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냐?"
조중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좋은 일 있냐?"
"꼭 좋은 일이 있어야 전화하냐? 나와라."
"어딘데?"
"창 밖을 봐. 금동이와 함께다."
신동우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동이의 차가 보였다.
"잠깐 기다려."
"그래."
신동우는 대충 옷을 갈아 입고 아래로 내려왔다. 창문을 내린 운전석에서 도금동이 말없이 타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시간에 날 불러내냐?"
뒷좌석에 등을 붙인 신동우가 조수석의 조중구를 향해 물었다.
"금동이가 울적하댄다. 그래서 술이나 한 잔 하려는데 널 빼고 술이 넘어 가겠냐?"
"우울해? 왜 우울 해? 금동이 너, 무슨 일 있냐?"
신동우가 앞에 앉은 도금동의 어깨를 툭 치며 궁금한 듯 물었다.
"우울은 무슨.... 중구 저 자식이 그냥 하는 소리지."
"난 또, 내 우울증이 그새 네게 전염되었나 했지."
"미친 놈."
도금동은 차를 출발 시켰다.
"야, 너 또 미치콘지 하는 그 집으로 가려는 거냐?"
신동우가 다시 룸미러를 쳐다보며 도금동의 표정을 살폈다.
"왜? 더 좋은데 있냐?"
"좋은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거긴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야."
"그럼 어디로 가?"
도금동이 룸미러를 흘깃 바라보며 신동우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중구가 먼저 나섰다.
"야, 그럼 논현동으로 가자. 지난번 거기, 이스프린가 하는 술집 있잖아? 거기 아가씨들이 죽이더라."
"시끄러. 아가씨 타령할 기분 아냐."
"그럼, 아가씨 없는 술집으로 가면 되겠네."
"그게 아니라, 내가 지금 기분이 꿀꿀해서 술이 안 땡겨서 그래. 그러니 술은 담에 마시기로 하고 오늘은 다른 걸로 기분을 풀어보는 게 어때?"
"다른 거라니? 뭐? 뽕이라도 맞자는 거냐?"
기분이 좋지않다는 신동우의 눈치를 보며 조중구는 자신의 팔에 주사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히죽 웃었다.
"이러다 날 새겠다. 야, 빨랑 정해."
빨간불에 차를 세운 도금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가만, 잠깐만 기다려. 잠시면 되니까."
무슨 생각이 난 것처럼 신동우는 전화기를 꺼내들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 금세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사장님. 저 신동웁니다. 아니요. 그냥 사장님 말씀대로 구경만 하려구요. 네? 의정부요? 네. 네. 의정부 역이요? 그러지요. 그럼 이따 뵙죠."
"어? 술도 안 마신다면서 의정부는 또 뭐냐?"
운전석에 앉은 도금동이 신동우의 의중을 알려는 듯 뒷좌석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러자 신동우는 자신의 시계를 보더니 도금동을 향해 명령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차 돌려. 의정부로 가자. 너희들에게 좋은 걸 보여 줄 테니까. 지금이 십분 전 아홉 시니까 충분할 거다. 여기서 돌려서 중랑천 건너 오른쪽 길만 따라가라고. 그러면 의정부까지 사오십 분이면 충분할 테니까. 얌마, 내 말 안 들리냐?"
"아, 그 자식, 넌 차를 아무 데서나 막 돌리냐? 지금 돌릴 델 찾고 있잖아."
도금동은 신동우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도 묻지 않았고 이의를 달지도 않았다. 최근 들어 더욱 우울하고 말이 없던 동우였다.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두고 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자, 이제 네가 가자는 데를 가고 있으니까 무얼 보여주겠다는 건지 말할 수 있지?"
모두가 들으라는 듯 조중구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도금동도 굳이 궁금증을 감추지 않았다.
"왜? 기대가 되냐? 하지만 크게 기대할 건 없어. 단순한 힘의 게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니까."
"힘의 게임? 어떤 건 힘 없이 이길 수 있냐?"
조중구가 턱을 치켜들며 옆눈으로 신동우를 흘겨 보았다.
"가장 원시적인 힘이 작용하는 게임을 말하는 거지."
"빌어먹을, 힘이면 힘이지 가장 원시적인 힘은 또 뭐야? 원시인이 누굴 때려죽이냐? 아, 알았다. 권투 시합을 보여 주겠다는 거지?"
"물어뜯는 것을 첨가하면 정답이겠는데.…"
신동우의 말에 조중구는 머리를 갸웃하더니 금세 손뼉을 딱 쳤다.
"진짜 알았다. 투견이로군. 야, 맞지?"
"빙고."
운전석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금동은 신동우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의정부로 가자는 이유가 투견이라니? 경마에 빠졌다던 신동우가 이제는 투견으로 종목을 바꾸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둘 다?
"야, 동우, 너 경마로 잃는 돈으론 성이 안 차서 이젠 투견까지냐?"
도금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내뱉었다.
"내 그 소리 나올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경마로 돈 좀 잃었지. 하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좀 잃어? 야, 네게 그 좀이란 게 내겐 엄청난 액수 아니겠냐? 내게 그 돈이 있었으면 내 동생들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도 잘하면 나까지 장가를 갔겠다."
조중구가 단번에 신동우의 말을 받았다. 어쩌면 조중구의 말은 뼈가 있는 듯했으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동우가 좀이라고 표현한 돈은 강남의 중형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집안 형편상 자신의 결혼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만은 제때에 버젓하게 결혼을 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고 그럴 만큼 돈이 모이지 않았다. 월급쟁이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었다.
"나도 그 점은 인정한다. 허나, 그 돈을 잃는 동안은 내가 살아 있다는 스릴을 느꼈단 말이다. 내겐 그런 게 필요했어. 만약 그런 스릴과 자극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 죽던가 머리를 깎았을 테니까."
신동우의 말에 조중구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도금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온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조중구가 먼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신동우의 코앞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스릴과 자극을 느끼는 값 치고는 너무 비싸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거지. 공짜로 스릴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중구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어 그러냐?"
"그렇잖아. 스릴을 느끼고 싶으면 한강 다리 난간에 올라가면 될 것 아니냐? 아니지, 스릴이라면 역시 룰렛게임이 낫겠군. 관자놀이가 서늘할 테니까. 히힛."
"뭐야?"
"내 말이 틀렸냐?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만한 스릴을 어떻게 얻냐?"
"미친 놈. 뻑 하면 돈타령이야. 야, 넌 내 처지가 되어 보질 않아서 그래. 난 말이야 목적을 위해 죽어라 공부만 할 수 있는 너를 부러워할 때도 있었어. 사는데 돈이 전부인 줄 아냐?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돈이 다가 아니라고? 그럼 결국, 경마로 잃은 돈은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해서였다는 말 아니냐? 이거, 그러고 보니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 벨리의 말이 맞는 말이군."
"어째 너는 심사가 꼬인 게 옛날과 변함이 없냐? 거기서 목적과 수단이 왜 나와? 난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골치가 아팠을 뿐이고 그래서 네 말대로 잠시 경마에 빠졌던 것이 다야. 목적이고 수단이고 그딴 걸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엇, 너 왜 이러냐? 내가 하는 말은 그냥 농담이란 걸 모를 네가 아니잖아? 너 경마에 너무 몰두해서 혹시..... 신경과민이냐?"
"이 자식을.... 그냥.…"
신동우는 조중구의 코앞에 주먹을 불쑥 내 밀었다.
"돈 많이 벌어 놨으면 나 좀 쳐 다오. 히힛."
"아이고 그놈의 돈타령...."
도금동은 신동우와 조중구의 티격태격을 못 들은 채 했다. 그러다 상계 교차로가 가까워지자 급히 뒤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직진하냐?"
"어... 아, 아니. 여기서 좌회전을 해. 그리고,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 곧장 가면 되니까. 야, 좌회전 신호 떨어졌다. 가. "
"나도 봤다."
좌회전과 동시에 다리를 건넌 차는 일 분도 못되어 다시 우회전을 했다.
"다 좋은데... 이 시간에 무슨 투견이냐? 한밤중에 하는 투견 시합도 있냐구?"
차들이 많지 않은 직진 도로여서 다소 느긋해진 도금동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 나도 동우 네게 그걸 물어보려던 참이었지. 이 시간에 투견 시합을 하는 곳이 정말로 있냐?"
조중구도 도금동의 말에 동조하며 새삼 신동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까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강남에 빌딩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이야. 일 년 전쯤 경마장에서 알게 된 사람인데 이 사람 때문에 나도 투견이란 걸 알게 됐어. 헌데 몇 번 보니까 경마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 해서.... 데려가는 거니까 아뭇소리 말고 그냥 구경이나 하란 말이야. 그리고 구경은 구경으로써 끝내. 구경을 한 다음 내게 사족을 붙일 생각들은 말고.... 알았냐?"
"얘가 뜬금없이 투견 예찬론을 펼쳐서 우릴 세뇌 시키려 드네? 야, 나는 단순히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도적질하듯 하는 시합도 있냐고 물었을 뿐이야. 헌데.... 네 말대로 개싸움이 그렇게 재미있는 거냐?"
"재미? 중구 너, 그저께 스크린 경마장에서 오십만 원 날렸었지? 그때 네가 산 마권의 말이 우승할 확률을 계산하고 샀냐?"
신동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중구가 화들짝 놀라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아까 도금동에게 한 말이 거짓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말 해봐. 넌 항상 확률이 어쩌고 하는 게 십팔 번이잖아? 확률을 그렇게 잘 맞춘 놈도 돈을 잃냐?"
신동우는 계속 조중구를 다그쳤다. 조중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야, 내가 언제 확률로 승부했다고 그러냐? 어차피 경마도 투견도 다 도박인데 확률이란 말을 앞세워 감이 오는 데로 딱 찍는다는 소리지."
"이건 어디서... 순, 과학을 앞세운 사기꾼 같은 소리를 하냐? 야, 경마가 확률이냐 재수냐 그것만 말해."
"솔직히 말하면 재수겠지만 확률로 이길 확률도 무시 못할걸?"
"그건 또 어디서 나온 궤변이냐?"
"내게 확률을 계산할 시간만 준다면 확실하게 이길 말을 고를 수 있을 거란 얘기야.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어야지? 지금이라도 회사 때려치고 그 계산만 한다면 문제없이 딸 수 있다니까."
조중구의 변명 아닌 변명에 결국 손을 든 신동우는 룸미러 속에서 도금동과 눈빛을 마주쳤다. 도금동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내가 네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널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동안 경마를 쭉 해 봤더니 돈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구조더란 말이야. 잘 뛰는 말은 배당이 낮아서 이겨도 큰돈을 만지지는 못하잖아? 그렇다고 배당률이 높은 형편없는 말에 베팅을 하자니 승률이 로또보다 나을게 없고...."
"누구나 아는 말은 빼고 본론만 얘기해. 그래서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조금이나마 체면을 만회하려는 조중구는 도금동을 의식하며 신동우를 압박했다.
"좋아, 네 말대로 본론만 말하지. 투견은 말이야. 이거 아니면 저거야. 경마처럼 여러 마리가 뛰어서 일등을 겨루는 게 아니라 권투처럼 일대일의 경기란 말이지.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승자란 얘기지. 그러니 확률도 확실한 반반 아니냐? 그리고 투견에서 승률을 계산 할 수도 없단 말이야. 투견의 수명이 워낙 짧아서 승률을 따질 때쯤엔 더 센 놈이 나오기 마련이거든. 그럼 그놈은 이미 보신탕이 되고 마니까 말이야."
"음, 그러니까 네 말은 투견은 가위 바위 보 보다 더 간단한 게임이다 이 말 아니냐?"
"그 간단한 게임이 사람 피를 끓게 한다면 믿겠냐?"
"뭐야? 투견을 권투와 착각하냐?"
"권투는 투견에 대면 레슬링 쇼보다 못하지. 투견은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니까. 투견은 권투와 달리 지는 순간 죽음이야. 비록 개지만 개도 그걸 아는지 그야말로 결사적이더라고..... 난 그걸 보고 크게 느낀 점이 있어. 나도 더 이상 물러서면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 거지.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 자기방어는 물론 공격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단 말이야."
신동우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도금동과 조중구는 비로써 신동우의 심적 변화를 눈치챘다. 집에서 십여 년 이상 소외받던 그가 후계자 싸움에서도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 비친 것이다. 신동우의 그런 변화를 도금동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신동우를 본받아 회사 일에 좀 더 명확한 액션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 좋지. 네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니 쌍수로 환영한다. 암, 환영하고 말고...."
조중구는 조중구대로 신동우가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던 터라 희색이 도는 얼굴로 신동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동우가 후계자가 된다면 조중구로서는 또 다른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 기간이 길더니 결국 득도를 하긴 했구나. 나도 환영이다. 꼭 그렇게 해."
뒤를 돌아보는 도금동의 얼굴도 활짝 웃고 있었다.
"야, 헌데 네가 아직 대답 안한 게 있어. 이 시간에 투견 시합이 진짜 있긴 있는 거냐?"
도금동은 여태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열 시에 한댔으니 조금 후면 알 것 아니냐? 의정부 역전에 우릴 안내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거, 영화에서 보니 투견장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마약쟁이나 조폭 같은 부류던데?"
"헛, 그 자식 영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경마장에는 화이트칼라만 오디?"
"그건 아니지만.... 참, 투견 시합이 불법은 아니겠지?"
"왜? 불법이면 잡혀갈까 겁나냐?"
"물어도 못 보냐?"
"야, 그만들 해."
신동우와 조중구의 말 같지 않은 논쟁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도금동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조중구를 대신해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중구 말대로 투견이 불법은 아니냐?"
"앞으로는 문제가 생길 소지는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불법까지는 아니지. 다만 잔혹해 보여서 들어내놓고 하기엔 좀 그렇다고 봐야지. 미국의 경우, 일부 주는 투견 시합을 중대 범죄로 본다고 하드라만.... 우리나라도 아마 그렇게 될 날이 올 거야."
"허긴. 지난번 과천 가는 길에 보니 대낮에 투견 대회를 크게 하고 있더라. 길가에 투견 벽보도 붙어 있고 말이야."
"전국 대회를 알리는 광고도 있잖아?"
"오늘 우리가 볼 투견 시합도 규모가 클까?"
"가봐야 알겠지만 그렇지 않을걸?"
세 사람이 주고받는 사이에 의정부역이 가까웠다. 도금동이 주차할 곳을 찾는 사이 차에서 내린 신동우는 기다린다던 사람이 누구인지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신 사장님이세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신동우가 급히 돌아보니 서른이 채 안돼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렇습니다."
"아, 그럼 제 차를 따라오시죠. 곽 사장님이 기다리시니까요."
청년은 신동우의 말도 채 듣지 않고 자신의 차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야, 금동아. 주차할 필요 없어. 저 차를 따라 오란다."
"어? 저 흰색 아반떼?"
"음."
흰색의 아반떼는 시내를 가로질러 포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의정부 시내를 벗어나 십여 분을 달리던 앞 차는 주 도로를 벗어나 작은 다리가 놓인 개울을 건너 곧이어 좌측을 꺾었다. 도금동 역시 앞차를 따라 좌측으로 꺾었다. 그러자 라이트가 비치는 앞으로 십여 대의 차들과 함께 커다란 콘센트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투견 시합은 그 안에서 하는 듯했다. 앞차의 청년이 먼저 막사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거, 옛날 미군들이 쓰던 막사 아니냐?"
차에서 내린 조중구가 신기한 듯 반원형 막사를 가리켰다.
"그렇군. 거 오랜만에 보는군."
카투사 출신의 신동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 밤공기가 시원해서 좋구나. 시내를 벗어나자말자 이런 곳이 있다니...."
도금동이 두 사람 곁을 오며 심호흡을 했다. 그때 막사의 문이 열리며 불빛과 함께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오, 신군 어서 오시게. 헌데, 이분들은?"
"예, 사장님. 이쪽은 제 친구들입니다. 너희들 인사드려. 아까 말한 곽 사장님이시다."
"도금동입니다.'
"조중구라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자 곽 사장도 흔쾌히 인사를 받았다.
"아, 그러시요들. 나. 곽재만이라 하오. 여기는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이라 회원들이 낯선 사람을 꺼릴지 모르겠소. 허나, 신군의 친구라니 회원들에겐 내가 연대 보증을 서지요. 자, 들어들 갑시다."
세 사람은 곽 사장을 따라 콘센트 막사로 들어섰다. 불빛이 밝은 막사 안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훨씬 넓었다. 전등 아래에는 철망으로 된 파이팅 링이 둥글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철망을 중심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간이 의자에 앉아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자 여러분. 새로 오신 분들을 소개하지요. 여기는 신입회원의 친구들입니다. 두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걱정들 하지 않으셔도 좋으실 줄 압니다. 저와 이 젊은이가 공동 보증을 설 것이니까요."
곽재만의 일방적 소갯말이 들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쏠렸다.
"자, 각자 자기소개를 하시오들."
곽재만이 도금동과 조중구에게 인사를 권했다. 도금동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도금동이라 합니다."
"조중굽니다. 잘 부탁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였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아직 회원이 아니어서인지 환영의 말도 없고 거부한다는 말도 없었다. 다만 이쪽으로 향했던 시선들을 자연스럽게 거두어 다시 하던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 도금동과 조중구는 서로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두 분은 아직 정식 회원이 아니어서 그러니 괘념치 마시오. 저기 의자가 있으니 갖고 와 앉으시오. 게임이 곧 시작될 거니까."
세 친구는 구석에 놓인 의자를 갖고 와 나란히 앉았다.
"어이, 황 총무, 시간이 된 것 같으니 시작하지?"
철망 저쪽에서 얘기를 나누던 어떤 사람이 낮게 말했다. 그 사람은 주름진 얼굴에 백발이어서 얼핏 보아도 일흔은 훨씬 넘어 보였다. 도금동은 그제야 둘러앉은 사람들의 면면을 새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십여 명의 사람들의 연령대는 제각각이었다. 삼사십 대와 오륙십 대가 있는가 하면 방금의 백발노인 같은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예, 회장님. 그럼 시작하죠."
수첩에 무엇을 적고 있던 황 총무란 사람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철망 앞으로 다가와 여러 사람들에게 오프닝 멘트를 하였다.
"에, 오늘도 두 경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첫판은 핏불대 핏불의 대결이 되겠습니다. 두 마리 다 멧돼지 사냥용으로 들어온 것들인데 사냥도 해보지 않았고 링 안에서의 싸움도 처음입니다."
"명색이 핏불인데 설마 싸움을 한 번도 안 해 봤을라고?"
백발의 회장 늙은이가 좌중을 둘러보며 한 말이었다.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황 총무의 말대로 개들의 몸이 매끈해서 아무런 상처가 없어 보였다.
"두 번째 경기는 도사견 대 진돗개 세 마리의 대결입니다. 도사는 이 년 생이고 진도는 삼 년 생 형제 개들입니다. 도사는 세 번 이상의 싸움 경력이 있고 진돗개 형제 역시 몇 번의 파이팅 경력이 있습니다."
"핏불을 직접 봐야 베팅을 할 것 아니요?"
사십 대의 뚱뚱한 사내가 불만 섞인 소리를 했다.
"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핏불은 두 마리 다 파이팅도 처음이고 체형도 비슷합니다. 그러니 베팅을 하신데도 예측 불허지요. 그래서 지난번처럼 홀수와 짝수로 편을 갈라 베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배당 역시 전과같이 견주 몫을 뺀 나머지를 분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황 총무의 말에 더 이상 꼬리를 잡으려 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류의 설명은 수십 번도 넘게 들어 본 것이다.
"파이팅이 처음이라니 재미가 있겠는가?"
회장 늙은이가 다시 황 총무의 말 꼬리를 잡고 이의를 달았다.
"예, 바로 그래서 기획한 겁니다. 훈련이 없어도 핏불은 핏불 값을 할 테니까 말입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기대를 하지. 됐네. 계속하게."
회장이 황 총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시 황 총무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우선 시합 전에 백씩 베팅들 하시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베팅 기회를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물론 중간 베팅 액은 무제한 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견주는 들어오세요."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견주가 자신의 검은색의 핏불을 데리고 들어왔다. 개는 밝은 불빛과 낯선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이어서 다른 쪽 문으로 또 한 마리의 핏불과 견주가 들어와 철망 옆에 섰다. 쵸코렛 색에 가까운 갈색의 개였다.
"홀수 번호의 회원분은 검은색에, 짝수의 회원님은 갈색 개에 베팅한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가지고 계신 용지에 사인을 하셔서 여기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황 총무는 플라스틱 통을 높이 들어 보였다. 사람들은 수첩에 무엇을 적은 후 한 장을 찢어 그 통에 넣고 있었다.
"야, 동우야, 저거.... 뭐 하는 거냐? 통 모르겠는데?"
분위기 파악에 여념이 없든 조중구가 기어이 신동우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백만 원을 베팅한다는 사인이야. 여긴 철저히 신용제거든."
"너도 하냐?"
"아니. 오늘까지 구경만 하기로 했다니까."
"나는 하면 안 되냐?"
"안될 건 없지만... 왜? 또 승부욕이 발동하냐?"
"승부욕이라기 보담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순 없잖아?"
"그럼, 한번 해 봐."
"좋다. 내게 백만 원만 빌려 줘."
"그러지. 여기 내가 하는 걸로 하고 사인만 하면 되니까."
"홀수는 뭐고 짝수는 또 뭐냐?"
"회원 고유 번호를 말하는 거야, 난 끝자리가 홀수다."
기어이 판에 끼어야 직성이 풀릴 조중구를 위해 신동우는 자신의 수첩에 사인을 한 후 통에 넣었다. 신동우가 넣은 것을 마지막으로 황 총무는 통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견주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했다. 총무 겸 심판이었던 것이다.
"선수 입장."
철망의 양쪽에서 동시에 문이 열리고 개의 목에 수건을 둘러 짧게 잡은 견주가 개들과 함께 들어섰다. 그러자 훈련이라곤 받은 적 없다는 개들이 상대 개를 향해 맹렬히 다가가려 했다. 견주들은 개 목에 두른 수건을 양손으로 치켜들어 앞으로 돌진하려는 개들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몸통이 번쩍 들린 개들은 앞발로 허공을 마구 긁어댔다.
"준비 됐습니까? 그럼... 시이작."
총무 겸 심판의 일성에 맞춰 일제히 수건의 한 쪽을 당기자 개들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트럭처럼 단숨에 튀어나가 충돌했다. 두 마리의 개들은 처음부터 현란하게 빠른 동작으로 입이 닿는 대로 공격을 해 대고 있었다. 약한 곳을 골라 무는 노련한 개들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술 취한 사람이 상대는 보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흡사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개들의 그런 면에 신선감을 느꼈는지 눈들을 빛내며 보고 있었다. 총무의 말대로 애초부터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기였다.
오 분쯤 지났을 때였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하던 개들 가운데 운이 좋아서인지 갈색 핏불이 검은 핏불의 귀를 깊이 물었다. 짧은 삼각형으로 수술을 한 검은 개의 귀가 갈색개의 이빨에 제대로 콱 물린 것이다. 한 번 제대로 물면 절대 놓지 않는 것이 핏불의 특성이다.
"자. 물었습니다. 바로 찬스로 들어가겠습니다. 베팅이 끝나고 이 상태로 8분을 경과할 시에는 갈색 핏불이 이긴 것으로 하겠습니다. 베팅들 하세요. 흑색 핏불은 A를 갈색은 B를 써 주세요. 자, 빨리 베팅들 하세요."
갈색개에게 귀를 물린 검은 개는 자신의 이빨이 상대 개에게 닿지 않자 꼼짝을 못하고 서 있었다. 물고 있는 갈색개의 입에서는 침이 길게 늘어지고 물린 개는 입을 반쯤 벌리고 헉헉대며 머리까지 기울어진 자세였다. 십 분은커녕 십 년이 지나도 갈색 개는 물고 있는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핏불의 근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철망 밖의 검은 개의 견주는 애가 타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규칙상,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개를 응원하는 다른 투견장과 달리 손짓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 또 한번 베팅이라니? 지금 이 상태에서 또 베팅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조중구는 자신이 걸었던 검은 개가 지고 있는 마당에 다시 베팅을 권하는 총무란 자의 말에 의아했다.
"그렇지. 이젠 베팅에 액수 제한이 없어. 베팅 한 만큼 반대편에 베팅 한 사람의 돈을 갈라 먹는 거지. 혼자 맞히면 더 좋고.…"
"그럼, 빌려주는 김에 이백만 더 써라."
"그래? 어느 개로?"
"그야 A지. 처음 베팅 한 검은 놈 말이야."
"지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아. 그깟 삼백 날린 셈 치지 뭐."
"너, 무리하는 것 아니냐? 삼백이면 너 월급에 가까운 돈 아니냐?"
이제껏 아무 말이 없던 도금동이 조중구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그러자 조중구가 도금동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돈이 내겐 엄청난 돈이란 말이군. 야, 빌려주기 싫으면 그만둬."
"이 자식, 또 이런다. 얌마, 아무 말 없이 쓰고 있잖아?"
신동우가 도금동을 대신해 얼른 무마하려고 나섰다. 결국 신동우는 이백만 원이란 숫자와 A자를 쓰고 자신의 이름 란에 사인을 한 용지를 통에 넣었다.
"베팅 끝입니다. 이제부터 팔 분입니다. 자, 시간을 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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