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형님, 온지 한 시간 밖에 안됐는데 벌써 가시게요?"
천태종이 출입구로 향하는 김기동의 뒤를 따르며 아쉬움을 나타내었다. 이제 막 슬롯머신에 몰입되려는 참인데 옆의 김기동이 먼저 일어나 마지못해 따라나온 것이다.
"한두 번쯤 당겨 봤으면 됐지 남의 장사에 내돈 보태 줄 일 있냐?"
"부엉이는 두고 갑니까?"
"전국구 물주들을 만난다니까 그냥 둬. 우리도 곧 시작해야 할 것 아니냐."
"부엉이가 데려온 기술자 말입니다. 그놈 솜씨가 어떤지 알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놈 솜씨 하나에 우리 운명이 걸린 꼴 아닙니까?"
"부엉이 솜씨도 쓸 만한 편인데 부엉이가 선생님으로 모시는 걸로 봐서 믿어도 되겠지. 그리고 솜씨에 따라 배당금이 달라지는데 제 놈도 쓸 만 한 놈으로 골라왔겠지. 넌 신경끄고 일이 시작되면 애들 단속이나 잘 하란 말이야."
둘은 로비로 내려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입구로 향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웬놈의 노름꾼들이 이렇게나 많은지...우리 하우스에 여기 오는 꾼들 반의반만 와도 단번에 부자가 되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핏, 야, 태종이, 저 사람들 주머니에 얼마씩 들었겠냐? 몇 만원 아니면 기껏해야 몇 백만 원 일 테지...그깟 코묻은 돈으로 언제 부자가 된다는 거야?"
"그럼, 하우스는.....?"
"네가 아직 그 방면에는 어둡구나. 하우스는 단판을 노리는 왕도박꾼들이 모이는 장소란 말이다. 최소 천 이상이 아니면 출입을 안 시켜. 그러니 동네 아줌마가 와도 몇 천은 갖고 덤빈다고. 단칼에 몇 억을 먹자면 몇 천은 기본 아니냐? "
나이트클럽의 만만치 않은 수입을 관리해 온 천태종이었지만 김기동이 말하는 액수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기야 술값과 노름판 돈의 단위가 같을 수가 없었다.
"아니? 차 안 불렀냐?"
밖으로 나왔으나 대기하고 있어야 할 자동차가 보이지 않자 못마땅한 듯 김기동이 천태종을 째려보았다. 그제서야 연락을 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 깜박 했습니다, 형님,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천태종이 휴대폰을 꺼내 오덕에게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오라구 해. 날씨도 좋은데 오랜만에 좀 걸어보게."
"예? 주차장까지 가려면 너무 먼데요?"
"주차장 말고 이 호텔이나 한바퀴 돌지. 아니면 연못을 둘러보던지. 넌 안 갈 거냐?"
"가, 가야지요. 곧 뒤따르겠습니다."
가을과 겨울의 문턱을 넘나들던 날씨가 오늘은 가을을 택한 듯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고왔다. 한 낮이라 햇살도 제법 따뜻했다. 이곳에 내려온 지 한달이 넘도록 매일 밀실에 박혀 계집과 술에 찌들었던 김기동에겐 더 없이 반가운 날씨였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늘인냥 코를 높이 쳐들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인도로 올라서 연못이 있는 호텔의 뒷쪽길을 걸어갔다. 옹벽이 낮게 둘러진 길을 따라 가는 사이 뒤에서 줄곧 통화를 하던 천태종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방금 연락이 왔는데요, 신사장 운전수는 징역 2년을 받았답니다."
"응? 누구 말이야?"
"아, 신사장 사고 났을 때 운전했던 하일이란 놈 말입니다."
"참, 그렇군, 헌데 조직에서 변호사를 대 주지 않았나보지? 2년씩이나 먹게?"
"글쎄요. 오늘 재판을 보러갔던 놈이 돌아오면 알아보겠습니다만 그래도 2년이면 양호한 것 아닐까요? 사람이 죽었는데요?"
"살인도 아닌 운전자 과실 아니냐? 피해자 측과 합의 봤겠다, 변호사를 샀으면 일 년 이상 썩게하진 않을 걸? 우리나라는 운전 과실이나 음주에는 관대한 편이거든....."
"어쨋든 완치도 안된 놈을 병원에서 기브스를 풀자말자 난짝 들어다 송치를 했다더군요. 그래도 재판은 신속하게 끝났으니 다행이지 뭡니까?"
"아, 그러고보니 오정철이랑 안순태도 기브스를 풀때가 됐단 얘기잖아?"
"원 형님도....풀때가 뭡니까? 지나도 한참 지났지요"
"그래? 가만, 그 문제는 이따 밤에 신사장과 통화를 해본 다음에 결정해야겠구먼."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자식들 노는 꼴이 진작부터 수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아, 그까짓 철창이야 나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수를 쓰든 여태 못 나왔겠습니까? 그놈들이 누굽니까? 오정철과 안순태 아닙니까? 그런 놈들이....어찌 저렇게 조용하게 있는지 그게 안 수상하단 말입니까?"
"하핫하, 난 또 무슨 얘기라고..."
천태종의 말에 김기동은 유쾌하다는 듯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아니, 형님, 왜 웃습니까? 내 말이 틀립니까?"
"아냐. 너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걸 보니 기뻐서 그래."
"예?"
"네가 잘 봤다고. 내가 처음 오정철을 가둘 때부터 창살 믿고 가뒀겠냐? 신사장 명령에는 꼼짝 못하는 그놈들 복종심을 믿고서지. 걔들은 못 나오는 게 아니라 안 나오고 있는 거라고. 나름대로 의리와 믿음이 있어서란 말이야. 신사장만 해도 걔들을 가두고 싶어 가뒀겠어? 물론 거짓말한 괴씸죄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꿍꿍이가 또 있는 것 같아. 틀림없어."
"글쎄요. 버린 놈들이 아닐까요?"
"헛, 잘 나가다가 삼천포라더니 넌 어째 그 모양이냐? 제 손발을 자를 미친놈이 어디 있어? 너라면 네 손발 자르고 지팽이 짚을래?"
김기동이 고리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히자 천태종은 단번에 기가 죽었다. 듣고보니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연못은 운암정 가는 길옆에 있었다. 앞 쪽에 운암정의 검은 기와 지붕이 보였다. 마침 오른 쪽으로 연못이 보이자 그들은 주차장인 듯한 공터로 질러가기로 했다. 그곳엔 호텔과 카지노에서 나온 재활용품과 폐기물이 제멋대로 쌓였고 뒷 쪽으로는 몇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아니, 형님, 저기 부엉이 최태식이 아닙니까?"
한발 앞섰던 천태종이 힐긋 김기동을 돌아보며 뇌까렸다.
"음? "
천태종의 말대로 주차된 차들 사이에 부엉이가 웬 젊은 여자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둘은 무엇때문인지 가볍게 다투고 있는 듯했다.
"왜 내려오고 지랄이냔 말야. 두 시 차로 올라가."
"안 갈거야.. 아니, 못 가."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이게 그냥, 콱! 내가 오입질하러 왔냐? 너 먹여 살리겠다고 일하러 왔지."
부엉이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누가 뭐래?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 일을 하라고. 난 나대로 여기저기 구경 다닐 테니까."
"일 끝나자면 보름은 걸릴 텐데 보름이나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구경이야?"
"카지노 구경하지? 혹시 잭팟이 터질지 누가 알어? 걱정말어. 말썽 안 부릴게. 엉? 자기야. 어엉? 대전에 가봤자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단 말이야. 난 자기 옆에 있고 싶단 말이야."
"같이 있고 싶은 것 좋아하네. 날 감시하려고 이러는 줄 누가 모를줄 아냐?"
"그럼 남편이 바람피는 걸 감시 안할 여편네가 어디 있겠어? 허지만 지금은 아니야. 함께 있고 싶을 뿐이란 말이야. 응?"
"에이 썅,. 좋다 그 대신 있는 동안 잔소리로 내 신경은 긁지마라. 긁었다 하면 그날로 초상날 테니까. 약속 해."
"약속? 알았다니까. 약속 뿐이겠어? 호호."
들어보니 부엉이는 마누라와 사랑싸움을 하고 있던 거였다. 김기동이 자동차를 돌아 두 사람 가까이 다가가자 부엉이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 뒤통수를 긁었다.
"어이, 최태식씨, 물주들과 비즈네스를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부인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구먼. 일하는 기간엔 절대 한눈을 팔지 않는 우리들의 규칙을 깰 셈이야?"
"예? 아, 아닙니다. 바람이라뇨? 이 여자는 마누랍니다."
"그럴리가 있나. 자네 얼굴에 이런 미인이 부인일리 없어. 솔직히 말 해."
"정 정말이라니까요. 어이 수미야 인사 올려. 우리 사장님이셔."
김기동이 너스레를 치며 분위기를 잡자 수미가 입이 벌어져 김기동에게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했다. 김기동은 그런 수미를 못본 척 부엉이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부인이 카지노 구경을 하고 싶은가본데 자네가 좀 안내를 해 드리지 그래."
"아 아닙니다. 물주들을 섭외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 여편내가 불쑥 내려와서.....어쨋던 물주들과 얘기는 거의 끝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후에 끌고 오기루요. 물주들보다 오히려 우리쪽 기술자들이 배당 문제로..."
"어, 어, 스톱, 사업 얘기는 이따 일서네 업소에서 하기로 하고....점심들은 먹었나?"
"아뇨. 아직..."
"그럼 잘 되었군. 내가 살테니까 부인모시고 자네도 같이 식사나 하지. 어이 태종이 저기 운암정 어때? 괜찮게 하나?"
김기동이 천태종을 돌아보았으니 천태종은 자동차 뒤에서 전화기를 귀에대고 있었다. 그러나 눈길은 김기동에게 주고 있었으므로 눈치를 채고 재빨리 다가왔다.
"차는 이 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곧 올겁니다."
"그건 이따 얘기하고 다 같이 운암정으로 가자니까. 예약이 없어도 되지?"
"그럼요. 마침 저기 옵니다. 오덕이를 먼저 보내지요."
사고난 신사장의 에쿠스 대신 본사인 캐시콜뱅크에서 내려보낸 신품 에쿠스 한대가 길 옆에 서더니 거구의 오덕이가 내려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천태종이 마주 다가가 뭐라고 하자 몸무게 120kg인 오덕이 다시 운전석으로 들어가 차를 돌려 운암정으로 향했다. 운암장까지는 끽해야 7-80m 밖에 되지 않을 거리였다.
"가시지요, 형님?"
천태종은 방금 떠난 차를 바라보며 서있는 김기동을 재촉했다. 부엉이는 수미에게 눈을 찡긋한 뒤 우리도 뒤따라가자는 뜻으로 턱을 쳐들어 그들을 가르켰다.
"난 쟤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떠나는 차에서 눈을 뗀 김기동이 천태종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불쑥 말을 꺼냈다.
"예에? 저 오덕이 말입니까?"
"어, 그래, 오덕이 말이야. 저 무거운 몸으로 싸움이 될까 싶단 말이다. 싸움이란 몸이 가벼워 붕붕 날아 줘야지 저렇게 돼지처럼 살이 쩌서야, 원.....십여 년 전에 영등포에서 오정철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지금 생각해도 그게 진짜 싸움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오정철은 호리호리한 게 뼈다귀 밖에 없었지. 오정철이 혼자서 구찌파 애들 다섯을 깨부수는데 참 기가 막히게 싸우더군. 그것도 구찌파에서 알아주던 놈들을 말이야. 당시에 신사장이 그 싸움 한판으로 영등포를 먹었잖아."
김기동이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이 오정철인냥 주먹을 허공에 꽂는 시늉을 했다.
"저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때가 정철이 그놈의 전성기였지요. 지금은....."
"지금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이야? 오정철이 지금 몇 살인데? 너 보다 훨씬 아래잖아?"
"여섯 살 밑이지요. 헌데도 그 개자식이 말을 깝니다. 신사장 직속이라고 겁 대가리 없이...이 새끼를 이번에 확실하게 버릇을 고쳐 놔야지, 원."
"그러자면 저 오덕이 같은 체격으론 힘들 텐데?"
"아이 참, 형님도 그런 놈에겐 머리를 써야지요. 수틀리면 칼이 있고 칼로 안 되면 총이 있지 않습니까. 밑엣 놈 하나만 빵에 보내면 그걸로 끝인데요 뭐. 그리고 요즘 일반 사회에서는 주먹이 어디 필요 합니까? 뻑하면 법 타령 아닙니까. 슬쩍만 밀쳐도 폭력사범이 되는 세상에 때려주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놈들이 수두룩하단 말입니다. 병원에 드러누워 고소부터 하니까요. 그러면 막말로 좆되는 거지요"
"한석봉이 앞에서 붓장난 하냐?. 내가 누구냐? 경찰 경력 20년에 수사반장까지 해 본 나다. 그런 내가 그딴 걸 몰라서가 아니야. 아무리 법이 밝아도 이 세계에서는 주먹은 여전히 존재하고 또 필요한 거여. 너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도 모르냐?"
"원 형님도...그래서 저런 오덕이 같은 녀석이 필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 업소에서 말썽이 생기면 상황을 종료해야 장사를 계속할 것 아닙니까? 그럴 경우에 주먹으로 해결하겠다고 상대를 때리면 요즘은 열이면 열, 모두 경찰을 불러댑니다. 그렇게 되면 골치도 아프고 손해지요. 그래서 우린 그런 짓 안합니다. 오덕이 같은 덩치가 떡 하니 앞에 나서면 상황이 자동으로 종료 되니까요. 웬만한 놈은 오덕이가 뱃통으로 퉁 밀어내기도 전에 슬금슬금 알아서 사라지거던요."
오정철이고 나발이고 주먹시대는 이미 한물간 것은 왜 모르느냐는 듯 천태종이 신이나 자신의 배를 불쑥불쑥 내밀며 오덕의 흉내를 내었다.
"허긴 네 말도 맞다. 이 짓을 오래 해 먹자면 주먹보다 머리를 써야겠지."
"그럼요. 그래서 요즘은 어느 조직에서나 오덕이 같은 거구들이 빛을 보지요."
"맞다. 네 말이 맞어. 그래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배뿔뚝이들이 설쳐 대더만...낄낄.."
김기동과 천태종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수미와 나란히 걷든 부엉이 최태식은 조금 전부터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오정철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안순태의 이름까지 자동으로 떠올라서였다. 5년 전 영등포에서였다. 부엉이가 벌려놓은 불법 게임장에 오정철과 안순태가 쳐들어와 기계를 몽땅 때려부시고 직원들을 흠씬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그들의 관할 구역에서 허가 없이 영업했다는 거였다. 이때 부엉이는 건달들 끼리의 불문률을 깨고 경찰을 불렀던 것이다. 사실 부엉이는 신고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김기동 형사의 사주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엔 전국적으로 폭력사범을 일제단속하던 시기였다. 결국 자신의 불법 사행성 도박 혐의와 폭력배 오정철파의 소탕을 바꾼 셈이었다.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오정철과 안순태가 자신에게 앙심을 먹었을 것이 뻔했다. 어디서든 그들과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여태까지 지내왔는데 새삼 여기서 그 이름을 듣다니...
"과장님, 저 쪽입니다."
오덕이 종업원과 함께 마당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 오덕을 천태종이 소매를 슬며시 당겨 걸음을 멈추었다.
"김과장님을 앞으로 사장님이라고 불러. 요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말이야. 알어? 사업상 필요하니까 잊지 말고... 참, 너도 밥 달래서 먹어라."
"예, 형님, 아니 과장님,"
"쯧, 쓰벌놈, 그렇게 일렀건만 ...또 형님이래..."
일행이 자리를 잡자말자 쟁반을 든 종업원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슬금슬금 내려놓는 접시와 보시기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단하게 설렁탕이나 아니면 냉면에 고기나 좀 구워먹으려던 김기동의 생각을 오덕이란 놈이 무지하게 왜곡한 탓이었다. 반찬의 가짓 수가 얼추 40여 가지였다. 그리고도 매인이라 할 신선로가 또 들어오고 있었다. 밥과 국까지 들어온다면 놓일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머머머, 세상에, 어쩜, 대장금을 보는 것 같아."
제일 먼저 수미가 환호성을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소리를 들은 김기동은 속으로 '지랄, 대장금 좋아하네' 하고 생각했다.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으니 물릴 수도 없는 마당에 돈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던 것이다.
"모처럼 옛날 얼굴들이 다시 모였는데 이 정도는 쏴야지. 게다가 부엉이 아니 최태식이 부인께서도 오셨는데...."
어느새 수미는 핸드백에 넣어두었든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이 반찬 저 반찬의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란 후라이 아니면 두부구이요 있는 솜씨를 다 발휘해야 겨우 동그랑땡 정도의 음식 솜씨뿐인 수미에겐 환상적인 반찬이요 요리였다.
"음식 하나하나가 너무너무 예뻐요, 오늘 사장님 덕분에 친구들한테 자랑할 게 생겨 너무너무 좋구요."
수미가 진정 감탄한 얼굴로 너무너무를 남발하자 상석에 앉은 김기동이 '에라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하는 생각에 웃음 띈 얼굴이 되었다.
"별 말씀을....설마 부군께서....평소는 아니더라도 무슨 기념일에 이 정도의 서비스도 안 했을라고요?"
"어마마, 저이가요? 어림도 없어요. 저인 죽어도 짜장면 밖에 몰라요. 호호."
"아, 짜장이 어때서? 이건....때와 장소도 모르고설랑"
부엉이가 채면을 구겼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짐짓 쥐어박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수미는 냉큼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하는 시늉을 했다.
"자자, 부부 싸움도 좋지만 배도 고픈데 들자고....근데 밥은 안 주는 거야?"
곧이어 밥이 들어왔다. 갓 지은 밥이었다. 모두들 젓가락질이 바쁜 가운데서도 정작 배가 고프다던 김기동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고 있었다. 설치와 안전을 책임 질 천태종과 하우스의 운영과 기술을 책임질 부엉이였다. 김기동은 그런 그들을 나란히 앞에 두고 보니 양손에 돈 가방을 든 것 처럼 흐뭇했다. 이제 며칠 후면 거금이 굴러들기 시작할 터였다. 그런데 조금 전 부엉이가, 기술자들이 배당에 불만이 있어 재협상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까짓 거 좋다 이거야. 몫을 더 주겠다고 해야지. 허지만 결국 너희들은 십 원 한 장 구경 못할 것이다. 괘심한 놈 같으니...'
기술자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배당금을 더 먹으려는 부엉이의 수작인 걸 김기동은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하우스의 수입금을 삼, 삼, 삼, 일로 나누기로 한 약속을 깨려는 수작이 아니겠는가? 원래의 계약은 이랬다. 천태종과 그의 부하들이 30퍼센트를, 부엉이와 두명의 기술자가 30퍼센트, 총괄 기획자인 김기동이 30퍼센트를, 나머지 10퍼센트는 제반 경비로 쓰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엉이란 놈이 더 먹자고 덤비는 꼴을 보고 김기동은 계획을 약간 수정하기로 했다.
'이삼십 억만 들어온다면 ....아니 한 사오십 억만 ....아니지,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오랴. 못 먹어도 원무현이 만큼은 먹어야지'
원무현을 생각하자 불현듯 그놈이 감췄다는 50억 원이 머리 속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50억 원. 엄청난 액수였다. 그 돈만 있다면 이런 놈들과 실갱이조차 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 돈은 원무현이 어디에 숨겼을까? 형사 생활 20년의 경험과 느낌을 총동원해서 추리를 해봐도 있을 곳은 역시 두 곳 밖에 없었다. 원무현이 마지막으로 숨어 살던 집 주변과 아니면 가까운 패광 속일 터였다. 김기동은 내일 당장 석호란 놈을 앞세워 두곳을 다시 조사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돈을 찾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혼자 당첨된 로또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번 하우스에서 벌어들일 돈까지 합친다면? 김기동은 먹지 않아도 벌써 배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어머머, 사장님은 왜 안 드시고 바라만 보세요? 맛있어요. 어서 드세요."
이것저것을 맛보기 바쁘던 수미가 깔짝대기만 하던 김기동을 일깨웠다. 그제서야 김기동의 정신은 밥상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오늘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투(破鬪) 9. 끝의 시작(3) 컨테이너의 침입자 (0) | 2024.03.14 |
---|---|
파투(破鬪) 9. 끝의 시작(2) 꿩 사냥 (1) | 2024.03.14 |
파투(破鬪) 8. 은광의 침입자(3) 두개의 은광 (0) | 2024.03.13 |
파투(破鬪) 8. 은광의 침입자(2) 퍼즐 맞추기 (0) | 2024.03.13 |
파투(破鬪) 8. 은광의 침입자(1) 수상한 그림자 (0) | 2024.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