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3. 투견꾼들(1) 태산이

fiction-google 2024. 2. 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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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두 부자가 다 있었구먼."

양구택은 경비실로 들어서며 배철권과 한열을 향해 들고 있던 수박을 내밀었다.

"아니? 이게 웬 겁니까?"

의외의 물건에 놀란 배철권이 수박을 받아들 생각을 잠시 잊고 눈이 커졌다.

"우선 받게나. 오는 길에 사 왔네."

"원 선배님도.... 이런 건 선배님 가족에게 갖다 드릴 것이지...."

수박을 받아 든 배철권이 놓을 곳을 찾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아들 한열이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물통에 담아놓으려는 것이다.

"안양에 갔다오는 길일세."

"안양이오?"

"박철구라고 한때 동업을 하던 친한 사이지. 그 친구가 안양에서 개 농장을 하거든."

", 지난주에 도사와 진돗개를 사오신 곳 말이지요?"

"그렇지. 하지만 진돗개는 시흥의 고달수라는 친구의 농장에서 기른 놈이고 안양의 박철구는 도사와 롯드 와일러가 전문이지."

"그럼 오늘도 개를 사러 가신 겁니까?"

"롯드 와일러 한 마릴 가져왔지. 지난번 도사나 진돗개는 태산이가 시시해서 싸우려 들지를 않으니 훈련이 제대로 돼야 말이지."

"그럼 오늘 사오신 개와는 싸움을 할까요?"

"그야 모르지. 하지만 개들이 몽땅 다 덤비면 싸워야지 별 수 있겠나?"

"태산이가 덩치에 비해 너무 순한 모양입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오늘도 싸우지 않으려고 하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지."

"특단의 조치라니요?"

"싸우지도 않는 투견을 어따 쓰겠나? 팔아야지."

"? 설마, 새끼 때부터 기른 걸 파시기까지...."

"하하하. 농담일세. 설마 내가 태산이를 팔겠나? 끝까지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지."

", . 그러시겠지요. 전 선배님 말씀이 진짜인 줄 알고...."

"태산일 팔면 자네나 나보다 한열이가 더 섭섭해할 테지. 둘이서 밤낮 붙어 다녔으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녀석이 태산이 한테 정이 들어 집엘 가래도 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요."

"그럴 테지. 태산이도 저를 아끼는 사람을 알아보는지 나보다 한열이를 더 반긴다네.    사람이나 짐승이나 정이 가는 사람은 따로 있나 봐. 하핫."

"그래도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싫어도 헤어져야 하겠지요."

"그러게 말일세. , 난 또 가서 사온 개를 내려놓아야겠네."

양구택은 문 밖을 나서 자신의 트럭을 향해 걸었다.

"아저씨, 왜 가세요. 수박을 잡수시고 가셔야죠?"

커다란 프라스틱 통에다 물을 채우려고 펌프질에 바쁘던 한열이 양구택의 등에다 큰소리로 말했다. 양구택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열이를 바라보았다.

", 개학이 언제냐?"

"삼 일 남았는데요."

"사흘이라..... 학교 갈 준비를 하려면 낼모레쯤은 가야겠구나?"

"그렇겠죠. 헌데 왜요?"

"아니다. 동방불패가 네가 가기 전에 새끼를 낳았으면 해서다. 낳을 때가 거의 다 되었거든."

"정말 동방불패의 배가 엄청 부르던 데요?"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주랴?"

"아저씨 정말이요?"

"좋다, 새끼를 낳으면 네가 한 마리 골라라. 네가 고른 강아지는 두말 않고 줄 테니. 그동안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돌봐 준 상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개학을 하드라도 태산일 보러 주말엔 올려고 했었는데 강아지까지 생기다니.…"

", 나는 간다. 수박 맛있게 먹어라."

". 아저씨."

양구택은 트럭을 몰아 자신의 컨테이너로 향했다. 컨테이너 밖에 묶여있던 동방불패가 앞발을 허공에 저으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컨테이너 안에 있던 태산이는 진작부터 트럭 소리를 듣고 있어서 앞발을 문짝에 올린 채 작은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괴물 개 태산이는 그동안 훈련을 시켜 본 결과 엄청난 덩치임에도 몸이 부드럽고 날렵했다. 뿐만 아니라 덩치에 걸맞게 힘 또한 엄청났다. 태산이는 양구택과 한열이가 올라탄 두 개의 트랙터 뒷바퀴를 끌고 그 넓은 공터를 질풍처럼 내달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숨이 찬 기색이 전혀 없었다. 태산이는 마치 사자의 힘과 표범의 유연성, 그리고 치타의 빠름을 모두 갖고 있는 듯 했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 못할 점이 있었다. 본래 개들이란 영역을 다투거나 우두머리가 되려고 만나기만 하면 싸움부터 벌이는 것이 본능이요 상식이다. 다시 말해 개들이란 낮이 설거나 말았거나 밥을 먹을 때나 장난을 칠 때나 싸움은 일상적인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괴물에 가까운 태산이는 낯선 개를 만나서도 전혀 싸우지를 않았다. 싸우기는커녕 아예 그럴 생각 자체가 없는 듯 싸우라고 넣어 준 개에게 다가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것이다. 지난번 안양의 박철구에게서 사온 도사를 태산이의 첫 싸움 상대로 철망 안에 넣었을 때도 그랬다.

태산이는 도사에게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며 다가가 이리저리 냄새를 맡더니 저 혼자 땅바닥에 벌렁 넘어져 뒹굴뿐 싸울 기미는 전혀 없었다. 싸울 뜻이 없기는 도사도 마찬가지였다. 개만 보면 싸우려든 도사는 태산이가 다가가자 어찌된 영문인지 아예 꼬리를 사타구니에 잔뜩 끼고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던 것이다.

양구택은 어이가 없었다. 박철구가 그토록 장담하던 도사가 그 꼴을 보이자 당장 전화를 걸어 화를 냈었다. 그러자 박철구는 그럴 리가 없다며 돈을 받지 않을테니 롯드 와일러를 한 마리 더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지고 온 개가 오늘 가져온 롯드 와일러였다. 박철구 말로는 이놈이야말로 싸움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놈이라 호랑이에게도 덤벼들 거란다.

양구택은 트럭을 컨테이너 옆에다 붙였다. 그곳엔 사방에 기둥을 박고 철망을 둘러친 투견 훈련장이 있었다. 며칠 전 배철권과 한열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 양구택은 트럭에서 개장을 내려 롯드 와일러를 그곳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물과 사료를 넣어주고 쉬게 했다. 내일은 지난번에 사온 두 마리의 진돗개와 도사견 그리고 오늘 사온 롯드 와일러까지 네 마리 모두를 괴물 개를 상대로 싸움을 붙여 볼 참이었다.

양구택은 컨테이너의 반을 막아 만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고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달수냐? 나 구택이.…"

". 오랜만이구나. 웬일이냐?"

"방금 안양 박철구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헌데 철구 말을 들어보니 넌 요즘 투견장에 개를 조달해서 재미가 쏠쏠하다며?"

"? 쏠쏠? 쏠쏠까지는 아니고.... 그냥 개 농장 하는 것보다 좀 나은 정도지."

", 너만 재미 보지 말고 나도 좀 끼워주라."

", 너도 투견을 훈련시키고 있다며? 너도 도사냐?"

"도사고 뭐고 아직은 훈련이 덜 됐어. 하지만 곧 작품이 나올 거니까 나도 좀 끼워달란 말이다."

"그거야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지만 우선은 요즘 투견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봐 둬야지. 투견도 우리 젊었을 때랑 완전히 달라서 뭐랄까? 좀 더 고급화가 되었다고 할까? 좌우간 전국의 투견 대회를 다 다녀봐도 옛날처럼 제방뚝이건 시장 바닥이건 마구 판을 벌리는 데는 많지 않더라고."

"그건 나도 투견 공부를 하느라 좀 다녀 봐서 알지."

"그래? 어디 어디를 가 봤는데?"

"여러 군데지.... 과천도 가보고 의정부, 포천, , 너 있는 시흥에도 가 봤지."

"그래? 장소는 대게 어떤 곳에서 해?"

"뭐 가는 곳마다 다르더구먼, 다리 밑에서도 하고 외곽의 공터에서도 하고.…"

"구경꾼은 몇이나 되고 게중에 내기는 몇 명 정도가 하디?"

"글쎄? 구경꾼이야 새카맣게 모이던데? 내기하는 사람도 이삼십 명은 되고."

", 하하하.... 그럼, 판돈이 얼마 정도로 돌아가는 것 같아?"

"왜 그런 걸 묻냐? 판돈이야 백만 원 뭉치도 오가고 몇만 원도 오가니까 못 돼도 천여만 원은 될 것 아니냐?"

"내 이래서 네게 꼬치꼬치 물어본 거야."

"내 말이 어디 잘못됐냐?"

양구택은 자신을 끼워달라는 말에는 대답이 없이 무조건 묻기만 하는 고달수를 한 방 먹였으면 싶었다. 그러나 인내를 하기로 했다. 고달수는 킬킬대는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네가 다녀 본 그런 투견장이 바로 옛날 고려적 방식이란 말이야. 요즘 돈 좀 있는 상류층은 그런 델 안 가. 그 딴 개싸움을 보겠다고 쪽팔리 게 다리 밑에 벤츠 세워 놓겠냐?"

"그럼, 돈 있는 나으리들께서는 어디서 개싸움을 감상하시냐?"

"비꼴 것 없어.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말해주는 거니까. 상류층 어쩌고 한 건 큰 떡 가진 사람들 밑에서 놀아야 떡고물도 많다는 얘기야. 판돈만 해도 그래. 시시하게 백만 원 십만 원이 뭐야? 그런 푼돈은 막걸리 값 밖에 더 되냐? 거기서 떨어지는 돈을 얻어먹자고 전국을 쫓아다닌단 말이야? 백만 원씩 서른 명이래야 삼천만 원 아니냐? 그 정도는 내가 거래하는 곳에선 혼자 베팅 하는 돈밖에 안 돼."

"뭐야? 혼자서 삼천만 원을 건다고?"

"그러니까 한번에 구천만 원이나 땄지."

".... 구천? 한 판에?"

"너 왜 놀래냐? 베팅이 삼억도 될 수 있고 배당금도 구억 원이 될 수도 있는 판이 눈앞에 있는데.... 그런 쫌스런 판에 낄려고 침을 삼키냐? , 양구택이, 처음부터 크게 놀아.    넌 평생 똥개나 기르고 팔 줄 알았지 이 바닥엔 초짜 아니냐? 그러니까 이제부턴 이 형님 말씀을 잘 듣고 큰판에서 배우도록 해. 알았냐?"

양구택은 고달수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욕이 나오려 했으나 아쉬운 쪽이 자신이라 다시 한번 인내 삼창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고달수의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이 세상에 다시없을 태산이 같은 투견을 가진 자신이 시시한 술값이나 벌겠다고 뚝방이나 다리 밑을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양구택은 그런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기껏 시장 바닥이나 다리 밑 개싸움 판을 석권할 꿈을 꾼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돈을 딸 바엔 큰 돈을 왕창 따서 세계 무대를 노려야지 막걸리 값에 만족하면 안 될 노릇이었다. 고달수의 말대로 그런 고상한 신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그쪽으로 데뷔하고 봐야 할 것이다.

"형 놈아. 다음 <독 파이트>는 언제 어디서 하냐?"

"그게 형님에게 하는 언행이냐?"

"형으로 대접을 해 줘도 지랄일세."

"정중하게 다시 묻기 바란다. 이상."

". 그 자식... 시합 날짜를 알아야 내 스케줄을 조정할 것 아니냐?"

", 그놈...., 아직 날짜는 물론 장소도 몰라. 시합 전날 가르쳐 주니까."

"까다롭게 노는군."

"그러니까 개판 소리를 안 듣는 거야. 거긴 회원들만 오고 현찰 거래도 없어. 모든 게 철저히 비밀이란 말이다. 그러니 도박 장소라는 증거도 없어. 아마 너도 내 조수로 소개를 해야 통과가 될걸?"

"알았다. 그럼 이번 토요일 저녁에 다시 연락 하마."

", 구택이..... 너나 나나 평생 기르고 죽이기만 했지 언제 개로 큰돈 벌어 봤냐? 하니까, 이번 기회에 잘 보고 배워서 너도 돈 좀 벌어라. 그래야 자식 원수를 갚을 것 아니냐?"

"잘 나가다가 죽은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 미안. 네 생각만 하면 그 일이 자꾸만 생각나더라. 그래서 그래."

"아무튼 고맙다. 그만 끊는다."

통화를 끝낸 양구택은 그대로 벌렁 넘어져 누웠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장소가 넓고 사람들의 눈도 없어 태산이를 훈련시키기엔 그만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투견장을 다니며 요령을 터득하자면 교통이 너무 불편하다. 그리고 외출 시에 개들만 두고 다니기가 불안하다. 이제까지는 한열이가 많이 돌봐주었으나 그 아이도 개학이니 집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가면 이곳은 허허벌판이라 추위도 큰 걱정이다. 그렇다면 태산이의 훈련을 끝내면 다시 개 농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폐업은 했으나 어쨌든 개들을 둘 시설이 있고 사무실도 있으니 적어도 이런 불편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개 농장이 있는 곳이 외곽의 산 밑이라 비교적 누구의 눈길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왔다가 아니겠는가?"

양구택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자신을 부르는 한열의 목소리에 양구택은 놀라 깨었다.

"저 때문에 깨셨군요. 주무시는지 몰랐어요."

한열이 들고 온 그릇들을 내려놓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아니다. 그냥 누웠다가 깜빡했다. 한데 이것들은 뭐냐?"

", 이건 아저씨께서 사오신 수박이고요. 이건 찐 감자요."

"? 찐 감자가 어디서 났니?"

"방금 우리 엄마가 오셨어요. 아버지 걱정도 되시는데다 저까지 집엘 오지 않으니까 데리러 오셨데요. 어서 드세요."

"오냐, 잘 먹으마. 그러지 않아도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 잘 됐다."

양구택이 감자와 수박으로 점심을 대신하는 동안 한열은 밖으로 나가 태산이와 어울렸다. 덩치가 산만한 태산이가 좋다고 한열의 어깨에 두 발을 턱 걸쳤다. 그러자 무게가 거의 2백 키로에 육박하는 태산이를 이기지 못한 한열이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자 태산이는 대걸레 만한 혀로 얼굴을 마구 핥았다. 한열은 고개를 이리저리 피해 보지만 태산이를 당할 수가 없었다. 171 센티에 몸무게 70 키로의 한열이를 태산이는 마치 장난감 다루 듯 하는 것이다.

"그만, 그만, 태산아. 그만해."

한열의 말에 성큼 물러난 태산이가 꼬리를 흔들며 컨테이너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열이도 벌떡 일어나 태산이를 따라갔다. 철망 우리 안에 못 보던 개가 있었다. 헌데 첫 눈에 봐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개였다.

"뭐야? 내게 이 개를 소개하려던 거야?"

한열은 태산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우리 속의 개를 자세히 보았다. 검은색에 누런 네 발. 확실히 어디선가 본 개였다. 그러다 갑자기 승학산에서 본 개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검은 색 몸통에 누런 색 다리.... 확실히 그 개와 같은 종류였다. 한열은 양구택에게로 돌아갔다.

"아저씨, 오늘 데려온 저 개는 무슨 개지요?"

", 너도 봤냐? 롯드 와일러다. 투견용으로 들여온 건데 무척 근성이 있는 놈이지. 개들 중에 도사와 맞먹을 만 한 놈은 저놈 밖에 없을 거야."

"승학산에서 저런 개와 똑 같은 개를 본 적이 있거던요. 두 마리요. 그 때는 두 마리가 목줄도 없이 서성거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뭐야? 그때라면 그때가 언제라는 거냐?"

갑자기 양구택의 표정이 변해서 성급히 물었다. 한열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늦은 다음이었다.

"그게.... 아저씨 아들이 사고 나기 이틀 전에요."

"그래? 그렇다면 그놈들 짓이 틀림없구나. 한데, 나는 아직도 모를 것이.... 아들 놈이 무엇 하러 그 산엘 갔을까 하는 점이다. 승학산은 우리 집과 거리도 제법 멀거든."

양구택의 마지막 말에 한열의 양심이 뜨끔했다. 사실대로 말을 하자니 자신의 책임이 더 커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사실을 영영 숨길 일도 아닌 것이다.

"그건.... 그게.... 사실은...."

"? 왜 그러냐? 혹시 네가 알고 있는 게 있냐?"

"사실은 그날 그 형들이 저를 쫓아오다가 그 산엘 올라갔었어요."

", 뭐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너를 쫓다니?"

"정말이예요. 그날 학교 앞에서부터...."

"학교 앞에서부터라니? 괜찮다. 계속해 봐라."

한열은 그날 있었든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고등 학생들에게 하굣길 친구들과 함께 골목에 끌려가 매를 맞은 것과 친구가 돈을 뺏긴 것, 그리고 권투를 배웠다는 무스 바른 형이 자신을 더 때리려고 해서 손을 뿌리치고 도망을 쳤다고 했다. 집 쪽인 승학산으로 도망을 치려다가 전날 본 검은 개들이 생각나 산 밑으로 내려온 것을 모른 형들이 자신을 쫓아 계속 위로 올라간 것이란 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런 사고가 났다고 말을 마쳤다.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양구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를 때렸다니 미안 하구나. 권투를 배웠다는 무스 바른 그놈이 바로 내 아들이었다."

"? 그 형이 아저씨 아들이었다고요?"

"그렇단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 내 탓이다. 학생이란 녀석이 머리에 무스나 바르고 껄렁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서도 바로잡지 못한 내 탓이란 말이다. 권투만 해도 그래. 권투를 배워 달래서 도장엘 보냈더니 스포츠 맨 쉽은 배우지 않고 그 솜씨로 다른 아이들이나 때리고 다닌 걸 몰랐구나."

"그날 저만 만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그런 생각을 말아라. 너를 만나지 않았어도 그 녀석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던 거니까. 오히려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기이한 인연이구나. 너의 아버지와 내가 같은 도장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아버지께 말씀 들었어요. 아저씨도 권투선수 셨다지요?"

"너희 아버지 같은 프로는 아니었지. 그냥 권투가 좋아서 좀 따라다녔을 뿐이니까."

양구택은 씁쓸한 얼굴로 한열이 갖고 온 그릇을 챙겼다.

"아저씨 저 지금 엄마랑 집에 갈 거예요. 하지만 주말엔 태산이랑 동방불패를 보러 꼭 올게요."

"그래 그동안 저놈들을 돌봐주어 고맙다. 참 동방불패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서 섭섭하구나."

"다음 주에 와서 보지요 뭐.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오냐. 잘 가거라. 담에 보자."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온 한열은 태산이와 동방불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되돌렸다. 떠나는 한열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자리에 엎드린 태산의 눈도 아쉬움이 서린 듯했다. 동방불패 역시 제자리를 낑낑대며 눈은 한열이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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