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우와 장철규가 황톳 방으로 가는 덕배와 미자를 향해 의미 있는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시간에 사북 오거리로 진입하는 차들이 있었다. 정팔봉과 강철만이 탄 차였다.
"중대장님, 저리로 들어갔습니다."
입구에서 진우가 들어간 곳을 감시하던 두 예비역 대원이 달려와 이층을 가리켰다. 그들은 제각기 덕배의 사무실 앞까지 차를 몰아 세웠다. 정팔봉과 강철만이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요. 이 쪽으로 오시지요."
칠수가 그들을 탁자로 안내하자 정팔봉과 강철만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사방을 돌아볼 뿐이었다.
"아니 안 보이잖아? 이놈이 그새 또 어디로 샌 거야?"
정팔봉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강철만을 돌아보았다.
"글쎄 말입니다. 이리로 들어가는 걸 우리대원이 분명히 봤다는데 말입니다."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때마침 들어선 만기가 물었다.
"사십여 분 전에 이곳에 이진우란 사람이 왔었지요?"
강철만이 스마트 폰으로 이진우의 사진을 들이밀며 물었다.
"못 보던 사람인데요. 야, 칠수 너도 봐봐. 너 이사람 본 적 있냐?"
"어? 이사람, 아까 왔던 사람이네. 대출 상담하러 왔었지."
"아, 그래요? 그래서요?"
강철만이 정팔봉을 대신해 급히 물었다.
"돌려보냈지요. 담보물이 시원찮았거든요."
"아니, 정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던데 어디로 나갔단 말이요?"
"나가는 문이 거기 뿐입니까? 뒷문도 있지요. 그 사람이 그리로 나가길 원하더군요."
"아, 미꾸라지 같은 그놈이 눈치를 챗구나. 이런 낭패가 있나."
정팔봉은 목줄이 터져 발밑까지 끌어 당겼던 고기를 놓친 낚싯꾼처럼 발을 굴렀다.
그 시간에 정팔봉의 손아귀를 벗어난 미꾸라지 이진우는 상구의 택시에서 내려 산을 향해 걷고 있었다. 뛰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빨리 걸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또, 그럴 힘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덕배가 사라진 후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보낸 시간이 벌써 닷새째 아닌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어디까지가 최선이란 말인가? 게다가 거의 정순복의 아버지가 틀림없을 스포츠머리는 왜 나를 쫓아다닐까? 이미 순복과는 서로 미련이 남아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진우가 컨테이너에 도착하자말자 자리에 벌렁 들어누웠다. 이유없이 전신이 피곤하고 나른했다. 더 알아 볼 곳이 없다는 것은 긴장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었다. 며칠 동안의 긴장의 끈이 끊어져 몸과 마음이 허물어진 듯했다. 초조하고 불안했던 감정도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 애쓰던 것도 다 사라져 마음이 오히려 평온했다. 진우는 멀거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정오가 되자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식당 안은 만원이었다. 그러나 신동규가 예약한 이층의 밀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은 이미 반쯤 차려져 있었고 윤치우와 신동규는 미리와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지방 검사와 경찰 서장이었다.
"어서 오게. 점심시간을 딱 맞추는 걸 보니 역시 김검사 답구만. 암, 나랏 일엔 그래야지. 국민의 공복인데..."
윤치우의 너스레에 김 검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윤치우의 앞자리에 앉았다. 서장도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건 다음 고개를 숙여 대강 인사를 대신하고 김 검사 옆에 앉았다. 윤치우는 김검사와 서장에게 신동규를 소개했다.
"젊은 사업가이니만큼 두분이 신사장을 지켜 봐 주시리라 믿어요. 신사장도 두분을 잘 받들어 모시라구. 허헛."
"원, 선배님도, 신사장 문제라면 저희측에서도 조사를 할 만큼 해 두었습니다. 조금은 위태위태한 면이 있더군요. 허나 선배님의 청도 있고 해서 지켜만 보고 있지요."
김 검사가 신동규가 들으라는 듯 은근히 압박을 가해 왔다. 신동규가 재빨리 나섰다.
"너그러이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일이 끝나면 제가 다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젊은 사람이 인사성은 밝구만. 어쨋던 오늘 작전은 염려 마시게."
젊은 검사에 가려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던 서장이 신동규를 칭찬하며 한편, 현장을 지휘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가만히 열리더니 음식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불판이 열리고 가스불이 켜지자 커다란 은빛 냄비에 대구탕이 뽀르르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이미 주방에서 반은 익힌 것이다.
"겨울엔 역시 이놈이 뜨끈하면서 시원해서 좋아요. 허허."
윤치우가 성급히 식탁으로 다가 앉았다.
"작전 시간은 변경이 없는 거지요?"
신동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윤치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저 검거 책임자인 서장께 물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친구에게 이번 작전에 대해 궁금한 모양인데 서장이 설명을 해 주시지요?"
"그러지요, 허나 뭐 설명이랄 것도 없어요. 전경 일 개 중대와 형사대를 열 시에 산 아래에 대기시켰다가 영시를 기점으로 일제히 치고 들어가 모조리 검거하겠다는 작전이니까요. 무기도 없는 그들을 기동 타격대까지 동원했다가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곤란하거든요. 무조건 전원 무혈 체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가 놈들이 낌새를 알고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지요?"
"그럼, 열 한 시까지 싸이렌 없이 은밀하게 집결하는 걸로 하지요."
신동규는 마음속으로 자신들이 김기동을 먼저 덮치고 빠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현장을 덮치면 금새 아수라장이 될 테니 산 아래 길은 자동차와 사람이 서로 엉켜 꼼짝 못 하리라. 그러니 현장이 수습될 때까지 자기들 패는 모두 윗 쪽의 은광으로 숨을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한 시간이면 넉넉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행동을 취할 일이었다.
"좋은 작전 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다시피 저희 캐시콜 뱅크의 직원을 사칭한 그런 불법 도박판은 박멸을 시켜야 옳거든요."
"어이 신사장, 캐시콜에서 그 사업을 접은 것은 우리 쪽에서도 확인한 바요. 허헛"
김검사가 다시금 신동규의 속을 빤히 들여다 본 듯 헛웃음을 웃었다.
오후 네시가 되자 하우스에선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다. 부엉이가 마이크를 잡고 이제 막 첫 판에 접어든 게임에 열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김기동은 오늘 들어 온 꾼들의 숫자를 보고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천태종과 함께 하우스를 나왔다.
"일찌감치들 몰려드는군. 태종이,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이미 형님차 뒷좌석 밑에 30억 정도 넣어놨습니다."
"그건 나도 알어 내 말은 지금 풀어 놓은 게임 자금까지를 말하는거야. 그것마저 쓸어가야 할 것 아니냔 말야."
"물론이지요. 현재 하우스에서 40억이 돌아가고 있으니 세벽 세 시경에 게임을 끝내는 걸로 하고 애들 시켜 입고하는 형식을 취하지요?"
"다른 날 보다 일찍 끝내면 눈치가 보이잖아?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는 게 좋아. 괜히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면 곤란 해."
"그럼 우린 몇시쯤에 가지요?"
"우린 다섯 시쯤 슬그머니 뜨자고. 알았지?"
"그러지요. 헌데 눈치를보니 부엉이가 우리들 행동을 은근히 감시하는 눈치던데요?"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어. 허지만 그놈은 제 마누라에겐 약한 놈이니까 오늘도 모텔로 가서 자겠지. 낮엔 종일 잘 테니까 그 사이에 우리는 공항까지만 도착하면 돼. 달러 환전에서 운반까지 우리를 도울 놈들이 기다릴 테니까. 그러나 만약 부엉이가 모텔로 안가고 남아 있으면 까짓 거 네가 놈을 없애버려."
"제가요?"
"왜? 겁나냐? 부엉이가 눈치를 채서 덤비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하지만 그럴 일이야 있겠냐?'
천태종은 환전상의 탑 차 옆에 세워 둔 에쿠스의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좌석을 뒤로 재껴 잠이 들었던 천태종의 심복 두 놈이 비비시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밖에 사장과 과장이 온 것을 알자 금세 문을 열고 나왔다.
"수고 했다. 가서 일찌감치 저녁들 먹어라. 그리고 이제부터 바쁠 테니 하우스를 도와 줘라."
"예, 사장님."
두 놈이 사라지자 천태종은 조수석으로, 김기동은 뒷 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형님. 이 차를 환전상 차 옆에다 붙여두기를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공짜로 무장 경호를 받는 꼴 아닙니까?"
"그러라고 처음부터 여기다 둔 것 아니냐. 허지만 환전상 놈들도 조심해야 할 놈들이야. 저놈들은 돈이 된다면 짱꿰에게 제 애미라도 팔 놈들이거든. 그러니 거금이 여기 있다는 걸 절대 모르게 해야 돼. 허긴 그것도 오늘이면 끝이다만..."
"지금까지 잘했으니 걱정마십시요.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잖습니까?"
"그래야겠지. 그래야 야자수 그늘 아래 누워 늘씬한 애들의 서비스를 받을 것 아니냐."
"카아, 생각만 해도 죽이네요. 형님."
"좋아하긴 일러. 마지막까지 눈에 불을 키란 말야. 저 타짜 놈들이 우리에게 당하는 걸 보라고. 그놈들도 아차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당하는 것 아니겠냐?"
"맞습니다. 형님, 어찌보면 좀 불쌍하군요."
"무슨 소리.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 망하는 놈이 있으면 우리처럼 흥하는 인생도 있게 마련인 거지."
김기동과 천태종이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 일곱시에 게임에 참가해 소액 배팅으로 판세 읽기에 여념이 없던 윤치우는 불과 반시간도 되기 전에 오륙천을 잃었다. 판이 크지 않아서인지 시간이 일러서인지 딜러가 아직은 공정한 게임을 운영해서일 것이었다. 윤치우는 이제부터는 판이 커질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최소 배팅으로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딜러와 플레이어 양 쪽의 바구니 중에 어느 쪽에 더 많은 돈이 배팅되는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꾼들과 구경꾼의 열기가 고조 되어가고 있었다. 윤치우는 좌우의 꾼들을 돌아보았다. 우선 바로 옆자리에 있는 젊은 놈들은 아까부터 배팅은 하지 않고 딜러의 손놀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얼핏 보아도 수억은 됨직한 돈이 쌓여 있었다. 백여 명의 꾼들이 저마다 배팅에 여념이 없건만 그들은 때를 기다리는지 꿈쩍도 않는 것이다. 그때 이제껏 꿈쩍 않던 놈들 셋이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나기에 윤치우의 눈도 자동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사십 대의 남자와 서른이 갓 넘었을 남녀 한 쌍이 젊은 놈들이 앉았던 자리를 꿰 차고 앉는 것이다. 물러난 젊은 놈들은 방금 앉은 사람들을 호위하듯 뒤에 섰다. 한 두 게임을 지켜보던 옆자리의 여자가 조금씩 배팅을 시작하더니 점점 많은 액수의 돈이 오고갔다. 윤치우가 보고 있는 십여 분 사이에 그 여자 앞에 몇 뭉치의 돈을 더 쌓았던 것이다. 그러자 윤치우와 여자 사이에 끼여 있던 빠짝 마른 젊은 놈이 슬그머니 일어나 구경꾼 뒤로 빠지더니 곧장 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예, 형님, 형님 말씀대로 미자가 잘 하고 있습니다. 십여 분만에 이억쯤 땃습니다."
"음, 내가 봐도 대략 그쯤 되더군. 총 밑천이 10억쯤 되었으니 이제부턴 배팅을 최소로 줄여. 연속해서 따기만 하면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소액을 여러번 잃었다 한번에 보충하는 식으로 판이 커질 때를 기다리라고. 유회장하고 철규 넌 배팅 액을 조금 더 줄여야 겠더라. 계속 잃고 있잖아?"
"그건 미자만 따라 배팅하기도 뭐 그렇고 해서 그런겁니다. 허지만 잃은 건 없어요. 잃은 건 소액 배팅 때지요. 오히려 밑천이 조금 늘었거든요. 이만 자리로 돌아갑니다."
덕배와 통화를 끝낸 장철규는 다시 미자 옆자리로 돌아 왔다.
윤치우가 눈을 빛내며 빨강과 파랑 중에 어느 쪽 바구니에 배팅이 많은지 마음속으로 세고 있는 그 시간에 동강 둔치 옆에 있는 영월의 유일한 찜질방에는 정팔봉과 그가 데려온 직원들이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제각기 자리에 눕거나 음료수를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어디로 가신겨?"
"저기서 전화하고 계시잖여?"
"그렇군. 헌데 태백지구의 전우회까지 끌여들였는 데도 사위를 못 찾았으니 내일은 우리도 철수를 할 테지?"
"그렇겠지. 헌데 사윈가 하는 그 녀석은 왜 도망을 친 거야? 사장 딸을 언젠가 한 번 봤는데 그정도면 수수하더구만..."
"노랭이 장인에게 질렸겠지. 사장이 짜다는 건 증평 바닥이 다 아는 것 아니여?"
"아, 증평 뿐이여? 이웃 청주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그때 두 젊은 직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옆자리의 사내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듣자하니 못할 소리가 없군. 사장이 아무리 짜도 우리 월급 갖구 짜게 놀더냐? 사장이 아무리 노랭이래도 월급 한 번 밀린 적이 있냐구? 짜아식들이 배가 불러서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봐. 지금 회사 형편이 백여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릴 형편인 줄 아냐? 너희들도 알다시피 막걸리에서 청주 공장으로 전환할 때 자금 때문에 사장이 얼마나 애 먹었었냐? 그런데도 우리에겐 내색 한 번 안 했잖아? 눈치가 그때 아끼던 땅도 좀 팔았나보던데... 양은그릇 공장도 요즘 애를 먹나보더라. 우산 공장도 그렇고. 허긴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양은 냄비를 쓰겠냐만, 그래도 그 공장 직원을 한 명도 해고를 안 시켰다잖아? 그런데도 사장을 짜다고 놀리면 되냐?"
"에이, 놀리긴요? 사장님이 우리 해병 출신을 끔찍히 생각한다는 건 증평 바닥이다 아는 사실인데유."
"아, 증평 뿐이여? 이웃 청주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어디서 킥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길게 설교를 늘어놓던 사내도 빙긋 웃었다. 그때 정팔봉 사장의 목소리가 전 직원의 귀에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놈을 찾아서 끌고 갈 테니까 걱정을 말라니까. 엉? 뭐라고? 말짜? 말자가 누구야? 뭐? 순복이 친구? 알았어. 끊어."
말자는 그 시간에 덕숙이와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전쟁터 같은 저녁 시간이 끝나 이제야 좀 한가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설겆이 까지 끝내고 나니까 꼭 방학숙제를 끝낸 것 같잖냐?"
"누가 아니래? 하루에 두번만 이러면 몸뚱이가 남아나질 않겠어."
"그러게, 헌데, 요 기집앤 또 어디로 샛을까?"
"수미? 상금에 눈이 완전히 멀었나보더라. 오늘은 종일 이진운가 하는 순복이 신랑이 어디 있나 고거만 찾는 눈치던데? 걘 순복이가 애를 낳았다는 소리를 듣고나서부터는 사람이 완전히 변한 것 같더라, 얘. 참, 네가 순복이에게 전화했단 얘기를 수미에게 했다며? 그 얘긴 뭣하러 했니? 가득이나 순복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 애한테...”
"그게 어때서? 사실 순복이가 안됬잖아? 그래서 애기 아빠가 여기 왔었다고 알려 준 게 뭐가 나빠? 그걸 고깝게 생각하는 수미가 나쁜 거지. 난 할 일을 한 거라고."
"하여간 말자 넌 되도록 수미 앞에서 순복이 얘긴 하지 마. 걔는 순복이라면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고야 말 앤 건 너도 잘 알잖아. 적어도 이 하우스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응?"
"알았어. 사실 돈만 아니면 수미를 상대 안 했어야 하는데 돈이 뭔지. 젠장."
"그건 그래. 그건 나도 젠장이니까. 호호."
잠에서 깬 후에도 진우는 불도 켜지 않은 추운 컨테이너 안에서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몇 시나 되었는지도 몰랐다.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지만 배고픈 것도 몰랐다. 다만 하루가 다 가도록 덕배의 실종에 대해 자신이 취해야 할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데 절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절망해 있는 동안 노인인 덕배 아버지의 절망감은 또 어떨 것인가? 바로 그 순간 진우는 가슴이 뜨끔했다. 덕배 엄마가 오늘 따라 유언하 듯 한 말이 생각 난 것이다. 덕배와 사이좋게 지낼 것을 부탁하고 이젠 약도 소용없고 삭정이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뭔가 불길한 예감이 와락 머리를 스쳤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노인들의 안위를 알아야 했다. 책상 위를 더듬어 랜턴을 찾아 쥔 진우는 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만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두 분 노인들의 미소띈 인자한 얼굴만 떠오를 뿐이었다. 진우가 덕배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을 땐 방안의 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진우가 가벼운 인기척을 냈지만 보통 때 같으면 금방 내다보았을 잠귀 밝은 노인이 기척이 없었다. 진우는 랜턴을 켜 댓돌 위를 보았다. 두분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와락 이상한 생각이 든 진우는 큰소리로 덕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님, 아버님 안에 계십니까?"
방안은 조용했다. 와락 문을 열었다. 불빛에 비친 방안은 이불도 펴 있질 않았다. 오히려 방안이 가지런히 정돈된 것도 같았다. 이건 또 무슨 변고인가? 털썩 마루에 주저앉은 진우는 또 한 번 망연자실했다. 그러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놈들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노인의 말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노인은 직접 하우스로 갔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우스로 가면서 덕배 엄마와 동행했다는 건 믿기 어려운 문제였다. 앗차, 병자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노인이 어쩌면 덕배 엄마를 업고라도 갔을 수도 있을 터였다. 진우는 자신이 덕배 아버지를 대신해 집에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 몹시 원통했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마루에서 벌떡 일어난 진우는 다시 어두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분이 어떻게 그 먼길을 덕배 엄마까지 업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좀 더 빨리 뛰면 중간에서 만날지도 몰랐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했다. 달리면서도 제발 이길로 가지 않고 산 아래까지 택시를 불러 타고 가셨기를 바랐다. 뛰면서 길을 비추는 랜턴 불빛이 춤을 추었다. 빛줄기가 하늘로 향했다 땅으로 향했다 해서 오히려 눈만 어지러웠다. 손에 쥐고 있는 것조차 부담 스러움을 느낀 진우는 랜턴을 아예 바닥에 던저버렸다. 그리고 더욱 속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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