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序章)
1. 송수호
숙종 5년 (1679),
하지(夏至)가 지나자 한여름으로 변한 더위는 타는 듯 계속되었다. 이렇 땐 소나기라도 한차례 퍼부어주면 속이라도 후련하련만 오늘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달포 가까이 비 한 방울 없으니 논밭은 타들어가고 백성들은 하늘만 애타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젯밤에도 숙직을 선 송수호가 적선방 사헌부를 나서 집으로 향했다. 광화문 터를 지나 십자교 쪽으로 꺾어 들었다. 다리 밑 실개천은 이미 바짝 말라 있었고 개천가의 풀들도 누렇게 말라죽었다. 땅에서 올라온 열기가 이글이글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오르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한데 그 길을 멀리서도 눈에 익은 걸음으로 휘적휘적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저 친구가?"
분명 홍문관 교리 미수(微琇) 김민세였다. 관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등청하는 길인 듯한데 아닐 것이다. 등청하려면 그는 창덕궁(昌德宮)으로 가야 할 것이니 반대 방향으로 가야 옳다. 그렇다고 숙직을 서고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닌 것이 그의 집은 탑골에 있으니 퇴청을 하려면 이 길이 아닌 남쪽으로 가야 옳다.
"자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는가? 관복 차림에?"
"어, 아준이 자넬 마중 나왔지."
아준(雅峻)은 송수호의 자(字)다.
"나를? 허허, 농담이라도 고마우이."
"자네 집을 들렸다 오는 길일세. 간 밤에 숙직을 섰다기에 지금쯤 올 줄 알고 마중 나온 거지. 실은 나도 어젯밤 번이었네."
반가움에 김민세의 손을 잡은 송수호는 한편으론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웃음 띤 훤한 얼굴이던 그가 웃음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 좀 나누세. 어, 저기가 좋겠군."
김민세는 궁궐터 쪽을 가리키더니 앞장을 섰다. 지 지난 임진(壬辰) 년 궁궐과 함께 불타 없어진 옛 건춘문은 덩그러니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누런 잡초가 무성한 곳에 이르러 나무 그늘 밑 허물어진 성벽 돌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 어서 말해 보게나."
더운 날씨였다. 사모(紗帽)를 벗어 쥐었던 명주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김민세가 눈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 본 후 입을 열었다.
"먼저 자네에게 하나 물어봄세. 자네 근자에 누구에게 원한 살 일을 했는가?"
"원한? 글쎄 , 내가 하는 일이란 게 항상 원한을 살 일이지. 하지만, 사헌부의 일이 다 그런 거지 나 개인의 원한일려고?"
"그럴 터이지. 자네 같은 사람에게 누가 무슨 원한을 품겠나마는..."
"왜? 내게 누가 뭐라던가?"
"음, 실은 어젯밤 주상 전하를 뵈었네."
"전하를?"
"어제 당직을 서지 않았겠나. 이경(二更) 무렵에 탑전(榻前)에서 찾으신다기에 놀라 달려갔더니..."
"그래서?"
"상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사헌부 송수호란 자를 아느냐고 하문하시데그려. 그래서 예, 전하, 송 지평은 죽마고우로 신과 같은 해에 등과했삽기로 평소에 교분이 있사옵니다, 그랬지."
"아니? 상께선 미관 말직인 나를 어찌 아시고 그런 하문을 하셨단 말인가?"
김민세의 말을 자르며 놀란 송수호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거기까지야 난들 어찌 알겠는가? 더 들어보게."
"허."
"그랬더니 또 상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자가 무고한 사람을 잡아 죄를 준다는 소문이 과인의 귀에까지 들리니 어인 일인가? 그 자가 그처럼 괴악 한가? 이러시지 뭔가?"
"무, 뭐라? 전하께서 분명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
송수호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전하께선 왜 그런 하문을 하셨을까? 나에 대해 누가 전하께 고했을까? 임금의 노여움을 사면 가벼워야 파직이요 죽음 아니면 귀양 아닌가? 숱하게 본 일이었다. 김민세가 굳은 얼굴로 송수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셨다네. 그래서 나도 적극 자네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말씀을 올렸지. 자네는 직무에 공정하고 청렴하기로 삼사(三司)이 이미 호(呼)가 났다고 말일세. 그랬더니 상께서, 그러하냐? 설마 네가 과인에게 거짓이야 고하겠는가? 세자 시절부터 눈여겨 본 네가 그렇다면 그러하겠지. 송수호란 자가 너무 곧아 모함을 받은 게로구나. 하지만 과인이 보기에 김교리 너 또한 대쪽 같더구나. 혼자 너무 곧으면 곧지 못한 자의 시기를 받는 법이요, 시기를 받는다 함은 덕(德)이 모자람과 같다 했으니, 송수호란 자 또한 두고 볼 것이니 더 이상 과인의 귀에 들지 않게 하라. 이러시더군. 어찌나 황망한 지 모골이 송연해 혼이 났네그려."
미간에 주름을 지어 잔뜩 긴장된 얼굴로 신발의 콧등만 노려보던 송수호가 얼굴을 들어 멍하니 김민세를 쳐다보았다. 말을 마친 김민세 역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송수호가 입을 열었다.
"상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게, 사실 따지고 보면 어불성설일세. 우선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들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사헌부에 나 혼자 일을 보는가? 종 이품 대사헌(大司憲) 대감 있지, 집의(執義)에 장령(掌令)이 줄줄이 위로 버티고 있는데 고작 정오품 지평(持平)인 내가 명령 없이 누굴 잡아들인단 말인가? 그리고 사헌부가 벌주는 곳인가? 아니 그런가?"
"상께서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나? 진정 그리 믿으셨다면 자넬 파직부터 하셨을 터이지. 이건 자네를 미워하는 자가 모함을 했음이 틀림없네."
"날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자야 없겠는가? 옥당(玉堂)인 홍문관에 있는 자네나, 말직일망정 대관(臺官)이라 불리는 나나, 남인(南人) 세상인 현금(現今)에 우리 서인들 자손으로서는 과분한 자리지."
자조(自嘲) 섞인 송수호의 말을 듣던 김민세가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간곡한 어조로 일렀다.
"아무튼 매사에 신중하게. 금상께서 옥좌에 앉으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저들 남인의 세상이 된 이 마당에 우리들은 마냥 납짝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일세."
"엎드리고야 있지. 그렇다고 직무를 팽개칠 수는 없지 않은가?"
"팽개치라는 말이 아닐세. 적당히 캐고 적당히 조사하고 적당히 넘어가란 말이지. 솔직하게 말해 보게. 자네, 요즘 도모하는 일이 있지?"
"무슨 일을 도모해? 그런 일 없네."
"자네 답구 먼. 하지만 나도 다 알고 있네. 좋아 내가 먼저 털어놓지. 내가 요즘 우상을 가까이하네."
"우의정을? 그는 금상의 외척 아닌가?"
송수호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우의정 김석주가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 씨의 사촌이니 금상의 외척인 걸 누군들 모르랴. 또한 김득주는 김민세의 오촌 당숙이란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송수호는 연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가? 혹시 알고 있나?'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친구인 김민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관직을 걸어야 할 만큼, 아니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할 임무였다. 그런데 김민세도 우의정 대감과 뜻을 같이 한다니? 어떤가, 하는 얼굴로 김민세가 덧붙였다.
"하나 말일세, 우상이란 사람은 사실 대단한 야심가에 모사꾼이지."
"그걸 아는 자네가?"
송수호는 의외의 눈길로 김민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니까. 허나 쥐를 잡자면 고양이가 있어야겠지? 청탁(淸濁)을 떠나 남인 패거리를 때려잡는 데는 누가 뭐래도 우상 대감이 고양일세. 안 그런가?"
김미세는 이래도? 하는 눈길로 송수호를 압박해 왔다. 송수호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찬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음, 알만하군. 같은 길을 걸으며 생각이 다르다면 곤란하겠지. 사실은 내가 도모하는 일이 있네. 요즘 몇몇을 몰래 조사 중일세. 이 일은 우리 사헌부의 대사헌 대감도 모르는 일일세. 자네에게 감추어서 미안하네만 일이 일인지라,,,"
"원, 사람도 미안이라니? 그런 일이야 은밀이 생명이지."
"이번 조사가 매듭지어지면 저들은 여럿 다칠 것일세. 아니면 내가 먼저 당하던지."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상께 누가 자네 말을 올렸는지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네. 며칠 전 승정원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들었는데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인 김기철 대감이 지난 초이렛날, 임금께 독대(獨對)를 청했었다네. 자네 하나로 독대를 한 건 아니겠지만 대사간이 누군가? 남인의 수장 영상과 사돈 아닌가? 그러니 이번 독데엔 분명 영상의 입김도 작용했을 것이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아마 그날 자네를 싸잡아 말밥에 올린 것일 게야."
"가만, 초이레라 했나? 그렇다면...."
"그날이 왜?"
"아, 아닐세."
"아무튼 자네가 누구와 척을 지었는지 모르나 저들 패거리의 입초시에 오르면 재미적네. 나도 조심할 터이나 자네도 매사를 살얼음 밟듯 하게나."
김민세는 해야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송수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예의 그 걸음으로 휘적휘적 멀어졌다. 무쇠라도 녹일 무더운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든 송수호가 불현듯 뱉었다.
"헛, 견이란 놈, 그놈이겠군.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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