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이었다.
"그래, 걔들이 널 만나자는 이유가 겨우 그거였어?"
"예. 하지만 형님, 막상 놈들을 만나고보니 겨우가 아니던데요?"
"겨우가 아니라니? 애새끼 하나 잡아다 달라고 했다며? 그런 일이야 양아치 애들을 쓰거나 조선족을 쓰면 한 장도 안들 일이잖어?"
"그놈들이 그걸 몰라서 우리에게 돈을 들이겠습니까? 큰거 석 장을 주겠다는 걸 보면 상대가 그만큼 거물이란 얘기 아닙니까?"
"뭐야? 석 장? 정말 석 장이란 말이지? 죽이지 않고 잡아서 갖다주기만 해도 3억을 주겠단 말이지?"
잔뜩 입맛이 당긴 찐드기 유명우가 담배를 물고 탁자 위의 두발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았던 장철규가 길게 팔을 뻗어 라이터를 내 밀었다.
"도대체 잡으려는 놈이 누구래?"
"실행 전날 아르켜 준다니 알 수 없지요. 허지만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응? 뭐가?"
"나를 만나기 위해 몇 다리를 거쳐 소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순 거짓말이란 겁니다. 소개를 했다는 마지막 인물이 바로 조갑주였거던요."
"뭐라구? 갑주? 그 자식은 지난달에 죽었잖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만난 놈은 한국인이 아니란 겁니다."
찐드기는 탁자 위에 올렸던 발을 급히 내려 상체를 장철규 쪽으로 기울였다.
"그럼? 짱궤란 말이야?"
"원 형님도, 맨날 짱궤나 조선족만 보시더니 이젠 삼합회까지 나타난 줄 아십니까? 그놈들이라면 왜 우리 조직에게 손을 내 밀겠습니까?"
"그럼 야쿠자 애들이란 말이야?"
"잘 보셨습니다. 제가 만난 놈이 우리말은 기가 막히게 하는데 그 분위기가 아무래도 일본 애 같더란 말입니다."
"그렇군. 국내에 야쿠자가 손 볼 놈이 있는 게로군.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조직은 야쿠자 말고 없잖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확답을 안 했습니다. 형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하려구요. 형님 어떡할 까요?"
찐드기 유명우는 담배를 재떨이에 천천히 비벼 끄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장철규를 건너 봤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지금 야쿠자와 손을 잡거나 그 자금을 끌어다 쓰는 국내의 조직은 모두 세 군데 아니냐? 그 중에 한 조직에서 야쿠자의 돈을 떼먹은 놈이 있나보다."
"설사 그렇더라도 야쿠자 애들이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일을 그렇게 크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또 야쿠자 돈을 먹고 튈 멍청한 조직도 없고 말입니다."
"그럼 우리를 시켜 또 다른 조직의 야쿠자를 처치하자는 걸까?"
"그런 것도 아닐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니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말한 찐드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찐드기는 그 일은 장철규에게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잘 판단해서 해. 3억이면 우선 캐시콜에서 빌린 자금의 일부는 갚을 수 있어 좋긴하다만...헌데 이돈 저돈 다 긁어모아 인수한 건설사는 왜 여태 그 모양이야? 아직까지 일원 한 푼 수익을 못 내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기에 제가 덕팔이를 대표로 내 세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건설사엔 그런 저돌적인 놈이 낫다구요."
"난 한창수가 배운 놈이라 좀 나을까 해서 앉혔지. 헌데 지금 보니 네 말이 맞았어."
"그럼 제 일은 형님이 허락하신 걸로 알고 맡겠다는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이삼 일이면 끝날 일이 잖어?"
"상대를 아르켜주면 거기에 맞는 작전을 짜야 하고 또 현장에 투입할 사람을 찾아야 하니 아마 사오 일 걸릴 겁니다."
"그래. 너라면 빈틈없이 하겠지. 허지만 몸조심하는 건 잊지 말어라."
"예, 형님."
장철규는 찐드기의 방을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 일을 맡겠다는 의사를 상대에게 전했다.
역시 하우스를 개장한 지 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수미는 아침부터 줄곳 웃는 얼굴이었다. 대강이나마 지난 이틀간 수입을 따져보니 이런 식이라면 끝날 때쯤이면 각자 천만 원 이상을 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대의 밥 차에서 나온 매출에서 재료비를 뺀 수익을 덕숙이 부부와 말자 부부 그리고 수미가 똑같이 나누기로 했었다. 수미는 사업을 제공한 대신 일은 하지 않았다. 허기야 수미가 하겠다고 해도 워낙 음식 솜씨가 잼병인 걸 다들 아는지라 시켜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신 수미는 눈웃음을 치며 손님을 끌었다. 어쨋던 앞으로도 계속 이렇기만 하다면 단 이 주만에 천만 원이 어디인가 말이다. 혼자서 늦은 아침을 먹은 수미가 재료 다듬기에 여념이 없는 덕숙이와 말자 곁으로 커피를 쟁반에 받혀 갖고왔다.
"어머, 도와주려고 했더니 벌써 끝나가잖아?"
"기집애, 늦게 나온게 미안하면 그냥 미안하다고 해."
"호홋, 기집애두 이럴 땐 그냥 넘어가면 어디 탈나니?"
"탈? 얘, 탈은 이미 났어. 내 입술 부르튼 것 좀 봐. 얼마나 피곤하면 이렇겠니?"
말자가 손에 쥐고 있던 칼끝으로 자신의 입을 가르키며 그래도 눈은 웃고 있었다.
"얘,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제 같으면 정말 몸살 나 죽을 것 같더라."
재빠른 솜씨로 댓가지에 어묵을 꿰던 덕숙이도 머리를 뒤로 젖히며 정말 죽는 시늉을 했다. 개장 첫날엔 형편없는 수입에 실망이 컸으나 다음날인 어제는 대박을 친 것이다. 어제의 매상은 과연 놀라웠다. 그만큼 하우스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 것이다.
"어머머, 너흰 신랑이 다 해놓은 걸 퍼내기만 했으면서 무슨 죽는 소리니?"
수미가 마시던 커피 잔을 쟁반에 소리나게 놓으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머, 수미 쟤 말하는 것 봐. 온종일 뜨거운 설렁탕을 수백 그릇이나 퍼 담는 일은 쉬운 것 같니? 너도 왠종일 서서 나처럼 해 봐. 그럼 넌 아마 죽는다고 드러누울 걸?"
"맞아. 쟨 일을 안 하니까 저런 말이 나오는 거야. 단 하루만 해도 수미 넌 몸살로 입원을 할 거야."
말자의 말에 덕숙이까지 거들고 나오자 수미가 깔깔 웃으며 다시 나섰다.
"너희들 눈엔 내가 노는 것 같아도 생각들 해 보라구. 손님을 이리 몰고오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야."
"기집애두.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러니까 매상이 그 정도 아니겠어?
말자가 갑자기 수미의 기분을 맞추려고 했다. 꼭 호객을 해서 손님이 몰렸겠는가? 배고픈 사람들이 스스로 밥 차로 몰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말이다. 허나 말자는 수미를 추겨주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기회에 아예 우리도 밥 차를 사서 네 신랑의 사업장을 이렇게 계속 따라다니면 얼마나 좋겠니? 그럼 이삼 년이면 아파트 한 채는 충분히 마련할 텐데 말이야."
덕숙이가 한숨을 쉬며 수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 말에 수미도 동의하는 듯 무릎을 두드리며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그이랑 십 년을 같이 살면서도 이런 돈벌이가 있다는 걸 여태 몰랐었지 뭐야? 진작 알았으면 잘난 척하는 순복이 그 기집애에게 돈 빌려 달란 소리도 안 했을 텐데 말이야."
"어머, 너 순복이에게 돈 빌려달란 적이 있니?"
말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미를 바라보았다.
"흥, 이미 작년 얘기야. 그때는 우리 신랑이 거기 들어가 있었거든. 그래서 돈이 떨어져 한창 고생할 때여서 할 수없이 순복이를 찾아 갔었지. 너희도 알다시피 동창 애들 중에 걔만큼 여유가 있을 사람이 없잖아? 그런데 그 기집애가 하는 말이 돈이 한 푼도 없다잖아? 부자로 소문난 집 딸이 돈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니? 한마디로 빌려주기 싫다는 거지 뭐야? 안 그래? 망할 기집애."
"어머, 그럼 그 때가 작년 언제쯤이니?"
"그러니까....년말 크리스마스 때 쯤일 걸? 왜? 언제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니?"
말자가 손에 들었던 파를 내려놓더니 한 걸음 다가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주위를 재빨리 돌아본 후 비밀을 말하듯 수미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얘, 너는 몰랐니? 순복이 걔가 애를 낳은 것 말이야."
"뭐? 어 언제 말이니?"
"어머, 너도 놀랬지? 그래서 걔네 집에서 생 난리가 났었나 보더라 얘."
"언제였냐고? 애를 낳은 게?"
다그치는 수미의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말자도 눈이 커졌다.
"어머 너 왜 그러니? 너 혹시 순복이에 대해서 아는 거라도 있니?"
"좌우간 순복이가 애를 낳은 게 언제인가 그것만 말 해."
"두어 달 전 쯤이야. 석달까진 안 되니까."
수미의 다그치는 말에 놀란 말자가 미쳐 입을 때지 못하자 옆에 있던 덕숙이가 재빨리 대답을 대신했다. 수미는 마음속으로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계산하고 말 것도 없이 대강 열 달을 빼니 지난해 12월이었다. 수미는 불현듯 취한 척 쇼를 부려 진우의 등에 업혔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쯤이었단 말이지....'
수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학원으로 찾아갔을 때 자신의 불운과 달리 순복은 마냥 행복해 보였었다. 돈을 빌리러 온 자신에게 자랑스레 남자친구까지 소개하던 순복이었다. 결국 그런 순복에게서 진우를 뺏음으로 조금은 복수를 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른 지금 아이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을 순복을 생각하면 완전한 자신의 패배였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재 역습을 당한 것이다. 수미는 또다시 자신도 알 수없는 질투심이 부르르 끓어올랐다.
"얘, 수미야 너 괜찮니? 갑자기 왜 그래?"
덕숙이 수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내가 어떻다고 그래? 순복이가 낳은 애 아빠를 내가 알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야."
"어머머, 정말? 그 남자를 네가 봤니? 어떻게 생겼데? 잘 생겼디?"
"남의 남자 잘생겨서 네가 뭐하려고?"
"호호호, 그건 그래. 저기 우리 신랑도 빼고 나서면 남에게 빠질 사람은 아니거든."
말자가 다듬던 파뿌리로 건너편 밥 차에서 삶은 고기를 썰고 있는 남편을 설핏 가르켰다. 마침 칼질을 멈춘 말자 남편이 힐끗 제 아내를 본 듯 칼로 도마를 탕탕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깟 거 얼마나 된다고 하루 종일 파만 다듬고 있을 거야? 아 얼른 못 가져 와?"
말자는 허둥대며 다듬어 놓은 파 소쿠리를 집어 들었다.
"예뻐서 내가 안아주고 싶다가도 저 성질내는 걸 보면 한대 콱 쥐어박고 싶다니까."
"킥, 우리 신랑은 쟤네 신랑이랑 완전히 반대라니까..."
덕숙이가 밥 차 위의 제 남편을 힐금 힐금 돌아보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덕숙이 남편은 눈이 작고 광대뼈가 불거져 얼핏보면 무섭게 생긴 못난이였다.
"그래도 우리 애는 얼마나 예쁘게 생겼다구...."
이제껏 한 번도 애를 낳아보지 못한 수미 옆에서 덕숙이의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애들만 비교한다면 자기 아들이 말자의 아들보다 훨씬 잘생겼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이를 당다문 수미가 커피 쟁반을 들고 조용히 일어났다. 쟁반에는 마시지 않은 커피 두 잔과 수미가 마시다 만 커피가 모두 싸늘히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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