비다. 백 대가리가 부자 든 말 든 내가 서 회장이란 자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것까지 알려주냐?"
"멍청하기는.... 지피지기를 모르면 백전 백 패란 말도 모르냐? 앞으로 우리가 저런 놈을 상대로 판을 벌여야 한밑천 쥘 수 있단 말이야. 네놈도 언젠가는 저 서 회장이랑 맞짱을 떠야 할 때가 닥칠 거란 말이다."
"어? 그래? 그렇다면 벽에다 서 회장 사진을 구해다 붙여야겠군."
"야, 농담 아니다. 투견 판을 만만하게 보다가 깨진 놈이 한 둘인 줄 아냐? 노름 판에 룰이 있더냐?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해코지를 한단 말이다."
"그래서? 그 해코지를 나보고 막아달라는 거냐?"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같이 있는 네 권투 후배라는 그 사람을 구슬려 봐. 회장 아들과 다투었다니 이미 경비직은 날아간 것 아니겠냐? 바로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을 최고 대우를 해 주면서 쓰자고. 그 사람이 태산이 보디가드를 맡아주면 우리가 한 결 안심이 될 것 아니냐? 야, 듣냐?"
"듣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그만 끊어."
고달수의 전화가 아니더라도 농장에 도착하기 전에 배철권을 자신들의 일에 끌어들이려고 이미 마음을 먹고 있던 양구택이었다. 양구택은 지금 당장 배철권에게 자신의 의사를 타진해 보기로 했다. 양구택은 먼저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만 여념이 없는 배철권을 돌아보며 운을 땠다.
"자네, 이제부터 어찌하려는가?"
"예?"
배철권은 갑작스러운 양구택의 질문에 힐끗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아니, 경비직을 그만두었으니 앞으로 무얼 하려는가 묻는 걸세."
"글쎄요. 모처럼 적성에 맞는다 싶었는데 삼 개월로 끝이군요. 할 수 없지요. 공사판을 다시 찾는 수밖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삼 공사판 일을 어찌하겠나. 그럴 바엔 내 말대로 내 농장을 책임져 주게나. 태산이와 동방불패만 지키고 관리하면 되는 일일세."
"예? 개 두 마리 때문에 제가 필요하다구요? 그거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쉬운 일인데 무엇 하러 저를 쓰시려 하십니까? 아무래도 선배님이 절 동정하셔서 그러시는 것 같은 데 전 괜찮습니다. 제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다."
자신이 지금 동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배철권은 백미러 속에 비친 양구택을 간간이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남으로부터 동정을 받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다시 공사판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 없던 양구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동정심으로 내 일을 자네에게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네. 자네는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큰 결단을 내려 사업을 해 보려고 한다네. 언젠가 자네에게 말한 투견 말일세."
"태산이도 그래서 키우신 건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걸세. 저 앞에 가는 내 친구들이 그 방면엔 전문가지. 나와는 달리 수십 년을 투견만을 키워왔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동업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지. 그런데 친구들 말을 들으니 투견장이 나름 험한 곳이라 상대 개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우리도 태산이를 보호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 게 쉬운 일도 아닌 데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나?"
"글쎄요. 그것까지는 제가...."
"폐일언 하고 솔직하게 말 하겠네. 우리는 자네가 꼭 필요하네. 태산이도 자네와 한열이만 의지하고 따르지 않는가? 우리와 함께 일해 보세. 그래만 준다면 우리도 대우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일세. "
양구택의 간곡한 말에도 배철권은 앞만 보며 말이 없었다. 양구택의 옆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열은 아버지가 양구택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자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 그렇게 하세요. 제 생각에도 아저씨들과 함께 일하시는 게 창고를 지키시는 것 보다는 아버지가 하실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만 해도 양 씨 아저씨가 일을 하시기는 무리잖아요?"
"그렇지. 한열이 말 대로 이럴 때 나를 좀 도와 주게나. 그리고 한열이 강아지도 계속 농장에서 기르면 집에 혼자 두는 것 보다 나을 거네. 농장이 집이나 학교와도 멀지 않으니 한열이도 자주 올 수 있을 것이고... ."
"글쎄요. 좀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합니다만 선배님이 제게 해로운 일을 권하실 리도 없고 한열이의 생각도 그렇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대우는 바라지 않습니다."
"좋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한 식구일세. 함께 뭉쳐서 고난을 헤쳐나가 보도록 하세나.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테지."
투견 판의 흥행을 책임질 고달수와 박철구에 이어 태산이를 책임지고 관리할 배철권의 합류에 양구택은 만족했다. 비로소 태산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때문이다. 이제 역할을 분담할 진용이 짜여졌으니 하루 빨리 자신의 몸이 낫기만을 기다리면 될 터였다. 그때 옆자리의 한열이 양구택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네 농장이 어느 동네예요?"
"남동 구청에서 멀지 않은 외딴곳이다. 너희 학교에서도 자동차로 십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지."
"아, 그 동네라면 가본 적이 있어요. 비닐하우스가 많은 동네잖아요?"
"그래. 하지만 내 농장 주위엔 밭 이외엔 아무것도 없어. 가보면 알겠지만 개 농장을 하기엔 딱 알맞은 곳이란다."
"학교에선 가까운데 집에서는 좀 먼 거리에요."
"그래?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우리 농장으로 이사를 오는 게 어떻겠니? 아니, 이런 건 너의 아버지에게 물어야겠군. 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농장엔 작지만 집도 한 채 있다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집사람과도 의논을 해 봐야 할 것 같군요."
"그야 당장 서두를 건 없지만.... 가 봐서 자네가 결정하게나."
고달수는 가능한 한 배철권에게 편의를 봐 주고 싶었다. 앞으로 투견 일을 같이 할 것이라는 전제 이전에 그동안 배철권의 인간성을 좋게 보아온 때문이다. 그래서 집 문제는 배철권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양구택은 천막으로 가린 태산이를 싣고 신나게 앞서 달리는 고달수의 트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운전석의 배철권도 앞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있었다.
'오늘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견판 5. 추락의 길(2) 각성 (1) | 2024.03.01 |
---|---|
투견판 5. 추락의 길(1) 극과 극의 세상 (1) | 2024.03.01 |
투견판 4. 동업자들(5) 싸우지 않는 투견 (1) | 2024.02.29 |
투견판 4. 동업자들(4) 놓을 수 없는 불안 (1) | 2024.02.29 |
투견판 4. 동업자들(3) 찜찜한 관계 (1) | 2024.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