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이었다. 양구택은 엉성한 냄비 밥을 지어 대강 저녁밥을 먹은 후 태산이를 끌어내 투견장 옆 쇠 말뚝에 묶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태산이와 싸움을 할 개들을 차례로 개장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 다음 먼저 두 마리의 진돗개들을 투견장 안에다 풀어주었다. 그다음 도사를 진돗개들과 합쳤다.
도사가 들어오자 진돗개들은 단번에 이빨을 드러냈다. 도사도 마찬가지여서 들어가자 말자 싸울 준비를 갖추며 눈빛이 달라졌다. 두 견종이 앞발을 낮추어 싸울 태세를 하는데 양구택은 롯드 와일러를 또 집어넣었다.
그러자 진돗개들과 도사는 물론 방금 들어간 롯드 와일러까지 상황이 이상함을 알았는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느라 좌우를 둘러보기 바빴다. 갑자기 삼파전으로 변해 어떤 놈을 공격해야 하고 어떤 놈을 방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이다. 그러니 너 나 할 것 없이 제자리에 박혀 콧등에 주름을 지어 서로 노려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양구택은 철망 안으로 대망의 태산이를 밀어 넣었다. 태산이가 들어가자 먼저 문 가까이 있던 롯드 와일러가 깜짝 놀라 엉덩이를 땅에다 붙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좌우로 벌려서 삼사 미터 앞에 있던 도사와 진돗개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산이가 링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등 뒤의 철망으로 몸을 붙이고 태산이의 눈을 피해 고개를 팍, 숙이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겁 없는 개새끼들은 호랑이를 마주하고도 이빨을 들어내는 법인데 싸움이라면 이력이 난 개들이 호랑이 보다 덜 무서운 태산이를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의 자세를 취하니 말이다.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도전을 포기한다는 뜻이니 애초에 전의를 상실한 태도 아닌가?
이렇듯 네 마리의 개들이 일시에 기가 죽은 것은 상대가 워낙 큰 데다 상대를 무시하 듯 위풍당당한 자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태산이의 눈빛이 다른 개들과 다른 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개들이 구석에 처박혀 꼼짝을 하건 말건 태산이는 들어서자 마자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태산이는 한 번도 누구와 싸워보지 않고 자라서인지 모든 사람과 개들은 친구로 아는 듯했다.
예상치 않은 개들의 평화에 놀란 사람은 철망 밖의 양구택이었다. 이 게 뭔가? 도사나 진돗개들은 그렇다 쳐도 호랑이에게도 덤빌 놈이라고 큰소리 땅땅 치던 롯드 와일러는 대체 왜 이 꼴인가? 롯드 와일러 혼자 고군분투하면 외롭고 힘이 딸릴까 해서 응원군까지 넣어 줬는데 말이다. 양구택은 입 밖으로 개새끼를 연발하며 발을 굴렀다.
개새끼란 철망 안의 개새끼들을 말하는지 안양의 박철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양구택이었다. 양구택은 개들을 따로 묶어둘 생각도 없는 듯 문을 사슬로 묶어버리고 컨테이너로 돌아가 안양의 박철구를 호출했다.
"야, 철구, 네가 내게 이렇게 사기를 쳐도 되는 거냐?"
"뭐? 내가 무슨 사기를 쳐?"
"이게 사기가 아니면 오기냐? 너, 내게 무슨 감정이 있냐?"
"원, 무슨 말 인지나 알고 대답을 하게 해야지 옛날처럼 또 주먹부터 내 지르면 어쩌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 내게 주먹을 쥐게 하잖아?"
"야, 구택이, 너 지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내가 아직도 학생 때의 네 똘만이로 보이냐? 네놈 때문에 그 잘난 학교도 짤렸는데?"
"야, 임마. 그게 왜 내 탓이냐? 말은 바로 해. 나보다 먼저 교장 아들을 손 댄 건 너잖아? 내가 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주먹이 나간 건 너란 말이야. 그통에 내 이력서도 덩달아 고교 중퇴 아니냔 말이야."
"그래도 너는 그통에 권투라도 배웠지만 나는 곧장 우리 아버지 따라 개장사를 시작했으니 결국 네놈 따라다니다 내 신세가 이 꼴 났단 말이야. 쨔샤."
"지랄하네. 가만..... 그러니까, 개장사는 네가 선배라는 얘기 아니냐? 하지만 어쩌냐? 너도 알다시피 너의 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 밑에서 개장사 일을 배웠다는 것을 명심해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개장수로 빛나는 가문이란 말이다. 그러니 너도 개장수가 된 걸 우리 가문에 고맙게 생각해야지 안 그러냐?"
"빌어먹을 놈, 너, 아까 고단수에게 전화했었다며? 그래서 그놈에게 네 목숨을 맡겼다지? 잘 논다. 학교 다닐 때는 오야붕 노릇을 하다가 이젠 쫄병 고달수 밑으로 들어가냐? 역시 고달수 놈은 고단수로 노는 구만. 히힛."
"웃지 마, 짜샤. 살다가 보면 업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측(不可測) 한 불가항력(不可抗力)이란 것도 있는 거야."
"뭐? 불가죽? 개가죽이 아니고? 개장수 그만두더니 너 문자 많이 늘었다. 그래 너는 투견으로 업종을 변경한다면서 무슨 개를 훈련시키는지 내게도 비밀이냐? 내가 널 따라 할까 봐 그러냐? 아니면 너 혼자 다 해 처먹을려는 거냐?"
"가만, 그러고 보니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구나. 너 이 자식, 롯드 와일러가 뭐? 호랑이에게도 덤빌 놈이라고 했었지? 개새끼, 호랑이 좋아하네. 우리 개 앞에 갖다 놨더니 쥐약을 찾느라 정신이 없더구만."
"뭐? 개가 쥐약은 왜 찾아?"
"호랑이보다 무서운 상대와 싸우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고통이라도 덜 할까 싶었겠지. 너라도 그 처지면 미리 죽어서 오지 못한 걸 후회했을 것이다."
"이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야, 구택이, 너 여름 다 가고 더위 먹었냐? 헛소리가 너무 길잖아? 요점만 말해. 욧점이 대체 뭐냐고."
"야 임마, 이게 모두 네 탓이야. 네가 준 롯드 와일러가 도통 싸울 생각을 안 한단 말이야. 이게 무슨 조환지 알면 내게 말해 줘."
"아, 자식. 진작 그렇게 얘기했으면 전화 요금이라도 덜 나왔지. 네가 갖고 간 그놈은 투견 판에선 알아주던 놈이야. 한때는 경기도 참피언도 했거든."
"뭐야? 그런 놈이면 수백만 원은 받을 텐데 공짜로 내게 줬다고? 이런 순 된장도 안 바르고 거짓말로 쌈 싸먹을 놈을 봤나?"
"아, 그래서 내가 한때라고 하지 않았냐? 한때 모르냐? 한때? 너도 학교 다닐 때, 한때는 제법 왈왈 댔었잖아? 그것처럼 그 개도 한때는 잘 나갔었다는 얘기야. 물론 너처럼 그 개도 지금은 아니지. 그러니 내가 공짜로 줬지. 사실 장사하는 놈이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현 참피언을 선뜻 줄 수 있냐? 그나마 너와 나 사이니까 공짜로 준 건데 그걸 또 따지고 덤비냐?"
박철구의 말에 양구택은 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서로 간의 농담을 싹 빼더라도 양구택은 박철구에게 사실 할 말이 없는 몸이었다. 고등학생일 때 교장의 아들을 혼을 내자고 꼬드긴 것이 바로 양구택 자신이었던 것이다. 성급한 박철구의 손이 먼저 나간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롯드 와일러만 해도 팔면 못 받아도 기십만 원은 받을 수 있을 텐데도 선뜻 내줄 정도면 놈은 아직 옛정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놈을 무조건 매도하고 나서는 것은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왈칵 짜증이 나서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좀 했으면 해서 였지 꼭 박철구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네 마음을 모르겠냐. 하지만 투견이 싸워야 투견 아니냐? 너, 개싸움에 부전승(不戰勝)이란 말 들어나 봤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개를 봤냐고?"
"그딴 개새끼가 어딨어? 항복한다고 봐 줄 개는 있고?"
"그러게 하는 말 아니냐? 오죽하면 내가 너한테 전화를 했겠냐? 조금 전에 네게서 얻어 온 개 네 마리를 몽땅 링에다 쓸어 넣고 내 개를 풀어 넣었더니 네게서 갖고 온 놈들 모두 꼬리를 내리고 구석에 처박혀 꼼짝을 안 한단 말이다. 꼼짝이 뭐야? 오줌까지 질질 싸지 뭐냐? 이러니 이 조화가 무슨 조환지 투견으로 늙은 네 대가리 신세를 지는 수밖에 더 있냐?"
"내가 지금 무슨 전대미문의 희귀한 말씀을 듣는 건지 모르겠구나. 개가 개를 보고 오줌을 지린다? 투견 네 마리가 들어가면 호랑이도 오줌을 쌀 텐데? 야, 구택이 네 개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놈이란 말이냐?"
"그야 사람인 나야 모르지. 개끼리는 보는 눈이 있을 테지만."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인데 네가 훈련을 시키는 개가 무슨 종잔지는 몰라도 투견 네 마리와 싸움을 시킨단 말이냐? 도사와 롯드 와일러 두 마리면 전국 챔피언도 감당을 못할 텐데.... 게다가 덤으로 진돗개 두 마리를 추가 했단 말이냐?"
"그러니까 나도 왜 그런지 몰라서 진작에 개새끼들의 언어를 배워두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니까."
"지금이라도 개새끼 수화 학교에 다녀보지 그러냐? 없는 졸업장이라도 따게 말이야."
"야, 너 지금 네 일 아니라고 농담이 나오냐? 난 지금 미치겠구만. 야, 이럴 바엔 이 개새끼들을 당장 실어다 줄 테니까 보신탕용으로 팔아서 네 용돈에 보태 써라."
"야, 흥분하지 말아. 너 아직 내게 대답을 안 한 게 있어. 네가 갖고 있는 개의 종자가 뭐야? 숨기지 말고 말해. 투견 종자라면 뻔한 거 아니냐?"
"튀기야. 그냥 도사에 이것저것 섞인 튀기 일뿐이라고."
"이것저것 섞는 중에 사자와 호랑이 피도 섞였던 모양이군. 개들이 오줌을 지린다니 말이야."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덩치만 크지 순하거든. 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해도 도사나 롯드 와일러가 물러서는 법은 없는데.... 아무래도 고단수 하고 의논을 해 봐야겠다. 그놈도 나름대로 투견 계에선 알아주는 놈이니까 뭔가 아는 게 있을 꺼다."
"참 달수에게 들으니 너 잘 해 먹든 투견 판에서 짤렸다며? 짤린 이유가 뭐냐?"
"달수란 놈이 그건 말 안 해주디?"
"못 들었어. 그냥 네 걱정만 늘어놓더라."
"그래?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그 바닥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단 말이다. 내가 잘린 건 보나 마나 고달수와 친구 사이란 게 밝혀 져서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투견 판에서 상대 견주가 서로 친구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냐? 담합을 할 가능성이 생길 것 아니냐?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잘린 거야. 우리도 그런 상류사회의 투견 판엔 처음이라 몰랐던 거지. 알았으면 내가 달수와 눈이라도 마주쳤겠냐?"
"무슨 소린지 대강은 알겠는데.... 설마 친구라 해도 어떤 식으로 담합을 한다는 거냐?"
"이런... 제법 똑똑하던 네가 어쩌다 이젠 말귀도 못 알아먹냐? 물주를 만들어 서로 짜고 경기를 조작하면 돈이 생길 것 아니냐? 그걸 방지하려고 견주를 수시로 바꾸고 싫증이 나지 않게 투견의 프로그램을 자꾸만 새롭게 짠 단 말이다."
"프로그람을 바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런 초짜 배기를 가르치려는 고달수가 불쌍하구나. 투견이라고 꼭 도사 대 도사만 싸우게 한다더냐? 도사와 진돗개도 싸우고 핏불과도 싸우고 그것도 싫증 나면 일 대 삼. 아니 일 대 십이라도 싸우게 해서 즐기고 돈을 걸게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상대가 지나치게 세면 게임이 안 되니까 이 대 일, 오 대 일도 괜찮단 말이지?"
"게임이란 게 서로 간에 힘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 거잖아? 너와 나처럼 균형이 맞지 않으면 애꿎은 너만 쥐어터질 테니까."
"이게.... 학교 다닐 때 내게 너무 맞아서 철이른 치매가 왔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달수와 상의해서 대책이나 말해 줘."
"알았다. 내 이따가 전화해주마."
"고맙다. 끊어."
전화기를 집어넣은 양구택이 다시 투견장인 철망으로 다가갔다. 헌데 아까와는 뭔가가 약간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땅바닥에는 태산이가 저 혼자 좋다고 뒹굴고 있는데 철망에 딱 붙어 꼼짝을 못하던 도사와 롯드 와일러가 아까와는 다르게 태산이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힐금힐금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진돗개들은 숫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간간이 콧등에 주름까지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태산이가 자신들의 큰 위협거리가 아니란 걸 간파한 행동이었다. 어쩌면 한 판을 벌려도 숫 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계산인지도 몰랐다. 여하튼 태산이가 덩치만 큰 겁쟁이란 걸 단 몇 분 사이에 간파한 것이 틀림없었다. 꼬리를 흔들며 땅바닥을 구르던 태산이가 양구택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단번에 도사와 롯드 와일러는 앞발을 낮게 버티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간격을 벌려 선 진돗개의 눈에도 푸른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양구택은 개들의 그런 변화에 깜짝 놀라 태산이를 꺼내려다 한편으론 옳지 이제야 한판 붙는구나 하고 사태를 주시했다.
태산이는 양구택에게 어서 산책이나 가자고 조르는 듯 철망에다 발을 올려 문 열기를 재촉했다. 바로 그때 진돗개들이 번개같이 돌진하더니 태산이의 뒷발을 하나씩 물었다. 그와 동시에 도사도 펄쩍 뛰어 올라 목을 노렸다. 롯드 와일러도 질세라 태산이의 어깨를 덥썩 물었다.
꿈에도 생각 못한 기습에 놀란 태산이가 깜짝 놀란 듯 커컹하는 비명도 사자후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철망에서 발을 내렸다. 그리고는 황망한 몸짓으로 목을 물려고 덤벼드는 도사를 자기 머리로 받아쳤다. 이것은 순전히 본능적 반사 작용이었다. 그러자 그 박치기 한방에 도사는 몇 미터 밖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통에 간신히 태산이의 어깨를 물고 늘어지던 롯드 와일러는 자동으로 튕겨져 나갔다. 뿐만 아니었다. 태산이가 땅에다 앞발을 쿵 내려놓으며 머리를 뒷 쪽으로 휙 돌리자 진돗개들은 기겁을 하여 물었던 다리를 놓고 구석으로 도망가 머리를 처박았다. 그러나 막상 겁이나서 쩔쩔매는 것은 태산이었다.
애초부터 전혀 싸울 뜻이 없었던 태산이는 또다시 폭력이 닥칠까 겁을 냈는지 철망 밖의 양구택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앞발로 철망을 마구 긁는 것이다. 그러자 양구택은 오히려 때는 이때라는 듯 신이 나서 응원을 시작했다.
"물어, 태산아, 물어, 저 쌔끼들을 콱 물어 죽이라고. 어서. 태산아. 물어 죽여."
그러나 태산이는 더 당황한 몸짓으로 뒤를 힐긋힐긋 돌아보며 자신에게 덤비는 개가 있나 살피기에 바빴다. 양구택은 다시 한번 응원을 해 보았지만 희망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양구택의 응원 소리를 절박한 위험 신호로 느낀 태산이는 황망한 몸짓으로 철망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도사와 롯드 와일러는 잔뜩 쫄아서 대가리를 구석에 처박고 눈알을 굴려 상황을 살피기 바빴다. 그러나 태산이의 눈에는 그것마저 위험 요소로 보였는지 절박한 몸짓으로 서성댔다. 그러다 갑자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단번에 몸을 솟구쳐 철망을 뛰어 넘었다. 2미터가 넘는 철망을 보통 개가 엎드린 강아지를 넘어가듯 쉽게 넘은 것이다. 양구택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아이고, 이것 참, 환장하겠네. 힘이 모자라서 도망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저것들을 봐라. 네게 쫄아서 쥐구멍을 찾지 않냐? 그런데도 오히려 네가 도망을 쳐 나오다니? 네가 지금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냐? 아, 이거 너를 믿고 있다가는 투견 계를 석권하기는 커녕 죽도 못 먹게 생겼다. 이걸 어째야 쓰나?"
양구택은 태산이의 목을 끌어안고 한숨을 토했다. 태산이는 양구택이 뭐라건 개들의 무서운 입을 피한 것이 기뿐지 연방 꼬리를 설렁대기에 바빴다. 양구택은 태산이를 컨테이너에 가둔 뒤 자신의 침대 귀퉁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생각에 잠겼다.
'박철구나 고달수의 말을 들어 보면 분명히 상류사회로 진출만 제대로 하면 한밑천 잡기는 쉬울 것 같은데.... 싸우지 않으려는 개를 끌고 투견장을 찾을 수는 없고... 이제 와서 도사나 다른 견종을 길러내기란 시간도 밑천도 없으니..... 천상 저 태산이를 투견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저놈이 말을 들을까?'
본격적으로 생각 속으로 돌입하려는 데 전화벨이 울렸다. 예상대로 박철구였다.
"달수하고 의견을 나눠 본 결과.... 결과래야 별것 없지만.... 여하튼 네가 갖고 있는 놈이 도깨비나 사자를 잡아먹고 사는 괴물이라 하더라도 한꺼번에 도사 다섯 마리만 풀어 놓으면 죽지 않으려면 싸우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결론이 났다."
"기껏 그 수밖에 없냐? 방금도 네가 준 개 네 마리를 피해 철망을 넘은 놈인데?"
"그럼 철망을 더 높이고 도사를 풀어. 도망갈 구멍이 없는 마당에 제놈이 싸울 수밖에 더 있겠냐. 이참에 아예 싸우든 죽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해버려. 싸우지 않으면 사망인데. 그리고 사실 명색이 투견인데 싸우지 않으려는 놈, 밥만 축내지 길러 뭣하냐?"
"그래, 할 수없다. 마지막으로 그 수를 써야겠구나."
"헌데.... 너 솔직하게 말해라. 세상에 도사와 롯드 와일러, 그리고 진돗개 두 마리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개가 세상에 있겠냐? 게다가 뭐? 그 개를 상대한 도사와 롯드 와일러가 구석에 머리를 처박더라고? 에라이 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들어나 봤냐? 정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네 도사견을 좀 빌려 줄래?"
"언제든지 빌려 가. 요즘 투견장엘 못 가니 놀고 있는 놈만 서른이 넘으니까 사룟값도 아까운 판이다."
"그럼 열 마리쯤 가져올까?"
"이 친구가 점점... 도사 열 마리면 호랑이도 줄행랑을 칠걸? 너도 도사가 무섭다는 건 잘 알잖아?"
"몰라. 도사 건 박사 건 내 앞에 오면 무조건 오줌을 지리니까."
"허긴, 개가 개 저승사자 몰라보랴?"
"좌우간 열 마리만 빌리자고. 개들은 잘 먹일 테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 네 개가 우리 도사에게 물려 뒈져도 나보고 물어내라는 소리 없기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네가 해주어 고맙다."
"지랄하네. 도사 열 마리를 상대할 개가 있으면 그 개만 가지면 세상 돈 다 긁겠다."
"나도 그럴 요량으로 훈련을 시키려는 거야."
"아, 좋아,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대신 정말로 네 개가 죽어도 찡찡대기 없기다."
"알았다. 내일 개장 싣고 가마."
양구택은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태산이를 이참에 아예 철구나 달수에게 공개를 해 버릴까? 그래서 놈들의 협조를 구할까? 아니지.... 놈들이 태산이를 보는 순간 환장을 할 텐데..... 그러면 반드시 동업을 하자고 하겠지. 그건 좀 곤란 하….'
까지 생각하는 데 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고달수였다.
"철구에게 들었다. 네 개가 통 싸울 생각을 않는다고?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잖냐?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감싸고 도망을 치는 그런 사람 말이야. 물론 도망치는 놈을 잡아다 기어이 오른쪽도 때리고 마는 너 같은 학생도 있긴 있었지."
"너 자꾸 옛날 일을 뒤적일래? 이 상황에 맞는 얘기만 해 달란 말이다. 철구는 도사 댓 마리로 싸움을 붙여 보라더라만 너는 무슨 아이디어가 있어서 전화했냐?"
"네 개가 대체 무슨 종잔데 그렇게 허풍을 떠는지 내가 한번 보러 가려고 한다. 너 지금 어디서 무슨 장난을 하냐? 양견장은 그만뒀다니 거긴 아닐 테고.... 너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고달수가 본격적으로 파고들 기세를 보이자 양구택은 뜨끔했다. 이것들이 설마 눈치를 제대로 챈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럴 리가 없는 것이 이제껏 태산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배철권 부자와 자신뿐이 아닌가?
"도사 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기왕이면 철구도 함께 와서 감상들 하시란 말이다."
"도사를 튀기다 보니 괴물이 나왔냐? 무슨 놈의 튀기가 순종 도사견 다섯 마리를 상대한단 말이냐? 네가 지금 뻥을 너무 심하게 튀기는 것 아니냔 말이야."
"아, 답답해. 문제의 핵심을 모르니 그런 오해가 생기는 거야. 도사가 다섯 마리 건 열 마리 건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내 개가 도통 싸우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니까 그러네. 어떻게 하면 내 개가 싸우려는 마음이 생기게 할 수 있나를 물어 본 건데... 엉뚱한 지랄들을 해대니... 이거야 원...."
"지랄, 그게 무슨 문제냐? 싸우지 않는 투견은 보신탕 감으로 팔아버리면 그만이지. 넌 개장수 삼십 년에 아직 개를 볼 줄 모르냐?"
"개를 볼 줄 아니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아니냔 말야. 투견으로 훈련만 되면 전국 참피언은 시간문제란 말이야."
"뭣? 확실하냐? 그럼, 내 말대로 해. 철구한테 도사를 빌려서 사흘쯤 굶기란 말이야. 그런 다음, 한꺼번에 철망에 집어넣어서 네 개를 잡아먹히게 해 버려. 그 상황에 이르도록 싸우지 않는다면 네 개는 죽어서도 반드시 노벨 개 평화상을 받을 테니까."
"알았어. 마지막 수단으로 네 말 대로 해 볼밖에. 내일 당장 철구네 도사를 갖고 올 게."
결국 박철구나 고달수의 결론은 같았다. 싸우지 않으려는 개를 싸우게 하는 방법은 물려죽거나 싸우거나의 양단간의 상황으로 몰아가라는 얘기였다. 양구택의 생각에도 말은 옳은 말이었다. 아무리 평화를 사랑하는 태산이라 하더라도 물려죽기 싫으면 싸워야지 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달수의 말처럼 싸우지 않는 투견을 어디다 쓰겠는가? 양구택은 마음을 정했다. 태산이가 싸우지 않고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다 정말 태산이가 도사들에게 물려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양견장도 그만두었으니 믿을 건 태산이를 투견으로 만들어 밥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태산이가 투견이 못 되면 모든 게 끝장이 아닌가? 이판 사판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았다. 이젠 태산이도 양구택 자신도 정말 기로에 선 것이다.
양구택은 다음날부터 투견장을 고치기에 바빴다. 처음 투견장을 지을 때는 배철권 부자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젠 한열이가 집에 가고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양구택은 투견장을 더 넓히고 철망도 더 높이기로 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 일의 진척이 형편 없이 느렸지만 어쨌든 삼사 일 후쯤엔 그럭저럭 완성을 보았다.
양구택은 그날로 트럭을 몰고 안양으로 달려가 박철구에게서 도사 다섯 마리를 빌렸다. 양구택의 개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가 궁금했던 박철구가 막무가내로 따라 붙었다. 하지만 양구택은 지금의 태산이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눈치껏 도망을 쳤다. 양구택은 일단 빌려온 개들을 한꺼번에 투견장 안으로 몰아넣은 후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날 저녁 때쯤이었다. 밖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컨테이너 옆 칸에 있는 태산이가 벽을 긁으며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산이가 조급해 하는 소리를 들은 양구택은 직감적으로 반가운 사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다. 태산이가 반갑게 맞을 사람이라고는 세상에 자신과 한열이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리로 오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열이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계세요?"
양구택이 문을 열자 비닐봉지를 든 한열이 서 있었다.
"오, 한열이냐? 개학은 했니?"
"네."
"개학을 했으면 공부를 해야지 왜 왔냐? 오호라, 동방불패가 새끼를 낳았나 궁금해서 왔구나? 하지만 아직 안 낳았다. 오늘 내일쯤일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기미가 안 보이더라."
"태산이도 잘 있지요?"
"그럼, 저 소리를 들어봐라. 저놈이 네가 온 걸 진작부터 알고서 저런다."
"제가 가 볼게요. 동방불패도 보구요."
"그래라. 반가워들 할 게다."
"이것 좀 드세요. 우리 엄마가 아버지와 아저씨께 부침개를 갖다드리라고 하셨어요."
"오, 그러냐?"
한열은 태산이가 있는 옆 칸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태산이는 한열이의 어깨에 훌쩍 발을 올리고 혀로 얼굴을 마구 핥았다. 한열은 태산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느라 얼굴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그만, 그만해."
한열의 한 마디에 훌쩍 땅으로 앞발을 내린 태산은 사방을 껑충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태산이의 혀로 세수를 한 한열이 얼굴을 닦으며 동방불패가 갇힌 개장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평소라면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쇠 창살 소리도 요란하게 반겼을 동방불패가 의외로 조용했다. 늦은 저녁이라 어두워 개장 안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방불패의 기척이 느껴지니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아저씨 동방불패가 저를 아는 척도 안 하는데요?"
한열이 태산이와 함께 양구택에게로 돌아와 한 말이다.
"그래? 그놈이 그새 널 잊었나 보다. 하하. 아니? 가만..... 그렇다면 혹시?"
양구택은 부리나케 랜턴을 찾아들더니 동방불패가 있는 개장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내 생각이 맞았네. 어쩐지 아침부터 사료를 안 먹더라니.... 내가 안양에 갔다 오느라 신경을 못 썼더니 그 사이에 새끼를 낳았구나."
"예? 정말요?"
"하하, 어쨌든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다. 우선 물부터 갈아줘야겠다."
양구택은 물통에 물을 채워주고 사료도 새로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랜턴 불빛으로 동방불패의 배에 붙어 젖을 빠는 강아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앗, 한열아. 저, 저놈 봐라. 태산이 하고 똑같은 놈이 있구나. 다른 강아지 보다 크기가 두 배가 넘는 저놈을...."
"어, 정말 그렇네요? 저 강아지만 저렇게 크군요."
"태산이도 저랬지. 다시는 태산이 같은 놈은 못 볼 줄 알았더니... 참, 네가 한 마리 고르기로 했지? 어떠냐? 저 태산이 같은 놈을 가질 테냐?"
양구택의 느닷없는 제의에 한열은 약간 당황했다. 욕심 같아서는 단번에 그놈을 갖고 싶다고 하겠지만 단 한 마리 밖에 없는 강아지를 갖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마리뿐인걸요?"
"괜찮다, 사실 이번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놈이 나온 건 어쩌면 너와 인연이 닿아서 일 지도 모른다. 너도 저놈을 태산이처럼 멋진 놈으로 키워보렴."
"아저씨, 정말 제가 가져도 괜찮으시겠어요?"
"남자가 한번 약속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무엇 여러 말이 필요하겠니?"
"아저씨, 고맙습니다. 잘 키워 볼게요."
"그래. 잘 길러서 챔피언을 만들어 보도록 해라."
태산이와 똑같은 개를 갖게 될 줄이야? 한열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갑자기 무언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한열은 한동안 강아지가 있는 우리 앞을 서성거렸다. 태산이와 노는 사이에도 동방불패가 있는 개장을 밤늦도록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월요일에 등교하려면 내일은 집에 가야 했다. 한열은 양구택에게 인사를 한 후 아버지인 배철권이 있는 경비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밖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실내는 어두워야 할 경비실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그 앞에는 웬 사내들과 트럭이 서 있었다. 한열은 배철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글쎄, 안 된다고요. 자재과 직원이 다들 퇴근해서 연락이 안 되니 난들 어쩝니까?"
"거, 그 양반 되게 빡빡하게 노시네. 그럼, 이 출고증이 가짜란 말이요?"
"가짜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재를 입출고할 때는 반드시 자재과에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규정을 지킬 뿐이란 말입니다."
"아니? 그럼 당장 내일 새벽부터 일을 해야 하는데 자재도 없이 어떻게 하란 말이요? 그러지 않아도 출고증을 끊자 말자 곧장 달려온 길이란 말이요."
"어쨌든 나는 규정을 지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이런.... 당신 말이야. 잘난 그 자리에 언제까지 앉았나 내, 두고 볼 거야."
말을 마친 사내가 운전석으로 오르자 나머지 한 명도 얼른 조수석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문짝을 세차게 닫으며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개새끼, 경비 주제에 규정 좋아하네. 대를 물려가며 경비만 해 처먹을 놈 같으니."
"뭐라고?"
귀밝은 배철권이 그 소리를 듣고 항의를 하려는데 차는 벌써 떠나가고 있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이 무엇을 실어가려고 온 거예요?"
"니뿔인가 니풀인가 하는 부속을 가지러 왔다더라만 회사와 연락이 안 되니 내 마음대로 내 줄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저러니.... 원."
배철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며 아들과 함께 경비실로 들어갔다.
"양 선배가 요 며칠, 무엇을 만드는지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한데, 낮엔 내가 자느라 가서 도와주지도 못했다."
"글쎄요. 새로 만든 시설은 없던데요? 참, 동방불패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래? 언제 말이냐?"
"오늘 낮에 낳았나 봐요. 그런데요, 여섯 마리 가운데 태산이처럼 생긴 강아지가 하나 있거든요. 그걸 저보고 가지래요."
"누가? 양 선배가 그러디?"
"예,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를 새끼 중에 제가 한 마리를 고르라고 하셨거든요."
"글쎄.... 설사 얻는다 해도 걱정이다. 언제까지 강아지로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 큰 녀석을 어디서 어떻게 키울지..... 좌우간 생각을 좀 더 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자."
"크면 우리 집 마당에다 두면 되잖아요?"
"아, 성급할 것 없다. 강아지가 젖을 떼려면 아직 멀었으니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자니까."
배철권은 의자에 앉아 사무용 탁자에 올려 둔 일지를 집었다. 이어서 벽시계를 흘깃 올려다 본 후 조금 전 일을 기재하려고 오늘 날짜의 페이지를 펼쳤다.
"어?"
막 볼펜으로 글씨를 쓰려 든 배철권이 흠칫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옆에 있던 한열이 제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이거 큰일을 저질렀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왜 그러시는데요?"
"아.... 내가 또 정신이 깜박 나갔었나 보다. 오후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었다. 저녁 늦게라도 자재를 수령하러 가면 창고 문을 열어주라고 말이다. 나는 그걸 잊지 않으려고 여기다 적어 놓았었지. 그런데도 나는..... 전화를 받은 것도, 일지에 적어 놓았다는 것도 까맣게 다 잊어버린 거란 말이다."
"그럼, 어쩌면 좋지요?"
"글쎄다. 내일 새벽부터 작업을 해야 한댔는데.... 어느 현장인지도 모르니 내가 갖다 줄 수도 없고.... 이거 아무래도 회사에서 문책이 있을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그 부속이 있어야 일을 한다면 어쩌면 아침 일찍 그 아저씨들이 다시 오겠지요 뭐. 일을 하려면 그 수밖에 없지않겠어요?"
"그렇긴 하다만 어쨌든 이번엔 회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구나. 사실 지난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그래요? 그럼 내일 병원엘 다시 들려 보시죠. 더 심해지면 안 되잖아요?"
"걱정 마라. 설마 그런 일로 해고까지 하겠니? 설사 해고를 당해도 일 할 곳은 얼마든지 있단 말이다."
아들에게는 큰소리를 친 배철권은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처지로 보아 어렵게 얻은 일자리인데다가 이만큼 편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교통편이 워낙 나빠 집을 들리는 데는 불편했지만 따지고 보면 근무시간 초과로 오히려 수당도 얼마씩 더 나와서 좋았던 것이다.
다음날 일요일 새벽이었다. 잠이 덜 깬 자재 과장의 잡아먹을 듯한 전화와 함께 어제의 트럭이 다시 와서 자재를 싣고 갔다. 두 번은 참았으나 다음엔 각오하라는 자재 과장의 최후통첩이 있었던 것이다. 배철권은 이번 일이 무사히 넘어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철권은 야전 침대에서 곤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들만은 자신처럼 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새삼 다짐했다.
"밥 다 됐다. 어서 세수하고 오너라."
배철권은 손잡이를 수건으로 감싼 냄비를 내려놓으며 한열을 재촉했다. 한열은 창고 옆에 있는 펌프로 달려가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경비실로 돌아오려는데 멀리 양구택의 개 훈련장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버지. 양씨 아저씨 계시는 곳에서 개들이 엄청 짖는데요?"
"나도 방금 들었다. 밤새 조용하던 놈들이 웬일인지 모르겠구나."
"밥 먹고 가봐야겠어요."
"조심해라. 어제 낯선 개들을 또 싣고 오는 것 같더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도 잠깐 봤는데요. 도사견 같던데요?"
"글쎄 나야 개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만 도사가 무서운 개란 것쯤은 안다. 언젠가 투견 시합을 봤는데 그놈들은 물면 도통 놓을 생각을 않더구나."
"양 씨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핏불이란 개가 그렇데요. 그래서 그 개에게 사람이 많이 다친데요."
"아, 밥 식는다. 어서 먹자. 네가 갖고 온 김치가 맛있어 보이는구나."
밥을 다 먹은 한열이 그릇까지 씻어놓고 양구택이 있는 해변 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개들은 계속 짖고 있었다. 헌데 그냥 짖는 것이 아니라 점점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 들으면 태산이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껏 태산이가 저렇게 크게 짖거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를 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에 한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숫제 뛰기 시작했다. 양구택의 투견장에 닿았을 때 한열은 놀랍고도 황망한 광경을 목격했다. 투견장 안에는 몇 마리인지도 모를 커다란 도사들이 태산이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도사는 모두 다섯 마리였다. 태산이는 이미 많은 공격을 받은 듯했다. 머리와 다리가 온통 피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격을 당하고 있는 태산이의 행동이 이상했다. 도사가 다리를 물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뿐 상대 개에게 반격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놈이 또 태산이의 다른 쪽 다리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태산이는 그 상황을 견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개들을 피해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계속 도망을 다녔다. 그러나 도망을 다니는것도 공간의 제약이 있으므로 그도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지름 5미터 정도의 공간이라 도무지 움치고 뛸 재간이 없는 것이다.
"물어, 태산아, 물어, 물라고.... 저런.... 얼른 돌아서 물어."
철망 밖에서는 양구택이 악을 쓰며 태산이가 싸우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태산이는 더 큰 공포를 느꼈는지 있는 힘을 다해 철망을 뛰어넘으려 했다. 순간 깜짝 놀란 한열이 철망 위를 쳐다보았다. 태산이는 족히 3미터는 뛰어 올랐다. 그러나 철망을 넘어오는 데는 실패했다. 언제 높였는지 철망은 한열의 키보다 두 배도 넘었던 것이다.
철망을 넘는데 실패한 태산이는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도사들은 그런 태산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떨어진 태산이가 미쳐 자세도 잡기 전에 목이든 다리든 입이 닿는데로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태산이의 눈빛은 피보다 진한 공포와 절망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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