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시 반이 넘어 아홉 시에 가까워 갈 무렵이 되자 판돈이 커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도박꾼들의 열띤 분위기로 하우스 안은 그야말로 용광로 같았다. 그때까지 윤치우는 참을성 있게 판세를 살피며 꾸준히 한 번의 배팅 찬스를 노리고 있었다. 윤치우는 현금 카드로 5억 중에 2억을 현금으로 환전했다. 거기에 신동규가 챙겨 준 5천을 합해 총 2억 5천을 가지고 시작을 했었다. 게임을 시작해서 얼마 안 돼 오륙천만 원을 잃었던 윤치우가 끈질긴 관찰과 소액 배팅을 한 결과로 초장에 잃었던 오천을 되찾았다. 카지노의 바카라에 단련된 눈이어서인지 서서히 돌아가는 판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윤치우의 옆자리에 앉은 장철규는 판세나 배팅보다는 스크린과 사람들의 움직임에 더 관심을 가진 듯 단추로 위장한 몰래 카메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유명우는 미자를 따라 배팅을 한 관계로 칠천만 원 정도 딴 상태였다. 결국 애초에 세 사람이 2억여 원씩 나누어 밑천으로 삼았던 돈이 고스란히 남은 데다 미자의 눈부신 활약으로 총 7억의 자금이 현재 두 배가 훨씬 넘게 불어나 있었다. 또 한 번 하우스 안이 소란했다. 이긴 자는 환호했고 진 자는 탄식해 마지 않았다. 대여섯 대의 석유난로가 켜진 중앙 통로에선 10여 명의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패자의 돈을 걷고 승자에게 그만큼의 손을 신속하게 더해주고 다녔다. 일 분도 안 되어 또다시 화툿장이 나누어 졌다. 마이크를 잡은 부엉이 최태식은 입가에 게거품을 뿜으며 신나게 게임을 진행했다.
"배팅 스톱. 스톱입니다. 규칙을 따라주세요. 그래야 진행이 매끄러우니까요. 자 그럼, 딜러가 먼저. 삼 땡, 삼 땡 입니다. 다음 플레이어, 아 아홉 끗, 가보로군요. 딜러 승."
그때였다. 구경꾼을 뚫고 딜러인 타짜 앞에 나이 많은 노인이 우뚝 섰다. 덕배 아버지 곽순도였다. 노인은 부엉이 최태식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거기 시끄럽게 떠드는 너, 여기 책임자를 불러라."
최태식은 왠 돈잃은 노인네가 행패를 부리려는 줄 알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이, 거기 누가 저 영감 좀 끌어내라. 이거 진행이 안 되잖아?"
그러자 거구의 덩치가 노인 앞으로 다가와 손으로 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노인은 꿈쩍하지 않고 다시 부엉이 최태식을 향해 좀 더 큰소리로 말했다.
"책임자를 부르지 않겠다면 내 말을 전해라. 곽덕배의 아비가 왔다고, 그 말은 알아 들을 것이다."
부엉이가 다음 게임을 진행하려다 곽덕배라는 소리에 멈칫하여 마이크를 내렸다.
"방금 곽덕배라고 했습니까?"
노인 가까이 다가 선 부엉이가 노인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가는귀가 먹었느냐? 내가 아비라고 하지 않았느냐? 책임자를 불러 오란 말이다."
마침, 천태종과 함께 휴게실과 식당차를 둘러보고 게임장으로 들어서던 김기동이 백여 명의 꾼들과 수많은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며 술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부엉이의 마이크 소리도 없었다. 김기동과 천태종은 급히 사람들을 헤치며 게임이 진행되는 중앙으로 나섰다.
"뭐야? 뭣때문에 게임을 중단한 거야?"
부엉이는 마이크를 잡은 손으로 말없이 노인을 가르켰다.
"이 영감? 이 영감이 어쨋기에?"
김기동이 다시 한 번 못 마땅한 눈길로 노인과 부엉이를 쏘아보았다.
"네가 여기 책임자냐? 나는 곽덕배의 애비되는 사람이다. 네게 볼일이 있어 왔느니라."
김기동 역시 멈칫했다. 전혀 뜻밖의 상황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따위 노인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곽덕배의 아비면 남의 영업을 방해해도 된단 말이요? 뭐하냐? 저 영감을 얼른 끌어내지 않고. 빨리 끌어내고 게임을 시작해. 어서."
게임의 흐름이 끊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리되면 마지막이 될 이날의 수입은 날아간다. 수백 개의 눈알이 자신과 노인의 행동을 지켜 봐 함부로 못해서 그렇지 속대로 하면 단번에 애들 시켜 몰매를 안기고 싶은 김기동이었다. 뒤에 있던 오덕이가 성큼 다가와 노인의 팔을 잡고 끌었다.
"원무현을 모르느냐? 나를 내 쫓으면 원무현이 것도 쫓아버리겠다는 거냐?"
노인은 잡힌 손을 뿌리친 후 김기동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기동은 감전된 원숭이처럼 눈이 훽 돌았다.
"잠깐, 어이 최태식이, 5분간 휴식이다. 5분간만 휴식이라고 어서 알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딜러와 부엉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웅성대고 있었다. 부엉이의 5분간 휴식 선언이 스피커를 통해 하우스에 퍼졌다.
"여러분 오분간 휴식입니다. 게임에 열중해 화장실 갈 것을 잊고 계신 분들을 위해 오분간 휴식을 한 후에 다시 화끈한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방송을 들은 사람들 중에 화장실로 달려가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야유조차 없었다. 짧게 방송을 마친 부엉이가 김기동을 돌아보니 그는 노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윤치우도 그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 명의 노인의 출현으로 인해 김기동이 게임을 중단할 정도라면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장철규가 멈칫하더니 뚫어지게 노인을 바라보더니 급히 구경꾼 뒤로 빠졌다. 이어폰에서 덕배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 온 탓이었다.
"방금 그 노인, 그 노인이 어찌된 거야? 철규 네가 다가가서 알아 봐. 그분 우리 아버지야. 이거 어찌 된 노릇이야?"
"예? 형님 부친이라고요? 부친이 왜?..."
"그러니까 빨리 알아보라고."
장철규는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 노인의 옆까지 왔으나 김기동과의 대화는 이미 끝나서 알아 낼 것이 없었다. 장철규는 유명우와 미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두 사람에게 귓속말로 노인의 정체를 알렸다. 김기동은 조금 뒤로 물러나 부엉이와 작은 소리로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김기동과 부엉이의 태도로보아 뭔가 중대한 사건이 생긴 듯했다. 게임에 참가한 꾼들과 구경꾼 그리고 주최측의 인원까지 총 이백여 명의 인원이 긴장감에 휩싸여 숨소리마져 없었다. 하우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식당차의 덕숙이와 말자도 끊임없이 지꺼리던 스피커 소리가 뚝 끊기고 꾼들의 환호 소리가 없어지자 이상한 생각이들었다. 마침 손님이 뜸한 시간인데다 몇 명 손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여서 다 나가고 없었다. 덕숙이와 말자도 하우스로 가 보기로 했다. 한편 김기동은 부엉이의 말을 듣고 하우스의 숨겨둔 초 고수 허삼근을 불러내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자신 있단 말이지? 확실한 거요?"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거요? 이럴 때 쓰자고 날 부른 것 아니요?"
"허선생 명성이야 알지요. 허나 이건 우리 하우스의 명운이 달린 문제요? 허선생의 손에 하우스 전체 식구들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걸려서 하는 소리지요."
"허, 노름이 다 그런거지. 허고 왜 질 것만 생각하시오? 이겨서 단번에 이제껏 번 것의 두 배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좋습니다. 한 번 해 봅시다."
김기동이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두배라는 말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부엉이도 허삼근도 천태종도 그 누구도 원무현의 돈에 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곽덕배의 아비가 가진 돈이 50억이라고 김기동이 인정했을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곽순도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원무현이 감춘 돈의 위치를 걸테니 김기동은 납치한 아들을 걸라는 말이었다. 곽순도는 자신이 이겼을 경우 돈은 필요 없이 아들만을 원했다. 대신 지면 돈은 물론 아들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김기동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납치해 오지 않은 곽덕배를 담보로 벌리는 일방적 게임 아닌가 말이다. 그럴리는 없지만 졌을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곽덕배는 모르는 일이었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지 그까짓 노인이 어쩔 것인가? 그리고 허삼근이 나설 이 게임에서 이길 것은 천만 번 당연한 것이니 혼자 원무현의 돈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쥐도 새도 모르게 뜨려든 찰라에 생긴 횡재였다. 분명히 노인 혼자만 알고 있다 했으니 게임이 끝나면 슬그머니 뒤따라가 해치워 버릴 맘을 먹은 것이다. 부엉이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만당하신 신사 여러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왕 기다리신 김에 딱 십분간의 여유를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방금 거금 50억을 걸고 단판 승부로 올인하신 분이 계셔서 저희측 딜러와의 한판 대결이 있은 후 여러분을 다시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딱 십분간, 딱 십분간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부엉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술렁 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윤치우는 무언가 대박의 찬스가 온 것을 느꼈다. 앞에 놓인 돈을 가방에 쓸어담는 동시에 <자리>하고 외쳤다. 거구의 진행 요원 하나가 얼른 프라스틱 의자를 윤치우가 앉았던 자리에 놓았다. 그러면 윤치우가 돌아올 동안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윤치우는 바람처럼 환전차로 달려가 카드를 내 밀었다.
"남은 3억 다 주시요. 그리고 여기서 꽁지돈도 댄다는 말을 들었소만...."
카드를 긁어보던 봉고차 안의 사내가 윤치우를 슬쩍 훑어보았다.
"신용 대출로는 일억까지 가능합니다. 꽁짓돈은 첫거래로선 곤란하구요."
그때 봉고차 안에 설치된 조그만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손님 이리 모셔라. 얼른,"
봉고차 어딘가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이곳을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차 안의 사내가 얼른 내려 윤치우를 무장 탑 차로 안내했다. 오륙십 대의 말쑥한 중늙은이가 윤치우를 맞았다.
"손님께서 돈이 필요하시면 10억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선생께선 이미 내 신분을 안다는 말씀 같습니다."
"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객은 모두 같은 고객일 뿐이니까요."
"좋습니다. 빌리지요. 가능한 빨리 주십시요."
"여기선 시간이 돈이지요.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윤치우가 얼른 사인을 마치자 꼭 10억을 넣어 놓은 돈가방과 3억이 든 자루가 나왔다. 웬일인지 수수료도 떼지 않은 것이다. 윤치우는 들고 있던 가방에 자루를 넣었다.
"네가 얼른 운반해 드려라."
젊은 사내가 10억이 든 가방과 윤치우가 들고 있는 가방까지 받아들고 부리나케 하우스로 향했다. 윤치우는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윤치우가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주최 측과 꾼들 사이에 고성이 오고가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윤치우가 사태를 관망했다.
"하우스가 당신들 두사람의 것이란 말이요? 어차피 우리도 올인할 판이니 같이 붙은들 당신이 손해 볼 일이 어디 있소? 어느쪽에 걸 건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 아니냔 말이요? 안 그래요? 여러부운?"
옆자리의 일행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가운데 여자도 나섰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여기 게임을 하러왔지 다른사람 돈 따는 구경 온 줄 알아요? 어서 우리도 끼워줘요. 아 뭘해요? 대답을 하라고 대답을."
윤치우 바로 곁의 사나이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한손을 귀에 붙이고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지 입만 우물우물하고 있었다. 사실 장철규는 나서서 말할 틈도 없었다. 화면에 비친 아버지를 발견한 곽덕배가 쉴 새 없이 장철규에게 무슨 일인가를 물어서 사실 확인이 더 급했던 것이다. 아는 대로 보고를 하자 단번에 덕배가 사태를 알아차리고 무조건 노인에게 올인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것을 동생인 미자와 보스 유명우에게 알렸더니 두 사람이 어떻게든 게임에 끼려고 악을 쓰며 주최 측을 압박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꾼들도 감을 잡고 한방이 터질 기회라 여겨 악을 쓰기 시작했다. 하우스 안은 흡사 악마구리 끓듯 소란스러웠다. 다시 김기동과 천태종, 그리고 부엉이가 머리를 마주했다.
"어때? 어차피 이거 한 방으로 오늘을 끝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김기동이 두 사람의 동의를 구했다.
"그래버리지요. 우리 쪽엔 허삼근 고수가 있으니까 어차피 이깁니다. 저것들이 배팅을 한다 해도 반반일 것이니까 우리 수입에 손해는 없을 겁니다."
"전부 저 영감 쪽에 올인을 하면 더 좋지. 한 번에 싹 쓸어버리게 말이야."
천태종이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김기동이 고리눈을 들어 하우스의 천정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결단을 내린 듯 소리쳤다.
"좋다. 썅. 어차피 인생은 한방이다. 시작 해."
부엉이가 다시 신바람을 내어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참여할 기회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오늘의 게임은 이번 한 판으로 끝내겠습니다. 내일 부터는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할 것입니다. 이따가 끝날 때 다시 알려드리는 걸로 하고 그럼 지금부터 수퍼 빅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산길을 달려온 진우가 하우스를 들어서니 실내는 열광한 꾼들로 만원이었다. 사람들을 파고들어 이리저리 살피던 진우가 딜러 석을 마주한 덕배 아버지를 발견했다. 재빨리 그 쪽으로 다가가 노인의 뒤에 섰다.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노인이 진우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 얼씬을 말랬더니 어찌 알고 온 게냐? 네게 남긴 글을 보고 온 게냐?"
"글이라뇨? 아니요. 못 봤습니다. 제 짐작으로....참 어머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사람은 괜찮다. 염려 말거라. 그리고...귀를 좀 빌리자꾸나."
의아한 진우가 할 말을 잊고 귀를 기울이자 노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덕배 애미는 내가 챙길 테니 너는 네 몸만 챙기거라. 그리고 개무덤이더라. 나중에 파 보거라."
"예?"
막 게임을 진행하려는 순간이었다. 허삼근 고수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김기동은 뒤로 물러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 게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장님 저기..."
누가 김기동의 소매를 당기며 속삭였다. 돌아보니 수미가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앞 쪽을 가르키는 것이다.
"저기 저 노인 옆에 방금 온 저 사람이 이진우예요. 저 사람이라구요."
김기동이 또 한 번 찌릿한 쾌감을 느꼈다. 막판에 이것저것 다 건지게 생긴 것이다.
"잠깐. 어이 부엉이, 잠깐만, 일분도 안 걸려."
김기동이 재빠른 걸음으로 진우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노트북의 화면을 드려 다 보던 덕배였다. 장철규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또 한 번 놀란 소리가 들렸다.
"저, 진우 저 자식 저건 왜 또 저기 있는거야? 철, 철규야, 저 자식에게 내 전화를 받으라고 해.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안 받네 이거?"
장철규는 사람들을 뚫고 진우에게로 다가갔다.
"덕배 형이 전화를 받으랍니다. 전화요."
"엉? 덕배라니? 무슨 전화요?"
"진우씨 전화 말입니다."
그제야 주머니 속에서 부르르 전화기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진우는 급히 전화기를 귀에 댔다.
"나 덕배다. 난 무사하다. 넌 어서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그 자릴 피해라. 아니 이번 판만 끝나고...이번 판이 끝나면 즉시 산 아래로 모시고 내려 와."
"무사하다니 됐다. 너의 아버님은 내가 모실 테니까 걱정마라."
전화를 주머니에 넣자말자 김기동이 진우의 앞에 섰다.
"이진우씨, 당신도 배팅할 것이 있을 텐데?"
진우는 자신의 이름을 아는 이 사람이 누구일까 김기동을 뻔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 자가 김기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배팅 할 것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거 왜 이러시나? 좋아, 단도직입으로 말하라 이거지? 총알, 엽총 탄약 말이야."
"갑자기 총알이라니? 아, 참, 이런 걸 말씀하십니까?"
안 주머니에 넣어 둔 덕배 아버지의 공포탄에 생각이 미친 진우가 탄약을 꺼내 보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구먼. 좋소, 오억을 쳐 드리지. 배팅하시지."
"배팅이고 뭐고 내겐 소용없는 물건 입니다."
진우는 눈앞에 보이는 두 바구니 중 아무 바구니에 탄약을 던졌다. 탄약은 빨간색 딜러 측의 바구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덕배 아버지에게 작은 소리로 덕배의 소식을 전했다.
"아버님, 덕배는 무사하답니다. 방금 전화가 왔습니다. 저랑 그만 가시지요?"
"뭐라? 그럼 됐다. 허나 이놈들은 용서 할 수가 없느니라."
사실 총알이 바구니에 담기는 걸 본 순간 눈이 번쩍 떨어진 사람은 윤치우였다. 저것, 저것은 신동규가 말한 그 엽탄이 아닌가? 자신에게 왔어야 할 다이아몬드 엽탄이 어째서 이자리에 나타난단 말인가? 놀란 사람은 윤치우 뿐만 아니었다. 유명우 일행에게 붙여둔 졸개로 부터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던 오정철이 총알이 나왔다는 소리에 놀라 옆에 있던 신동규에게 알렸다. 신동규는 즉시 안순태에게 비상을 걸게 했다. 놀란 사람 중에는 말자와 덕숙이도 있었다. 수미가 김기동에게 다가가 손짓을 하는 사람을 보니 이진우였던 것이다. 말자는 얼른 하우스를 나와 순복에게 전화로 이진우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알렸다. 이제 순복이는 아버지인 정팔봉에게 전화를 할 것이었다.
"자, 이제 진짜 시작 해. 태종이 넌 이쪽으로 와."
"자 이번엔 진짜올시다. 먼저 부정을 없애기 위해 딜러가 한장 제가 한장 마지막은 여러분 중에 한 분이 한 장을 돌리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속임수를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자, 딜러가 한 장씩 엎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
부엉이가 먼저 딜러 측의 허삼근 고수 앞에 그림이 보이게 한 장을 놓았다. 난초 다섯 끗이었다. 다음은 곽순도 앞에다 열 끗 단풍이 놓였다. 이렇게 되면 곽순도 쪽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 끗발은 이미 뒤집힌 단풍이 또 한장의 단풍을 만나 장땡이 되든지 아니면 엎어진 한장이 다음에 올 패를 만나 기적 같이 삼팔 광 땡이 되는 길이었다. 반면 딜러인 허삼근이 바랄 수 있는 수는 오로지 장땡을 누를 수 있는 삼팔 광 땡 밖에 없었다. 꾼들이 스크린에 비친 패에 술렁이며 어느 쪽이 유리한 패인지 망서리고 있었다.
"자, 배팅들 하세요, 시간은 일분, 일분이 넘어서 배팅하시는 것은 무효입니다. 자 배팅들 하세요. 자 시간은 갑니다."
눈을 빛내며 판세를 보던 윤치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빨간 바구니에 10억이 든 가방과 5억이 든 가방을 함께 놓았다. 딜러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판돈을 먹지 않을 딜러가 있겠는가? 게다가 딜러를 바꾼 것은 새로 나온 딜러가 초특급 고수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10억이 든 가방은 겉면에 C E 라는 커다란 글씨가 쓰인데다 지퍼에 봉인이 되어 있어 진행요원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C E 는 카드 환전의 약자로 환전상의 돈 가방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그쪽 직원이 직접 들어다 주는 걸 보기까지 한 것이다.
"오우케이. 확인."
검은 양복의 거구가 바구니를 약간 안 쪽으로 당기며 확인 사인을 했다. 옆자리의 미자는 반대로 파란 바구니에 두 개의 가방을 올려놓았다. 다른 진행 요원이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재빨리 돈 뭉치를 헤아린 덩치가 다음 가방을 열었다.
"보나마나 10억과 5억이 든 거라구요."
미자의 말에 아랑 곳 없이 돈뭉치를 확인한 덩치는 오우 케이 하고 물러났다. 일분이 지났음인지 부엉이가 다시 마이크로 외쳤다.
"배팅 스톱, 스톱입니다. 다음은 여러분 중에 한분이 화투를 돌리겠습니다. 어느 분이 하시겠습니까? 아무나 나와 주세요."
그러자 저 멀리 끝자리의 어떤 싱거운 사람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거기 예쁜 아가씨가 돌리게 하슈."
사람들이 동의하듯 와 하며 웃었다.
"좋습니다. 우리 마누라도 예쁘지만 저 아가씨가 훨씬 더 예쁘군요. 나오세요. 아가씨."
수많은 눈들이 보고 있어 약간 망서리던 미자가 앞으로 나와 먼저 컷을 해 화투를 섞은 후 딜러와 플레이어 쪽에 한 장씩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웬 허름한 옷차림의 노파가 나타나 김기동의 옆을 스쳐 미자에게 다가갔다.
"어,엇. 저 늙은인 또 뭐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사태를 관망하던 김기동이 놀라 옆에 선 천태종을 돌아보았다.
"야, 막아, 막으라고."
김기동의 급한 외침에 천태종과 뒤에 있던 오덕이가 황급히 노파의 뒤를 따랐다. 앞 선 천태종이 손을 뻗어 팔을 잡는 순간이었다. 노파가 무엇에 걸린 듯 앞으로 폭 고꾸라 졌다. 노파가 넘어진 곳은 딜러의 무릎 아래였다. 당황한 딜러 허삼관이 엉겁결에 노파를 부축했다. 그러자 노파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수야 네 이놈. 이 에미 몰래 또 노름을 하는구나."
뒤 미쳐 달려든 천태종과 오덕이가 동시에 노파의 양 팔을 잡아 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오 초 정도의 혼란이 있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이 판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자 이제부터 패를 확인 하겠습니다. 먼저 딜러부터 패를 보여주시지요."
딜러인 허삼근이 천천히 바닥에 놓인 석장의 화투를 집었다. 그 순간이었다. 허삼근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더니 화투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패를 보여 주세요."
패를 보이라는 부엉이의 말에도 허삼수는 화투는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손만 계속 떨었다. 다시 한번 부엉이가 패를 보여 줄 것을 재촉했지만 그사이 허삼근은 눈동자가 돌아가고 입술 마져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소매 속에 감추었던 삼광과 팔광의 화투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부엉이는 허삼수가 최고 끗발을 상대 보다 늦게 보이므로써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줄로 알았다.
"그럼 플레이어 쪽이 먼저 패를 까겠습니다. 자 보여주세요."
곽순도가 열끗 단풍을 바닥에 던졌다. 그걸 본 부엉이가 깜짝 놀라 소리 쳤다.
"열 끗 단풍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삼팔?....아앗, 정말 삼팔 광 땡입니다. 더 볼 것도 없이 플레이어 승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하우스 안은 세상이 떠나가 듯 함성이 울렸다. 동시에 윤치우는 이성을 잃었고 그 때까지 초특급 타짜 허삼근은 죽은 듯 굳어 있었다. 덩치들이 재빨리 패자의 돈을 거두고 승자에게 더해 주기 시작했다. 유명우와 미자는 윤치우가 잃은 15억의 돈가방을 덩치들에게서 받자말자 잽싸게 가방을 나누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철규가 유명우와 미자의 등을 밀며 소리 쳤다.
"길에 차가 막히기 전에 빨리 내려오랍니다. 미자 넌 가방 하나 이리 줘, 자, 가자."
세 사람은 문을 향해 전 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진우의 핸드폰이 다시 부르르 떨었다.
"야, 야, 진우야, 조금 전 어머이가 어떻게 됐냐? 빨리 찾아서 아버지와 함께 내려 와라. 거기 있으면 안 된다. 무조건 내려오고 보라고."
"그러지 않아도 나도 너의 엄마를 찾고 있다."
진우는 정신없이 하우스 안을 훑어보았다. 아까 놈들에게 들려 하우스 밖으로 쫓겨난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우는 문으로 향했다. 그 순간 누가 옷을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였다.
"이진우씨죠? 순복이에게 연락을 하세요. 순복이가 애를 낳았어요. 이진우씨 애를요."
재빨리 말을 끝낸 여자는 식당차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평소였다면 깜짝 놀라고도 남을 이 말이 꿈을 꾸듯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편으론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덕배 엄마가 먼저였다. 한편 김기동은 처음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었다. 부엉이가 삼팔 광 땡을 외칠 때는 딜러가 이겼다는 줄 알고 그러면 그렇지 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긴 쪽이 딜러가 아니란 것을 안 순간 깜박 정신이 나갔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앞줄의 웬 사내가 빨간 바구니로 엉금엉금 기어와 총알을 움키고 있었다. 김기동은 덩치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모두 천태종에게 모여 뭐라고 지꺼리고 있었다. 그러자 천태종이 김기동에게로 다가왔다.
"형님, 나눠 줄 돈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애들 시켜 차에서 가져오라 할까요?"
"뭐? 그 돈도 모자란다고? 안 돼. 가만 기다려."
김기동이 드디어 이성을 잃고 방금 총알을 주워 도망친 놈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하우스 문을 나서자 말자 달아나는 그놈의 목덜미를 잡았다.
"개새끼 같으니, 그 총알 못 내놔?"
"이거 어떤 놈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놔, 내거야, 내거라고, 애초에 내게 올 거였다고."
올인한 15억이란 거금이 사라진 순간 이성을 잃긴 윤치우도 마찬가지였다. 윤치우는 돌아서며 김기동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재수없게 별 볼일 없는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김기동이 바닥에 딩굴었다. 그사이 윤치우는 자기 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따라가기가 늦었다고 판단한 김기동이 무슨 생각에선지 권총을 꺼내 윤치우를 향해 발사했다. 총소리는 고요히 잠든 산천초목을 깨운 듯 온 천지에 크게 울렸다. 윤치우가 제자리에 우뚝섰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갔지만 순간, 자신이 맞은 줄 안 것이다. 김기동이 총을 겨눈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윤치우는 총알을 김기동의 발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 몸을 돌려 많은 차들 사이로 자신의 차를 찾아 뛰었다.
"어이 김검사, 출동 해. 경찰들 출동 시키라고, 지금 당장, 여긴 지금 비상사태야."
차 문을 열기도 전에 윤치우가 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정신없이 떠들었다. 그때 땅바닥을 응시하던 김기동이 총알을 주워 자신의 차로 향했다. 김기동이 환전 차 옆에 주차한 곳으로 거의 다 갔을 때 봉고차와 무장 박스차가 시동을 걸어 출발하고 있었다. 총소리와 하우스의 분위기를 감지한 환전상이 재빨리 발을 빼고 나가려는 거였다. 그것을 본 김기동이 순발력을 발휘 해 다이아몬드와 차 뒷좌석 밑에 있는 돈만이라도 먹고 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원격시동 경보기를 꺼내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구리가 화끈하더니 다시 한 번 뜨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기동은 단번에 무릎이 꺽여 펄석 주저앉았다. 김기동은 자신이 어찌된 것인지도 몰랐다. 한손에 들었던 엽탄이 땅에 또르르 굴렀지만 그것도 알지 못했다.
"개새끼, 네가 나를 죽이려 했지? 잘 봐라 누가 누구를 죽이는지."
어둠에 묻혀 기회를 노리던 석호였다. 김기동의 옆구리에 다시 한 번 칼을 박은 석호가 풀 숲을 뒤지더니 감추었던 소줏병을 들고 나왔다. 소줏병 주둥이에는 헝겁이 메달려 있었다. 화염병이었다. 심지에 불을 붙인 석호가 운전석 문을 열고 병을 던져 깨자 단번에 불길이 확 퍼졌다. 석호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김기동은 자신의 불타는 차 아래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절명했다. 김기동이 발사한 총 한방에 하우스 안은 말이 아니었다. 승자에게 나눠 줄 돈이 모자란 부엉이와 천태종이 꾼들의 손에 잡혀 발길로 차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려드는 꾼들을 익혀 둔 솜씨로 두들겨 패서 물리 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돈을 주지 않자 닥치는대로 마구 부수고 뒤엎어서 석유난로는 모두 넘어져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하우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문 밖으로 나가려 아우성이었다. 발길에 차여 의식을 잃은 부엉이 최태식에게 수미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우스의 지붕에도 불이 붙었다. 힘 있는 사람은 힘 약한 사람을 밟고 밖으로 탈출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불길이 일자 곧바로 식당차의 덕숙이와 말자부부는 어제 나눠 가진 돈만 챙겨 덕숙이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함께 타고 남보다 먼저 출발해서 그곳을 빠져 나갔다. 그 와중에도 덕숙의 손엔 대여섯 개의 김밥 도시락이 담긴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럴 때, 덕배 아버지 곽순도는 덕배 엄마를 업고 산기슭을 올라가고 있었다. 마주보이는 은광의 입구에서 수많은 랜턴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안순태가 십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김기동과 천태종을 제압하기 위해 전 속력으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우스 밖으로 덕배 엄마를 찾으러 간 진우는 헛탕을 쳤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저 나오는 통에 덕배 아버지의 행방 마져 놓치고 말았다. 산 아래로 가보고 싶었으나 이미 차와 사람이 뒤엉켜 도로는 막힌 상태였다. 진우가 착신 번호를 눌러 덕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지금 여긴 아수라장이다. 너의 엄마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너의 아버지 마져 어디 계신지 모르고 있다. 어쩌면 좋으냐? 도로가 막혀 그쪽으로 가셨을 것 같진 않다."
"그럼 빨리 산길을 택 해. 지난 번 나하고 같이 왔던 길 말이다. 노인네는 사냥꾼 아니시냐? 틀림 없이 산길로 가셨을 거다. 아뭇소리 말고 빨리 가. 나도 곧 집으로 갈 거니까. 이따 집에서 만나자."
"알았다."
진우는 휴게실 뒷편의 산길을 향해 뛰었다. 어찌된 일인지 휴게실에서도 불길이 솟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식당차에 둘러친 천막에서도 불빛이 일렁거렸다. 석호가 화염병을 갖고 다니며 불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불길을 피해 산기슭을 마구 기어 올랐다. 얼마나 기어올랐을까 산 밑을 바라보니 게임을 진행하던 커다란 하우스는 이미 다 타서 불길이 사그러 들고 있었다. 대신 나머지 하우스와 식당차가 불이 붙어 맹렬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 불길을 피해 사람들이 이리저리 개미떼 처럼 흩어졌다. 진우는 다시 방향을 가늠해 길을 찾아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한참을 헤맨 후에야 길을 찾았다. 그리곤 또 죽어라 앞만보고 달렸다. 어둠도 좁은 길도 진우에겐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 옥수수 밭까지 왔을 때였다. 텅 빈 밭 가운데 움직이는 히미한 물체가 있었다.
"아버님, 아버님이십니까?"
덕배 아버지라고 짐작되는 물체를 향해 뛰어가는 동시에 소리쳤다.
"오냐. 나다."
덕배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우는 한편 반갑고 한편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진우가 가까이 갔을 때였다. 덕배 아버지의 등에 업힌 덕배 엄마가 진우가 온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진우냐? 덕배는 풀려났느냐?"
"예, 곧 올겁니다. 아까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놈 얼굴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예? 그런 말씀 마십시요. 덕배가 오면 그 차로 곧바로 병원으로 가시지요?"
"일 없다. 나는 괜찮다."
진우는 걸음을 멈춰 덕배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어디냐? 너의 부모님을 만났다."
"다 와 간다. 방금 기찻길 밑 다리를 건넜다."
통화를 마친 진우가 부리나케 덕배 아버지 옆에 붙었다.
"거의 다 왔답니다. 아버님, 저와 교대를 하시지요?"
"아니다. 견딜만 하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는지 모르게 노인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혼자서 덕배 엄마를 업고 왔다. 진우는 아예 턱도 없겠지만 덕배라 해도 그렇게 먼 곳에서 쉬지 않고 오기는 불가능하리라. 진우는 노인의 나이를 생각할 때 경이롭기까지 했다. 진우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깐 다음 덕배 엄마를 부축해 눕혔다. 덕배 엄마의 상태는 오늘 아침에 마당을 서성이던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방바닥을 짚어 본 진우가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방바닥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것이다.
"진우야, 잠시 들어오너라."
덕배 아버지의 음성에 진우가 급히 부엌에서 나왔다. 그때 덕배가 마당으로 성큼 들어섰다. 덕배는 진우의 어깨를 툭 친 다음 곧바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진우도 들어와 윗 목에 꿇어앉았다.
"어머이, 괜찮아요? 아, 거긴 뭐하러 가시고 그래요?"
"덕배 왔구나. 내 마지막으로 네 아버지를 도와 드릴려고 그랬지. 어차피 갈 몸인데..."
"먼 말씀을...가시다니? 아직 할 일이 태산인데 가시긴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덕배는 제 엄마에게 말을 하면서 눈은 아버지인 곽순도를 향해 있었다. 굳게 입을 다문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틀렸다는 뜻이었다.
"진우도 거기 있느냐?"
덕배 엄마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예, 어머님, 여기 있습니다."
"음 내 너희들이 서로 손을 마주 잡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주겠느냐?"
"물론 입니다, 자, 보세요, 우린 언제나 손을 마주잡고 있습니다."
덕배 엄마는 이미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볼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덕배 아버지, 평생토록 폐만 끼치고....오랜 세월,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덕배 엄마의 입가에 히미한 웃음의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덕배 엄마의 머리가 가만히 베게로 향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덕배의 눈빛이 흐려졌다. 이어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덕배 아버지가 손끝을 망자의 코끝에 대었다가 떼었다. 그리고 이불자락을 망자의 얼굴 위로 덮었다.
"너희들은 윗방으로 가거라. 여긴 내가 있으마. 어서."
"아버지가 쉬세요. 제가 지키지요."
"저도 있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덕배가 나서자 진우도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흘리며 남기를 자청했다.
"아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니라. 너희들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노인의 완강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진우와 덕배는 윗방으로 밀렸다. 그날 밤은 태어난 이 후 세상 어느날 보다 긴 밤이었을 것이다. 덕배와 진우가 기도하듯 꼬박 앉아 밤을 새웠다. 여명이 밝아 올 무렵이었다. 진우가 덕배의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너의 아버지와 교대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얼마나 피곤하시겠냐?"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넌 여기 있어라 내가 가서 말씀을 드려 볼 테니."
안방으로 건너간 덕배가 금세 윗방 문을 벌컥 열었다.
"야, 이리 좀 와라. 아버지도 따라가신 것 같다."
"뭐? 이거 무슨 소릴?"
진우가 안방으로 급히 건너갔을 때 덕배 아버지는 어젯 밤과 마찬가지로 결과부좌의 자세 그대로였다. 앉은 자세로 세상을 뜬 것이다. 진우는 기가 막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나도 모르지. 허지만 아버지는 작심을 하신 것 같아. 여길 봐."
덕배가 가르키는 곳에는 두 통의 편지가 있었다. 겉봉에는 덕배와 진우의 이름이 써 있었다. 둘이 동시에 속을 꺼냈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회자정리이니 이별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과 우애 있게 일생을 보내다 오라는 것, 바르게 살라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앞의 개 무덤에 원무현의 돈이 묻혀 있다는 것, 그리고 광산은 충분한 은맥을 확인하고 마련한 것이니 개발을 하라는 말이었다. 끝으로 덕배의 편지 끝머리에 스승의 엽총을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이었다. 둘은 서둘러 노인을 자리에 눕혔다.
"아, 큰 분이 가셨구나."
진우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아버지이."
덕배는 오열하고 있었다. 진우의 가슴에도 말 못할 슬픔이 쌓였다. 진우는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다. 별빛이 히미하게 사그라들고 검은 산 그림자 위에 붉으스름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제 곧 밝은 태양이 힘차게 솟아오를 것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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