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됐냐?"
전화기 넘어에서 고달수가 대뜸 물어왔다. 그러자 양구택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준비할 게 뭐가 있어? 네놈이 와서 이 형님을 모셔가면 그만이지."
"아, 그 자식하고는. 임마, 길 떠나기 전에 밥도 먹고 화장실도 미리 갔다 왔는지 네놈을 걱정하는 것 아니냐?"
"네 놈이 이제야 철이 나는가 보다. 안 하던 내 걱정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게 널 걱정하는 거냐? 태산이를 돌볼 놈을 걱정하는 거지."
"아, 시끄러. 빨리 오기나 해. 너 지금 어디냐?"
"너의 집에 거의 다 와 간다. 끊어."
고달수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 양구택은 손에 든 전화기를 멍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이 자식들이 언제부터 제 맘대로 전화를 탁탁 끊냐?"
양구택은 놈들의 행동이 동업을 하기로 한 후에 생긴 것이라 판단했다. 양구택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수십 년 동안 무언으로 맺어온 서열이 동업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박철구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달수는 거의 다 와 가는데 넌 왜 그렇게 꾸물대냐?"
"넌 달수보다 우리 집이 더 멀리 있다는 생각은 안 하냐?"
"생각을 하니까 말하는 거야. 칼이 남보다 짧으면 그만큼 앞으로 나가면 된다는 스파르타 교육을 넌 학교에서 안 배웠냐?"
"학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야 임마, 네놈 때문에 배울 것도 다 못 배우고 쫓겨났는데 어디서 무얼 배워? 그리고 난 칼이 짧은 게 아니라 길어서 늦었다잖아?"
"그 게 그거지. 멀면 좀 더 일찍 출발하면 된다는 말도 못 알아먹냐?"
"그렇게 유식한 놈이 성난 도사 무서운 건 왜 몰랐을까? 개장수 삼십 년에 너처럼 멍청한 개장수는 처음 봤다."
"참, 그러고 보니 그 도사들은 네 개들이었지. 투견 훈련이 제대로 된 도사라면 개끼리 싸워야지 사람에게 덤비는 개를 훈련 시킨 멍청한 놈이 어떤 놈이냐?"
"그야.... 그 도사가 워낙 똑똑했던 거지."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렇잖아? 그 똑똑한 도사들은 인간과 개를 구별할 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 도사 앞에 사람 같지 않은 놈이 얼쩡대는데 가만있겠냐?"
"뭐야? 너 이 자식 오기만 해봐라."
"어쭈, 친구를 못살게 하더니 이젠 동업자를 치시겠다?"
"아, 이 빌어먹을 놈....."
"이제부터는 내가 빌어먹으면 너도 곤란해질걸?"
"잔말 말고 어서 오기나 해."
"그러지 않아도 나도 다 와 간다. 끊는다."
"엇, 이 자식이 또...."
휴대폰을 내려놓은 양구택이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육 층 아파트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은 일요일이어서인지 차들이 많았다. 그중에 개장이 실린 낯익은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보나 마나 고달수의 트럭일 터였다. 양구택은 이제 곧 고달수가 차 문을 열고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집 안의 초인종이 먼저 울었다. 현관 문을 열어보니 역시 고달수가 서 있었다.
"내가 들어갈 것 없어. 네가 그냥 나와. 차 대기했으니까."
고달수가 턱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가만, 일단 들어와. 철구가 아직 안 왔어."
"통화 했어. 그놈도 곧 도착한데. 그러니 어서 나와."
고달수의 채근에 양구택이 문을 나서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오자 마침 이쪽으로 오는 박철구의 차가 보였다.
"내가 앞장을 설 테니까 구택이 넌 날 따라와라."
박철구는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듯 창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슬금슬금 차를 후진시키더니 차를 돌려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 저 자식 저 혼자 막 가네. 야, 우리도 어서 가자."
양구택은 박철구의 트럭을 가리키며 불편한 팔 다리로 트럭에 다가가 조수석 문고리를 잡았다. 고달수도 재빨리 운전석에 뛰어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철구 차에 실린 개장이 보기에도 너무 작은 것 같잖냐? 저렇게 작은 개장에 태산이가 들어갈 것 같지 않은데?"
앞서 달리는 박철구의 차 적재함에 실린 개장을 본 양구택이 한 말이다.
"저게 그래도 자기 집에서 제일 큰 개장이라더라. 그래서 내가 그냥 갖고 오라고 했다. 안 되면 새끼 낳은 암캐나 싣지 뭐. 태산이는 웬만하면 내 개장엔 들어갈 거야. 내 껀 대형견을 넣는 개장 두 개를 붙여서 하나로 만들었으니까."
"그래? 그럼 됐어. 그 대신 올 땐 천막을 뒤집어 씌우는 거 잊지 마라."
"물론이지. 우리들 사업 비밀을 마구 공개해서야 되겠냐?"
"참, 어저께 철구 저놈도 돈을 더 보냈더라. 네가 돈을 더 보낸 건 나도 이해한다만 철구가 요즘 그래도 되는 형편이냐?"
"그럴 일이 있어. 철구가 모처럼 큰맘 먹고 보낸거니까 그냥 모른 척 받아 둬."
"받는 건 좋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 놈의 돈을 쓰면 내 맘이 편하겠냐?"
"괜찮다니까 그러네. 요즘 저놈도 투견 판에서 재미를 쏠쏠하게 본다고 하더라."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말이다. 너도 일단 투견 판에 발을 담궈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녹록치가 않은 세상이란 건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투견장이란 게 사실 뭇 잡놈들이 설쳐대는 도박장이잖아? 그러니 갖은 술수와 사기극이 벌어지고 심지어 폭력까지 일상이야. 투견 판이란 본래부터 별의별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그런 곳이거든."
고달수는 문득 박철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생각나서 양구택에게 미리 투견 판의 생리를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솔직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박철구가 돈에 여유가 있을 수 있는 이유를 함께 해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구택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고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구택이 말이 없자 고달수는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사전에 이 말을 꺼내는 건 네 아들 사건 이후에 이제껏 태산이 하나 믿고 견뎌 온 네가 투견판에 발을 디디자 말자 실망을 할까 봐서란 말이야. 돈을 위해서는 상대 개든 내 개든 쥐약이라도 먹여서 승부를 조작하는 곳이 투견 판이니까."
"뭐라고? 쥐, 쥐약을? 그럼 승부를 조작하려고 태산이에게 쥐약을 먹이잔 말이냐? 야, 나 안 해. 안 한다고. 그럴 바엔 투견을 그만두련다."
고달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깜짝 놀란 양구택은 황망한 표정으로 성한 손을 내 저었다. 고달수는 아차 했다. 잘못하다간 동업 자체가 깨질 분위기가 아닌가? 고달수는 하려고 마음 먹었던 얘기의 방향을 급히 틀었다.
"미쳤냐? 우리가 자살 골을 먹게? 그런게 아니라, 누가 꼭 태산이를 노린다기보다는 도박을 하는 인간이란 대게 인간 이하의 인간이기 마련이잖아? 그러니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 이 말이지. 다시 말해 나뿐 놈들로부터 태산이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정당한 대결에서 태산이가 죽거나 다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런 비열한 승부는 나는 인정 못한다. 한때는 스포츠맨이었다는 자부심이 남은 내가 돈 때문에 내 자식 같은 태산이를 또 죽일 수는 없단 말이다."
"야, 누가 뭐래냐? 너만 그러냐? 철구나 나 역시 남은 인생은 태산이에게 올인한 꼴 아니냐?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에서 이젠 인생의 동업자가 되었으니 태산이도 지키고 돈도 왕창 벌어보자고 한 얘기 아니냐?"
"나도 개 장수로 세월을 보냈으니 투견 판에 대해서는 영 백지는 아니다. 게다가 투견 훈련 방법을 알려고 투견장도 수없이 찾아다녀 봤단 말이다. 그러니 투견 판에서 하는 짓이 영 낯선 것은 아니야. 하지만 태산이는 승부 조작을 하지 않아도 투견 판을 모조리 휩쓸 거야. 하지만 네 말대로 태산이를 철저히 보살펴야 할 필요는 있겠다."
"글쎄 말이다. 그럴만한 사람이 어디 없을까?"
"있기야 한 사람 있지. 하지만 자신은 경비직에 만족한다니 말을 붙이지 못하겠더라."
"뭐? 지난번 그 창고의 경비 말이냐? 지금도 그 사람이 태산이를 돌봐 준다며?"
"맞아, 내 권투 후배인데 그 사람이 태산이를 맡아준다면 정말로 안심일 텐데.... 태산이도 이젠 그 사람을 나 이상으로 따르니까 말이야. 게다가 태산이는 그 후배의 아들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잖아? 너도 철구네 죽은 도사들을 봤지?"
"아, 봤지 그럼. 개 장수인 내가 다 끔찍하고 무섭더라. 가만, 그 경비를 우리가 정식으로 고용하면 어때?"
"아까 뭘 들었냐? 자긴 경비직에 만족한다잖아? 수입도 안정적이고 일도 힘들지 않다고 말이야."
"우리 일은 불안정하고 허리가 부러질 만큼 힘든 일만 시킨다더냐? 그리고 경비 월급의 배를 주면 될 것 아니냐? 솔직히 말해 경비 월급 얼마나 되냐? 까짓것 우린 그 두 배, 아니 세 배쯤 준다고 하란 말이다. 투견판에서 그런 돈쯤은 경로당 고스톱 판에 십 원짜리 동전에 불과해. 그래도 싫다면 고정적인 월급 외에 배당금도 일부분 챙겨주면 될 것 아니냐?"
박철구와 자신이 요즘 투견판에서 돈을 버는 비밀을 밝히려든 고달수는 태산이 얘기가 나온 김에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배철권을 태산이의 보디가드 겸 사육사로 채용하자고 양구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론 배철권을 태산이의 관리인으로 꼭 쓰고 싶은 사람은 양구택 본인이란 걸 알고 나서였다.
"그동안 내가 그 후배를 겪어 보니 심성이 굳고 성실하기는 한데 운동만 해서인지 사회생활이 서툴러서 좀 고지식하더라. 게다가 선수 때 부상의 후유증으로 힘든 일도 못하고 말이다."
"아, 그래도 그렇지. 왕년에 한국 참피온이었단 사람이 태산이 하나 관리 못 하겠냐?"
"지금도 하는 관리를 왜 못 하겠냐만 그 후배가 마다하는데야 난들 도리 있냐?"
"아, 답답해, 방금 얘기했잖아. 월급과 성과급을 듬뿍 챙겨준다고 하란 말이다. 아니, 그만둬, 그 사람에게 내가 말해볼 테니까. 일단 가서 만나 보자고."
고달수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가속 페달을 밟으며 박철구의 꽁무니를 따라 정신없이 달려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고달수의 차가 배철권이 근무하는 창고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는 출발 후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저 창고에 들렸다 갈까, 곧바로 태산이 컨테이너로 갈까?"
"철구 쟤는 벌써 컨테이너로 갔구먼. 후배는 이따가 만나 보기로 하고 우선 가자."
고달수는 박철구가 간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런데 컨테이너에 미쳐 닿기도 전에 한열이가 태산이를 데리고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양구택은 오랜만에 보는 태산이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차가 가까이 다가가자 태산이가 먼저 벌떡 일어서더니 창문에 앞발을 척 올려놓았다.
"아이쿠, 무서워, 사파리에서 사자를 보는 것 같구나."
운전석에 있던 고달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개 장수인 네가 그렇게 놀래니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겠냐?"
양구택은 불편한 오른손 대신 왼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태산이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태산이는 양구택의 손길을 거부했다. 평소라면 양구택에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마구 얼굴이며 손을 핥았을 태산이었다. 그러나 태산이는 양구택의 손이 닿자 얼른 창문에서 발을 내리고 뒤로 물러나 한열이 곁으로 가버렸다.
"어? 저 녀석 봐라. 그새 주인인 날 잊었나?"
어이가 없어진 양구택이 불편한 몸을 차에서 내려서 태산이에게 다가갔다. 태산이는 양구택이 다가오자 슬그머니 한열이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한열이가 먼저 양구택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저씨, 일찍 오셨네요."
"그래, 한열이 네가 더 빨리 왔구나."
"전 어제 오후에 학교에서 곧바로 여기로 온걸요."
"참, 그러고 보니 그저께 네게 전화했을 때 토요일 오후에 간다는 소리를 들어놓고도 엉뚱한 소리를 했구나."
"하하, 아저씨만 그러신 게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도 같으세요."
"그런데 태산이 저 녀석이 갑자기 나를 슬슬 피하는구나. 그새 무슨 일이 있었니?"
"무슨 일이라니요? 아무 일 없었는데요?"
"그래?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말과는 달리 양구택은 태산이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사들을 철망 안으로 몰아넣어 강제로 싸움을 시킬 때 자신이 태산이의 구원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태산이를 싸우게 할 마지막 수단으로 도사에게 물려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까지 했었다.
양구택의 마지막 희망인 태산이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끝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는 개로 어떻게 투견 시합에 나간단 말인가? 그래서 양구택은 도사에게 물려 비명을 지르는 태산이를 포기하고 외면 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태산이도 주인으로서의 양구택을 포기한 것일 터였다.
그래서 양구택을 그저 아는 사람 정도로 대할 뿐 주인으로서는 단호히 거부하며 외면하는 것이리라. 양구택은 태산이의 행동이 못내 섭섭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 역시 너무 가혹했었다는 것을 느껴서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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