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동의당은 현재, 국내에선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제약회사다. 동의당은 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남기고 간 제약시설로 도일세가 창업한 회사였다. 청심환과 고약, 무좀약 같은 몇 가지 약으로 시작한 회사가 구중 청량제인 인단으로 한동안 꽤나 재미를 보았다.
그러다 6. 25가 터지자 잠시 문을 닫았다가 서울이 탈환된 후 이번엔 머큐로크롬이나 소독용 알콜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통이어서 다친 자도 많고 워낙 비위생적 환경에 노출되던 시기라 이런 제품은 잘 팔렸던 것이다. 전후에는 소화제 종류로 눈을 돌려 쾌명수라 이름 붙인 물약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광고의 효과는 컸다. 한마디로 불티가 나게 팔렸다. 쾌명수는 바로 동의당의 오늘날을 있게 한 제품이었다.
그 후 도일세가 죽자 아들인 도신우가 회사를 물려받았다. 동의당이 제약회사라는 이미지를 확실히 굳힌 것은 이때부터였다. 미국과 독일 등 기술제휴를 맺어 항생제와 해열 진통제를 생산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카피 약과 특허가 만료된 약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동의당이 자체로 개발한 신약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국내에도 많은 제약회사가 생겨나서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다. 최첨단 신약을 최첨단 설비로 제조하는 회사들이 동의당을 추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동의당이 생산하던 제품과 동일한 약효를 지닌 약을 저가로 마구 생산해 냈다. 그러자 자연스레 동의당은 제약업계에서 순위가 밀려서 회사의 주가도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도신우는 회사를 새롭게 손보기로 했다. 신약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을 더욱 보강하고 내실을 다지려고 임원들을 밤낮으로 닦달했다. 그리고 회의에 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매스컴마다 건강 타령을 하던 시기에 맞게 새로운 복합 비타민제를 만들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타민이라면 단연 미국 제품이나 독일 제품이 으뜸이었다. 연구진은 그것을 모방해 새로운 타입의 비타민을 만들 연구를 하는 한편, 원료도 수입했다.
어느 날 감기 기운이 있던 연구실의 한 직원이 비타민 C를 희석해 설탕을 타 마시다가 그 맛에 반했다. 그러자 연구실 직원 모두가 따라 마시게 되었는데 개성에 따라 꿀이나 각종 비타민이 첨가되기도 했다. 이에, 연구 실장은 무릎을 치며 상부에 보고서와 함께 시제품을 만들어 올렸다. 사장인 도신우 이하 임원들은 보고서에 적힌 효능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 맛에 대단히 만족했다. 만장일치로 이 드링크 제품을 만들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제품을 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래서 나온 제품이 <멀티 비타 드링크>였다. 비타 드링크는 출시가 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십 년 동안 업계 일등을 해오던 D사의 드링크 제품을 하루아침에 물리친 것이다. 이것은 맛이나 영양보다는 사실 T V의 힘이 훨씬 더 컸다. 유명 걸 그룹을 앞세운 마케팅이 주효했던 것이다.
어쨌든 동의당의 약 같지도 않은 이 음료수가 대박을 쳐서 주가는 단숨에 두 배로 뛰었다. 주가와 함께 떠 오른 것은 또 있었다. 바로 동의당 도신우 사장의 장남 도금동이었다. 멀티 비타 드링크 광고에 걸그룹을 쓰자고 제안한 인물이 도금동이었던 것이다. 놀기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던 도금동이 어쩌다 이 일로 한 건 올린 것이다. 서른네 살에 이미 광고부 부장이던 도금동이 하루아침에 다시 상무이사로 껑충 뛰었다. 그것도 등기이사로 말이다. 도금동은 이제야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 도금동이 근래에 이르러 회사 동향에 엄청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동생이 귀국한 이후부터였다. 자신과 달리 워낙 똑똑한 모범생인 동생이었다. 그러니 자칫하다가는 회사의 경영권이 잘난 동생에게 넘어가는 불상사가 생길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도금동은 내친김에 또 한번 히트를 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당시, 회사는 신약 개발의 일환으로 몇 가지 프로젝트 중에 신장(腎臟)과 부신(副腎) 질환 치료제 개발 연구도 들어 있었다. 그것은 도금동이 자사 연구실로 스카웃 해 놓은 고교 동창인 조중구도 참여한 연구였다.
이 일로 도금동과 조중구의 만남이 잦아졌다. 도금동이 조중구를 통해 다른 임원들 보다 한발 먼저 신약 정보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신약 개발 여부는 회사 주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도금동은 그 신약을 어떻게든 성공시켜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 했다.
그러든 어느 날, 완성 단계라던 부신 질환 신약 프로젝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유를 몰랐던 도금동이 사장실로 찾아갔으나 아버지인 도신우는 알 것 없으니 함구하라는 말만 거듭 했다. 연구가 중단되었다고 입까지 다물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도금동은 퇴근 시간에 맞춰 조중구를 불러냈다. 술집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회사에서는 상사이나 사석에서는 친구인 도금동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짐작한 조중구가 주위를 흘깃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한마디 뱉었다.
"실패였거든."
"실패라니? 연구가 실패하는 건 복권에서 꽝 나올 확률과 같다며? 그런데 새삼 실패라고 입까지 봉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연구 중간에 실패하는 거야 그렇지. 하지만 이번엔 달라. 신장약은 임상 실험까지 안전하게 마쳤는데 부신 치료제에서 문제가 생겼단 말이지."
"무슨 문제? 야, 속 시원히 탁 털어놔."
"그게...."
조중구는 다시 한 번 실내의 빈 좌석들을 둘러보았다.
"야,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그게, 그냥 실패라면 실험을 중단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다음 프로젝트로 들어가면 되니까. 헌데 이번 건은 실패를 넘어 대형 사고 감이었단 말이야."
"야, 차근차근하게 얘기해. 부신 치료제가 어찌 되었다는 거야?"
"테레비에서 밤낮 떠드는 아드레날린이란 말은 너도 들어 봤지? 바로 그 아드레날린이 부신수질에서 방출되는 호르몬이거든. 연구의 골자는 이 아드레날린이었어.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감신경계의 고리를 푸는 거였단 말이야. 그리고 아미노산의 한 종류인 타이로신이 몇 과정을 거쳐 에피네프린이 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중간중간 우리가 합성한 물질을 추가해 나가는데.…"
"아야, 그만해. 골치 아퍼. 내가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잖아?"
"아, 미안해. 그럼, 결론만 얘기하지. 어쨌든 연구가 잘 끝나서 임상 시험용 약을 만들어 보냈어. 몰모트나 토끼 같은 소형 동물은 부속 건물에 있으니 우리 측에서 시험을 하지만 원숭이를 비롯한 개나 돼지 같은 대형은 안양 시험소에서 하잖아? 그래서 안양 시험소로 약과 지시서를 내려보냈단 말이야.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연구소로 급한 전화가 온 거라. 시약을 투약한 동물 가운데 원숭이와 개 그룹이 발작을 일으킨다고 말이야. 사실 약 성분 중에 있는 에피네프린이란 물질은 혈압을 높여 동물을 흥분시키기도 해. 하지만 그 정도의 약으로 그 정도의 발작까지는 가지 않거든."
"뭐? 약은 완성된 것이라고 했잖아?"
"연구가 끝났다고 완성된 것은 아니지. 임상 시험에 통과가 되어야 완성이지."
"그래, 그건 아무래도 좋아. 허지만 그 약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도금동은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함구 하라던 아버지의 말이나 표정으로 보아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조중구가 자꾸만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아서였다.
"아직 몰라. 컴퓨터에서 그간의 연구 자료를.... 아니, 그 프로젝트 자체를 아예 삭제했거든. 허지만 지금이라도 그 원인을 캐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어. 내가 작성한 연구 일지가 있으니까. 역추적을 하면.…"
"야, 그만해. 알고 나니 별것 아니구먼. 한마디로 예산만 날리고 말았다는 얘기 아니냐?"
"그게 아니라니깐. 그 뒤가 문제였다고..... 안양 시험소에서 발작을 일으킨 원숭이와 개들을 어떡할까 묻기에 이쪽에선 당연히 살처분 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지. 사고가 터지면 곤란하니까. 헌데 말이야, 살생을 하기 싫었던 그쪽 직원이 진정제만 투여해서 폐기업자에게 넘긴 모양이야. 늘 그래왔듯 죽은 동물을 넘기면 폐기업자가 화장을 해서 뼈는 매립을 하니까. 헌데 이 빌어먹을 폐기업자가 개들을 화장하지 않았던가 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화장하지 않고 제놈이 잡아먹었나?"
"그와 비슷해. 돈 욕심이 난 거지. 여덟 마리나 되니까 팔면 돈 아니냐? 허니까 이 폐기업자가 인천의 개 도축업자를 불러 산 채로 팔아먹었나 보더라고."
"놀고 들 있네. 돈에 환장을 했군. 약물에 찌든 개로 보신탕을 만들려고?"
"그런 셈이지. 허나 문제는 그게 아니야."
"뭐? 또 뭐야?"
도금동은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벌떡 이르키며 못마땅한 눈길로 조중구를 바라보았다. 도금동의 눈길을 의식한 조중구는 다시 한번 실내를 둘러 본 뒤 낮게 말했다.
"인천으로 가던 도축업자의 트럭이 사고가 나서 개들이 탈출을 했단 말이지."
"어? 발작을 일으켰다는 그 개들이 말이야?"
"그렇다니까. 그 개들이 인천의 무슨 산에서 노인들과 고등학생들을 물어 죽인 그 개들이 틀림없단 말이야."
"뭐? 그 일이라면 매스컴에서도 난리를 치고 전국이 떠들석 했던 사건이잖아? 그런데 그 개가 우리 회사 시험소 개란 증거가 어딨어?"
도금동은 이게 무슨 소린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사건의 개요를 듣는 순간 그 개들이 조중구가 말하는 개란 것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러나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측 개가 그런 사건을 일으켰다고는 나 역시 꿈에도 몰랐지. 하지만 사건이 나자 그 개들이 흘린 타액을 인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했거든. 그리고 광견병이 아니란 발표를 했어. 다만 그와 유사한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야."
"광견병이면 광견병이지 유사하다는 건 또 뭐야?"
"어쨌든 그 뉴스를 듣는 순간 무언가 감이 딱 잡히더라고. 유사하다는 물질이 실은 우리가 합성한 물질이라 그 정체와 성분 명을 그들이 몰랐던 거지.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 그 병원 측의 시료를 얻어 다시 자체 검사를 했어.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 연구소에서 만든 물질이더구만. 이제 알겠냐? 함구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진 이유를? 따지고 보면 우리 회사의 실수로 무고한 시민이 십여 명이나 죽었으니 먼저 입을 열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냐? 또, 그걸 경찰이나 언론에서 알면 회사는 어찌 되겠냔 말이야? 입 다물고 넘어가는 게 정답 아니겠냐?"
"십여 명이라니? 테레비에 선 대여섯 명이라고 한 것 같은데?"
"첫날 동물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도 사실 우리 측 개였어. 사고 차량 옆으로 지나가던 차가 쓰러진 개 두 마리를 싣고 그 병원으로 갔거든. 깨어난 개들이 데려간 사람과 병원 직원들을 해쳤단 말이야."
"별 미친놈이 다 있구먼. 죽어가는 개를 어따 쓰려고 동물병원까지 데려가?"
"그 개가 비싼 롯드와일러라 욕심이 났겠지. 우리 연구소의 시험용 대형 개는 주로 그런 견종을 쓰니까."
"넌 그런 사실을 누가 알려줘서 알고 있냐?"
"조금 전에 말했잖아. 시료를 분석한 대학병원의 발표로 감을 잡았다고... 그 뒤에 회사 차원에서 안양 시험소를 조사하고 폐기업자의 자백도 받아 냈다니까."
"이런 빌어먹을....... 무슨 연구를 그따위로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냐?"
도금동은 화가나는 듯 스스로 술을 따라 훌쩍 삼켰다.
"그게 말이야.... 아까 말한 부신수질에서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사실은 골 때리게도 호르몬이면서 신경 전달 물질이기도 하다는 것이지. 보통 아드레날린은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 분비되는데,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신체의 다른 기능을 줄이고 대신 그 에너지가 또 다른 힘으로 전환되거든. 개들이 미쳐 날뛰었다는 것은 즉, 아드레날린이 지나치게 방출됐다는 뜻인데 이것은 우리가 만든 약 성분에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을 잘못 자극하는 물질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하지만, 실험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해."
"야, 그만해, 골 아퍼."
"골 아플 것 없어. 이런 실패한 약이 때로는 엉뚱한 기적의 약이 될 때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드레날린이나 에피네프린이 따지고 보면 영 나쁜 것만은 아니란 말이지. 이것은 신체 기관을 자극하여 혈압을 높이고 사람을 흥분시켜 활동적으로 만드는 물질이란 말이야. 그걸 사람에게 잘만 이용한다면 보통 사람도 헐크 같은 힘이 솟지 않겠냐?"
"헐크 좋아하네. 얌마, 헐크는 감마선인가 뭐 그런 걸로 그렇게 된 거잖어?"
"아니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될 수 있고...."
"그건 인간의 이중인격.... 뭣이냐... 하여간 뭐 그런 걸 분리하려다 그렇게 된 거고.... 이건 누굴 순 바보로 아나? 네가 그러고도 과학자냐? 만화가지."
"아니지. 나는 이번 연구 실패로 느낀 게 있어. 시험용 보통개를 그렇게 괴물처럼 날뛰게 만드는 물질이라면 어딘가 반드시 쓰일 데가 있다고 말이야."
"어라? 야, 실패를 호도하면 네 자존심에 난 상처가 좀 나으냐?"
"호도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연구가 더 필요한 사안이란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지."
"아, 시끄러워. 자, 술이나 마셔."
도금동은 조중구로부터 답답한 소리만 들어서인지 목이 말랐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양주 대신 맥주를 갖고 오라고 했다.
"자, 마셔. 빌어먹을.... 신약으로 주가나 좀 올려 볼랬더니.... 완전 나가리 아닌가."
도금동이 조중구의 잔에 가득 맥주를 따뤄주며 중얼거렸다.
"주가도 좋지만 네가 빨리 사장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 아니냐?"
"사장 자리에 빨리 오르지 않으면 그 자리가 어딜 간대?"
"자리는 그대로겠지만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바뀌면 나 역시 곤란하지."
"뭐? 사람이 바뀐다고? 음, 내 동생 말이군. 왜? 회사에서 무슨 말이 돌디?"
"돈다기보다. 수군대는 건 사실이야. 네 동생은 경영학을 전공한 데다 MBA도 마쳤잖아?"
"빌어먹을,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MBA 근처에도 안 가셨어도 경영만 잘 하셨어…. 나 역시 전공이 경영학이 아니어도 회사가 어찌 돌아가는지 환히 꿰고 있단 말씀이야."
"누가 아니래냐. 어쨌든 네가 사장이 돼야 나도 하루빨리 실장 자리를 바라보지 않냐?"
"알면 됐어. 넌 그런데 신경 쓰지 마. 가만, 이럴게 아니라 동우 놈을 불러낼까?"
"야, 갠 그만둬. 그놈은 요즘 경마에 미쳐 있나 보더라."
"아니야. 지난주에 갤 만났었는데 경마에서 손 뗐다더라."
"뭐? 경마에서 손을 떼? 그건 거짓말이다. 그저께, 토요일날 스크린 경마장에서 그 녀석을 만났거든."
"뭐? 그럼 너도 경마하냐?"
"어엇, 그, 그건 ....어쩌다가.... 스트레스 쌓일 때 이따금 하지."
자신의 실언에 당황한 조중구는 얼굴까지 붉히며 손을 저었다. 그런 조중구를 도금동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중구와 신동우는 고교시절 도금동과 늘상 붙어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도금동과 신동우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으나 조중구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조중구의 아버지는 세무서 옆에서 대서 일을 했는데 그나마 늘상 병을 달고 살아서 형편 필 날이 없었다. 그러니 집안의 장남인 그는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글도 배우기 전에 가난이 무엇인지를 먼저 배운 것이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배가 고팠고 돈 있는 자를 선망했다. 그러나 비굴할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도금동 자신이나 신동우 역시 그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출세를 위해 공부에 열심이었고 부잣집 아들인 도금동과 신동우와의 관계도 잘 유지하려 애썼다. 학교에서 성적도 상위 그룹에 속해서 대학도 무난히 합격했다. 대학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세를 위해 절치부심하는 그를 못마땅해 하던 도금동과 신동우였으나 한편 그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중구에게 내색 없이 몇 번인가 등록금도 모아 주었고 학교가 달라도 억지로 시간을 내어서 서로 자주 만났었다.
광고 홍보학과를 선택한 도금동과 달리 조중구는 이과를 택해 생화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하루빨리 돈을 벌려고 화장품 회사에 입사한 것을 도금동이 현재의 연구소로 데려온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조중구의 집안 형편도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조중구 역시 옛날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된 듯했고 과학자로서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쯥, 동우가 너까지 끌어들였냐?"
도금동이 조중구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 이거 왜 그러냐? 난 아니다. 나는 그냥 재미로 몇 번 해 봤을 뿐이란 말이야."
"그래, 그동안 재미로 몇 번 해서 얼마나 날렸냐?"
"날리다니? 넌 나를 맹물로 보냐? 경마는 도박이기 전에 확률 싸움이야. 마필과 기수를 잘 분석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게임이란 말이야."
"오, 그러셔? 어떤 놈은 그걸 몰라서 집구석을 홀랑 말아먹냐?"
"그건 너무 깊이 빠져서 그런 거야. 깊이 빠지면 이성을 잃는다고..... 이성을 잃은 놈이 판단을 제대로 하겠냐? 야, 생각해봐라. 수영선수라고 물에 빠져 죽지 말란 법이 있냐? 수영선수라 하더라도 숨도 못 쉴 만큼 물속 깊이 빠지면 아가미가 없는 한 죽고 마는 거야. 그걸 아는 내가 깊이 빠지겠냐?"
"오호라. 그럼, 질문을 그동안 얼마나 땄냐로 바꿔 주지."
"그동안 딱, 열 번 해서 딱 천만 원쯤 땄지."
"뭐? 이게 누구 앞에서 뻥을 치냐? 나 보고 그걸 믿으라고?"
"넌 다 좋은데 의심이 너무 많아.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상대를 위한 배려야. 믿어. 내 말은 무조건 믿으라구."
"그 비법인지 확률인지를 동우에게도 좀 가르쳐 주지 그러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 귀에 수영강사가 하는 말이 들리겠냐?"
"쩝, 나야말로 프로젝트 나가리 된 이유를 알려다가 네 얘기에 빠졌었군. 야,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서 진짜 한잔하자."
"좋지. 가만, 네 말대로 동우란 놈을 불러서 실전 강의를 좀 해 줘야겠군. 야, 어떠냐? 동우를 부를까?"
"그러지 뭐. 까짓 신약이 그것뿐이겠냐?"
"동우를 부르자는데 갑자기 신약은 왜 또 나오냐?"
"그깟 상무나 하려고 내가 이러고 있냐? 뭔가 히트를 쳐 줘야 내가 회사내에서 발판을 굳힐 것 아니냔 말야. 아 이러다가는 나도 동우처럼 될까 걱정이다."
"동우가 어때서? 걔가 바보냐? 쉽사리 회사를 뺏길 놈이 아니라고."
"어쨌든 말이야."
신동우는 중소기업으로서는 규모가 큰 일진 금속 주식회사의 외아들이었다. 그러나 동우네 집은 어릴 때부터 가정사가 복잡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들 못 낳는 집안 셋째 첩의 자식인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버지도 후처의 소생이었고 아버지 역시 본처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동우 역시 밖에서 낳아 데려온 아들인 것이다. 사춘기 무렵, 친엄마로 알고 따랐던 여자가 사실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남이란 것을 안 동우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 귀여워하던 동생마져도 따지고 보면 친형제가 아니어서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동우와 열두 살의 차이나는 남동생이었다. 이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본처가 뒤늦게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이후 그 여자는 언제부턴가 동우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며 외면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랐던 동우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으로 알고 가능한 엄마에게 잘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동우를 더욱 경원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드디어 엄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엄마라는 여자의 말다툼을 듣고서였다.
당연히 동우는 방황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으나 친구인 도금동과 조중구와 어울려 그나마 약간 위안을 받았다. 신동우는 동생을 후계자로 하려는 그 여자에게 대항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신동우는 기업을 물려받고 말겠다는 의지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구멍가게 같던 철공소를 오늘날의 기업으로 일구기 위해 항상 기름에 쩔어 있던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여행이나 취미에 시간과 돈을 쓴 적이 없이 오로지 회사일에만 평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택할 때, 문학에 관심을 두던 신동우가 그 꿈을 접고 금속재료공학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엄마라는 여자는 그것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동우가 회사 안에서 기반을 굳힐까 겁을 낸 것이다.
동생인 신동일은 스물두 살로 이제 대학 3년생이었다. 그리고 부잣집 막내답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에 낭비가 심한 어린애였다. 그런 녀석이 최근에 이르러 동우에게 이유 없이 적대적 감정을 드러낼 때가 많았다. 그리고 대화를 하다가도 금세 경계 모드로 전환하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것은 보나 마나 엄마라는 여자의 훈수가 동생인 동일에게 작용한 것일 터였다.
이렇게 되자 동우는 다시 한 번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회사일도 심드렁했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결국 오피스텔을 얻어 혼자 살게끔 되었다. 이즈음, 삼 년을 사귀던 애인과의 관계도 나빠졌다. 매사에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엔 친구인 도금동과 조중구를 불러내 같이 울분을 토하며 술을 마셔댔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으로 회사 일에 바빴고 각자의 스케줄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신동우는 혼자 노는 법을 익혀 나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스릴 있고 재미있는 스크린 경마에 빠져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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