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기다리든 소식이 신동우의 전화기를 통해서 조중구의 귀로 들어왔다.
"내일 저녁? 거 좋지. 어디래?"
"지난 번 거기. 거기서 한번 더 한다더군."
"그래? 밤중에 앞차를 따라갔던 길이라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지. 허나 우리 같은 회원이 많을 거니 전화로 알아볼 게."
"시간은?"
"이번엔 좀 빠르더라. 여덟시 반이라니 말이다."
"알았어. 같이 갈까? 아니면 각자 갈까?"
"금동이 하고 같이 가려면 한 차를 타는 게 낫지 않겠냐?"
"글쎄다. 이번 주엔 통화만 했지 금동이 얼굴도 못 봤다. 아무래도 동생 문제가 불거지나 봐. 금동이 아버지 건강 문제도 있고 말이야."
"그래? 그럼 일단 의정부역까지는 각자 가는 걸로 해. 내가 금동이에게 이따 전화 해 볼 테니까."
"그러던지..... 그럼 내일 의정부역에서 보자."
조중구는 퇴근 시간이 되자 서점에 들러 투견에 대한 책이 있나 살펴보았다. 허나 한글로 된 투견 책은 없었다. 아니, 투견은 커녕 개에 대한 책 자체가 아예 없었다. 개에 대한 것이라야 조잡하게 번역된 개 기르기나 가축 기르기에 관한 책 속에 일부분이 다였다. 조중구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무슨 나라가 이 모양인지.... 맨 술집과 비디오나 오락실 뿐이고 책방은 눈씻고 봐도 없잖어? 게다가 크다는 책방에도 어째 제대로 된 개새끼에 관한 책 한 권이 없는지... 원.'
내친김에 조중구는 헌책방이 즐비한 청계천으로 차를 몰아 영어로 된 개 그림책과 일어로 된 <도사견 연구>라는 책을 구했다. 집에 돌아온 조중구는 열심히 두 책을 펼쳐 보았다. 세계의 모든 개를 소개한 영어판은 사진만 요란하고 많았지 볼 것이 없었다. 도사견 연구라는 일본어 책도 마찬가지였다. 도사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용도의 개인가를 알았을 뿐 시간을 투자한 댓가는 얻지 못했다. 투견에 대한 공부는 역시 실전에서만 할 수 있나 보았다.
일요일 오후가 되자 조중구는 애인과의 데이트를 앞둔 것보다 더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머릿속은 진돗개의 목을 물어 허공에 휘젓든 그 도사가 떠오르고 황 총무가 발표하는 배당액이 귓가에 맴돌았다. 조중구는 도금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엔 신동우에게 걸었다. 신동우는 기다렸던 것처럼 금세 받았다.
"동우냐? 금동이가 전화를 안 받더라. 무슨 일인지 너 혹시 아냐?"
"오전에 금동이와 통화를 했었지. 어제 가족들과 양평 리조트로 놀러 갔다더라만 실은 가족회의를 겸해 서래. 그러니 같이 가긴 글렀지. 우리끼리 가는 수밖에."
"할 수 없지... 여덟 시까지는 갈 게. 그때 보자."
"그래, 알았다."
신동우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서니 여동생인 향숙이가 딸기 접시를 들이밀었다.
"오빠 이거 먹어. 언니가 사왔어."
"너도 먹어라. 헌데 현구는 종일 콧배기도 안 보이네?"
"작은 오빠 요즘 바쁘잖어? 오늘은 상견례 장소를 예약하러 간다던데?"
"상견례? 언젠데?"
"몰라 날짜는 아직 잡히지 않았나 봐 하지만 예약을 한다니까 오늘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모아 둔 돈도 없는 놈이 일사 천리로 일을 벌이는군."
조중구는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집어 든 딸기의 중간 부분을 뚝 잘라 씹었다. 그리고 일 초도 안 돼 남은 부분을 홀랑 털어 넣었다. 조중구는 딸기를 좋아했다.
"수박 철이 가까운데 아직도 딸기가 나오냐? 기왕 살 거 아버지 좋아하시는 참외를 살 것이지."
"아버진 아까 나가셨어."
"뭐 조금 전까지 계셨잖아?"
"아까 오빠 책 볼 때 슬그머니 나가시던걸? 보나 마나 작은 오빠 결혼 자금 때문일 거야. 은행에서는 안 된다니 친척을 또 찾아가셨겠지."
"우리 집에 돈 빌려 줄만한 친척이 어디 있다고?"
"병구 오빠 네로 가셨겠지 뭐."
"뭐? 병구네는 아버지와 칠촌 간이니 우리완 팔촌인데.... 팔촌이면 남이지 친척이냐?"
"그래도 가까운 덴 거기 밖에 없잖어?"
"아, 현구 이 자식, 모처럼 맘먹고 얘기 좀 할랬더니...."
조중구는 다시 손을 뻗어 딸기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딸기를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생 현구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데, 혼자가 아니었다. 예비 신부인 애인과 함께 들어선 것이다. 조중구는 순간 당황했다. 말로만 들었지 대면은 처음인 예비 제수였던 것이다.
조중구는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동생의 여자를 힐긋 돌아보았다. 여자 문제에선 완전 낙제생으로 지내온 조중구였다. 이럴 땐 무슨 말과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런닝셔츠에 철 이른 반바지 차림의 조중구는 인사를 주고받기 전에 일단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바지와 티를 걸쳤다. 양말까지 챙겨 신은 조중구는 거울로 자신을 확인 한 후 슬그머니 거실로 나섰다.
"형이 집에 있을 줄 몰랐지. 오늘 어디 간 댔잖우?"
"어, 조금 있다 갈 거다. 동우와 약속이 있거든."
"그럼 정식으로 형에게 소개를 하지. 이쪽은 형 제수될 사람으로 이름은 이소민, 소민 씨 인사드려요. 우리 형님이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현구 씨와 결혼할 이소민이예요."
이소민이라는 여자는 조중구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당돌할 정도로 또박또박 자신을 알렸다. 여자에 대한 공부는 이미 낙제를 각오한 조중구였다. 그러나 막상 동생의 여자 앞에 서니 우등생이 되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다.
"어, 그, 그래요? 나, 나는 현구의 형 중구라고 합니다."
"형 답지 않게 왜 그러우? 제수씨 될 사람에게 미리 쫄았수?"
현구란 놈이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형을 위해 그것도 농담이라고 실실 거리고 있었다.
"야, 너, 나 좀 보자."
조중구는 동생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너, 내게 돈을 마련할 시간도 안 주고 그렇게 일을 막 밀고 나가면 어쩌겠다는 거야? 아버지가 지금 너 때메 돈 구하러 나가셨대잖어?"
"아, 누가 돈 필요 하댔수? 나야 어차피 얼마 없지만 쟤가 모은 돈이 있다잖어? 우선 그걸로 월세방이라도 얻어 나가면 된다니까 그러우?"
"야, 임마. 사내자식이 자존심이 있지 어찌 여자 덕을 보냐? 그거 나중에 부부싸움이라도 나면 약점으로 작용할 건 생각 안 하냐?"
"내가 멍이우? 그래서 나도 결혼을 미루자고 했지. 돈 좀 모은 담에 하자고 말이우. 헌데 쟨 괜찮데.... 자기도 집에서 보태주겠다는 걸 다 거절하고 공평하게 둘만의 돈으로 시작하겠데.... 둘이 버니까 금세 일어 날 거라잖어? 그러니 어째? 사실 요즘 애들 치고 쟤 같은 정신을 가진 애는 없어요. 게다가 따지자면 사실 아쉬운 건 나 아니겠수? 하니까, 형은 걱정 마우. 형이나 나나 바닥을 기며 살아왔잖우? 쥐뿔도 겁나는 것 하나 없수. 잘 살아볼 테니 걱정 말라구. 형보다 먼저 가는게 뭣하긴 하지만...."
돈을 마련할 때까지 약간만이라도 결혼을 미루라고 설득하려 든 조중구는 오히려 동생에게 설득을 당한 꼴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불알 두 쪽으로 무슨 장가를 간다고 난리냐? 그 통에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냐?"
"그러게 말이유. 집안이나 아버질 생각하면 사실 결혼 자체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형이 안 한다니 나라도 손주를 안겨드려야 할 것 아니우? 좌우간 아버지껜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릴 테니 형도 내 결혼에 신경 쓰지 마슈."
"그게 신경 안 쓴다고 쉽게 해결될 일이냐? 어쨌든 알았다."
동생이 나가자 옷을 갈아입은 조중구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서먹한 분위기가 거북해서 나오긴 했으나 막상 나오고 보니 지금 출발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조중구의 집은 천호동 빌라촌이었다. 그러니 거리상, 의정부까지는 거북이에 업혀가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러니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가다가 중간에서 저녁이나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광진교는 요즘 철거가 한창이었다. 조중구는 가까운 광진교를 포기하고 천호대교로 차를 몰았다. 일요일 오후여서 대교 위를 달리는 차는 많지 않았다. 조중구는 의정부까지 지난번 이용했던 코스를 그대로 따라 달렸다.
조중구가 의정부역에 닿았을 때는 여섯 시쯤이었다. 광장 주차장에 차를 세운 조중구는 길을 건너 맥도날드 간판을 찾아 좌우를 둘러보았다. 경기가 끝나면 신동우와 또 먹더라도 우선은 햄버거로 저녁을 때워버릴 심사였다.
허나 길을 갈수록 멀리서도 보여야 할 맥도날드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커다랗게 부대찌개라고 쓴 간판이 몇개 보였다. 순간 조중구는 옳다구나 했다. 춘천 하면 닭갈비요, 의정부라면 당연히 부대찌개가 아닌가?
조중구는 어느 부대찌개 집에 손님이 많은가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손님이 많은 집이 더 맛이 있는 집일 터였다. 한 곳에 이르자 주차된 차가 십여 대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조중구는 서슴없이 식당을 들어섰다. 마침 저녁때이기도 해서인지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조중구가 어정쩡한 자세로 빈자리를 찾아 눈길을 돌리자 종업원이 재빨리 다가왔다.
"손님, 합석을 해야 합니다. 이리 오세요."
일방적으로 가부(可否)를 정한 종업원이 안내한 자리는 이미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사인 석이었다. 조중구가 애매하게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에 앉았다.
"손님, 찌개는 이인 분부터인 건 아시죠?"
"예? 예."
한마디로 혼자 온 사람에겐 일인 분은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주문을 하고 딱, 십 초만에 냄비가 왔고 가스 불이 붙었다. 그 사이 밥과 두어 가지 반찬도 벌써 놓였다. 조중구는 부대찌개가 끓기를 기다렸다. 한데, 옆자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숟가락질에 여념이 없던 두 사람이 이번엔 서로 소주잔를 주고 받았다.
"참, 내가 준 개들은 구택에게 갖다 줬냐?"
"그럼, 내가 갈 것도 없었어. 구했다고 전화를 때렸더니 단숨에 달려오더라고."
"뭐래? 어디다 쓸 거래?"
"우리 생각이 맞았어. 초짜 배기 투견을 훈련 중이래."
"그래? 그놈 눈으로 골랐다면 꽤 괜찮은 놈을 구했나 보지?"
"그런가 봐. 지난번 내 도사 있잖아? 그놈을 보더니 그것도 팔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냥 줬지. 친구 사이에 어떻게 돈을 받냐? 더구나 구택인데."
순간 어디서 들어 본 대목이 들리자 조중구는 슬그머니 두 사람을 향해 눈길을 돌린 다음 찬찬히 얼굴을 훑었다. 틀림없었다. 지난주, 도사와 진돗개의 싸움을 붙일 때 본 견주 들이었다.
"오늘 네가 갖고 나올 개는 뭐냐?"
"롯드 와일러지 뭐야? 넌 또 진돗개잖아?"
"나야 진돗개 하고 풍산개 밖에 더 있나?"
"참, 너 풍산개 그거 들여올 때 모두 얼마 들었냐?"
"북한에서 직접 빼 오느라 돈이 제법 들었지. 빼낸 조선족에게 사례금으로 준 것만도 우리 돈 백만 원을 줬으니까."
"야, 그래도 그걸로 새끼만 치면 돈 꽤나 될걸? 풍산개를 구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
"번식만 제대로 되면 돈은 좀 될 테지."
"오늘도 세 마리 갖고 오라디?"
"아니 두 마리를 고르던데? 너는 롯드 와일러 그거 한 마리지?"
"어제 회장이 농장으로 와서 도사도 보고 롯드 와일러도 보더니 그놈을 직접 골라놓고 갔지."
"보나 마나 사진도 찍어서 갔지?"
"물론이지."
"하여튼 회장이란 그 영감은 빈틈없어. 비슷한 놈으로 바꿔치기할까 봐 매번 그러니까...."
"지난 번 도사는 삼대 일이더니 오늘은 롯드 와일러라 이 대 일인가 봐."
"롯드 와일러면 도사와 버금이라 진돗개 두 마리로는 좀 버거울 텐데....."
"하지만 내 롯드 와일러가 질 것 같아."
그런데, 조중구는 바로 요 대목의 말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까지 말한 사람이 갑자기 볼륨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롯드라는 약한 악센트 밖에 듣지 못한 것이다.
"뭐? 무슨 일 있어?"
"쉿.... 어제 그 자가 개에게 고기를 먹였거든."
"양 고기라는 그것?"
"엇. 네 개에게도 먹인 적 있냐?"
"지난번 우리 개들에게 멕이던데? 그러니 졌지."
"뭐야? 너도 진작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네 진돗개가 뒷심을 발휘 못한 거야?'"
"그럼 오늘은 네 차례구나."
"시합 전날 먹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약효가 나려면 하루 정도가 지나야 하나 보지."
"이기든 지든 개 값은 똑같으니 우린 상관없지만.... 이거 어째 냄새가 나잖냐?"
"뭣? 조용해, 너 미쳤냐? 우리가 알게 뭐냐? 이놈이 이기든 저놈이 이기든 우리가 알게 뭐냐고? 이런 돈벌이를 놓칠 셈이냐? 모르는 척 눈 감고 거래를 계속하면 다른 투견장의 몇 배를 버는데... 너, 입 닫아. 누구에게 말하지 말고 말이야."
조중구가 온 신경을 그러모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부대찌개는 뽀로로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단번에 왈칵 끓어넘쳤다.
"앗, 손님, 넘쳐욧."
종업원이 달려와 가스 밸브를 확 잠그며 한 말이었다. 조중구도 깜짝 놀랐다.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온 정신을 맡긴 탓이었다. 조중구는 조심스레 부대찌개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이 인분이던 것이 그새 일 인분으로 줄어 있었다.
결국 생각이 깊어진 조중구는 <의정부 부대찌개>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견주들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배웅했다. 그다음, 머릿속으로 조금 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차례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총정리가 끝나자 조중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정부 시내를 배회하던 조중구가 서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여덟 시가 가까워지자 주차한 장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까지 신동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중구는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눈에 익은 차가 주차장 입구로 오고 있었다. 조중구는 얼른 밖으로 나가 신동우의 차 곁으로 다가갔다.
"차 댈 것 없어. 여덟 시가 넘었다고.... 헌데 길 안내자는 없냐?"
"전화로 자세히 알아 왔으니 너는 내 차만 따라와."
"금동이에게 전화해 봤냐?"
"전활 안 받더라."
조중구는 얼른 자신의 차에 올라 신동우의 뒤를 따랐다. 주위는 차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앞 차에서 라이트를 켰다. 조중구도 얼른 따라 켰다. 시내를 벗어나 십여 분을 달리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조중구는 그 다리를 보고서야 지난주의 그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다리 건너 좌측 공터엔 이미 십여 대의 차가 와 있었다.
두 사람이 콘센트 막사로 들어서자 기다린 듯 곽 사장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 신사장 어서 오시오. 그리고 신입회원이신 조 박사도 환영합니다. 자, 자. 이리 와 앉으시오."
곽 사장은 과장된 제스처로 두 사람을 여러 사람 가까이 안내했다.
"자. 여러분, 잠깐만 주목해 주시지요. 여기 계신 두 분 중에 새로 우리 회원이 되신 조중구 박사를 소개합니다. 자 다 같이 박수로 맞이합시다."
박수 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조중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정확하게 여덟 시 반이 되자 황 총무가 나와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의 경기는 도사대 도사가 첫 번째 경기입니다. 두 번째는 롯드 와일러대 두 마리의 진돗개 대결입니다. 자 그럼 먼저 도사끼리의 경기가 있겠습니다. 경기 방식은 전과 동일합니다. 개들을 보시고 A와 B에 베팅을 하시면 됩니다. 견주는 입장하세요."
철망 양쪽에서 도사견과 견주가 함께 들어섰다.
"좌측의 붉은 수건을 목에 맨 도사는 A, 우측의 흰 수건은 B로 하겠습니다. 개들을 비교해 보신 다음 베팅 하시기 바랍니다. 베팅 시간은 삼 분입니다."
A라는 도사는 얼굴에 주름이 많은 데다 목덜미의 가죽도 축 처졌고 B라는 도사는 머리가 약간 작아 보이는 개였다. 조중구가 보기로는 솔직히 어느 개가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어느 쪽이 나으냐?"
답답한 마음에 조중구는 옆의 신동우를 돌아보았다.
"난들 알겠냐? 확률적으로 보면 네가 더 잘 맞히잖아?"
"뭐라고? 이런 순간에 하는 농담은 농담이 아니야. 넌 어디다 걸 거야?"
"너를 따라가 볼까 하는데?"
난감하긴 신동우 역시 마찬가지여서 무조건 조중구의 판단에 맡기려 들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그냥 A에다 이백 걸어 볼란다."
"그럼 나도 A에 이백이다."
조중구가 결단을 내리자 신동우는 얼른 수첩에다 A자를 쓰고 액수와 사인을 했다. 조중구도 사인한 종이를 황 총무가 내미는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베팅을 끝냅니다.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견주들은 수건을 꽉 붙들고 곧바로 철망 안으로 들어가 마주 섰다. 개들은 상대를 보자 전의를 들어내고 맹렬히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준비 됐습니까? 자, 그럼 푸세요."
총무 겸 심판의 말이 떨어졌다. 개들은 탱크 같은 기세로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는 중량급답게 묵직한 주둥이로 상대를 제압하려 들었다. 그러나 두 마리는 힘도 비슷한 데다 크기도 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개들이 입을 벌리고 다 같이 상체를 번쩍 들더니 캥거루가 권투 하듯 앞발로 상대의 대가리를 마구 긁어댔다. 그러다가 앞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서로의 턱밑을 노리고 덤비는 것이다. 싸움은 두 마리 다 역전의 용사답게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개들은 상대에게 달려들어 이곳저곳을 마구 물어보지만 급소를 물지는 못했다. 서로의 숫법이 비슷한 데다 힘까지 같아서 적에게 쉽사리 급소를 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언제 승부가 날지 모를 지경인 것이다.
허나 세상엔 변수가 있게 마련이었다. 두 마리의 도사가 서로 상대이 턱 밑을 물려고 파고드는 순간 주름 많은 개의 앞발이 쭉 미끄러져 땅에다 주둥이를 박았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 계속 흘린 침에 미끄러진 것이다.
머리 작은 도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름 많은 개가 파고들 때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옆으로 피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꼬리를 덥썩 문 것이다. 꼬리를 물린 도사는 몸을 일으켜 뒷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머리 작은 개의 목을 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머리 작은 도사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주름 많은 도사의 꼬리를 문 상태 그대로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 주름 많은 도사의 입이 머리 작은 도사의 목에 닿을 리 없었다. 그러자 주름 많은 도사는 당황하고 화가 난 듯 방향을 다시 반대로 돌려 머리 작은 도사를 물려고 했다. 그러면 그것을 눈치챈 머리 작은 도사가 또다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트는 것이다.
만약 이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S자가 됐다가 새 을(乙) 자가 됐다가 하는 형국이 몇 번이나 이어진 것이다. 좌우로 몸을 돌려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안 주름 많은 도사가 꼬리를 물린 채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이었다. 머리 작은 도사가 물었던 꼬리를 재빨리 뱉고 대신 뒷발을 덥썩 물었다. 꼬리에서 뒷발로 바꿔 문 것이다.
뒷발을 문 머리 작은 도사는 찬스를 잡았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왜냐하면 머리 작은 도사가 갑자기 미친 듯 머리를 흔들며 날뛰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름 많은 개는 반격할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머리 작은 도사가 휘두르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쩔쩔맬 뿐이었다. 그럴수록 머리 작은 도사는 광폭하게 온몸을 휘져었다. 드디어 주름 많은 도사의 하체가 무너져 땅에 닿았다. 그렇다고 머리 작은 개는 봐 주지 않았다. 더욱 맹렬히 머리를 휘져었던 것이다.
"낑."
뚝 하고 뼈가 부러짐과 동시에 주름 많은 개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렀다.
"경기 끝. B의 승리. B가 이겼습니다."
심판의 일성에 견주가 뛰어들어 머리 작은 개를 잡아 목줄을 채웠다. 그리고 얼른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름 많은 도사는 발목이 부러져 흔들 거렸다. 발목을 확인한 견주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간신히 개를 안고 나갔다.
"이거, 졌잖아?"
조중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신동우를 돌아 보았다.
"네가 확률을 잘못 계산했군."
신동우가 빙긋 웃으며 조중구의 찌푸린 안색을 살폈다.
"이백을 날렸는데 지금 농담이 나오냐?"
"농담을 안 하면 판정이 번복이라도 되냐?"
"에잇, 까짓 이백, 잃은 걸로 하지. 다음엔 무조건 진돗개에 건다."
"그래? 그럼 난 롯드 와일러에 베팅이다. 다음 경기는 너와 반대로 가 볼란다."
신동우는 조중구와 반대로 베팅을 해 보기로 했다. 확률이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순전히 운이 따른 결과라는 생각에서였다.
"야, 아뭇 소리 말고 나 따라와. 다음 판엔 내가 무조건 이길 거란 말이야."
"싫다. 나도 내 나름의 확률을 따져 봐야지."
"그러다 후회한다. 너."
조중구가 못을 박았다. 그러자 신동우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야, 이번엔 네가 날 따라와. 틀림없이 롯드 와일러가 이길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동우, 너. 진짜 후회한다."
"글쎄?"
조중구는 신동우가 하려는 대로 두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꼭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만약 이번 경기에서도 진다면 그 원망은 어쩌겠는가?
막사 안은 승자와 패자로 갈린 사람들의 웃음과 한숨이 뒤섞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희비가 진정되자 황 총무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오늘의 경기는 의외로 B의 테크닉에 걸린 도사 A가 참패를 해서 도사 B에 베팅하신 분들이 승리하셨습니다. 에, 다음 경기는 롯드 와일러 대 두 마리의 진돗개입니다. 롯드 와일러는 팔전칠승의 경력이 있는 투견입니다. 그리고 오늘 출전할 진돗개들은 지난주와 달리 멧돼지 사냥용으로 실제로 이백 근 이상의 멧돼지를 사냥한 경력도 여러 번 있습니다."
"사냥 경력이 있으면 무얼 해? 지난 주에 보니 한 마리가 물리니 나머진 꼬리를 내리더만.... 게다가 저 롯드 와일러도 보통이 넘어 보이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백발의 회장이 옆 사람에게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앗, 회장님, 베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씀은 자제해 주세요."
황 총무가 급히 손바닥을 세워 회장을 제지하는 제스처를 했다.
"아, 혼잣말을 한다는 게 그만.... 내 사과하리다."
"여러분은 회장님의 말씀은 없던 걸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달 <투견>이라는 일본 잡지를 보니 일대 이의 경기 중, 롯드 와일러와 한국의 진돗개 두 마리의 투견 시합이 가장 백중세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게다가 두 견종의 시합이 이달의 경기 베스트 파이브에 랭크되었습니다. 롯드 와일러와 진돗개의 대결은 항상 스피디하고 다이내믹하다는 장점이 있으니 보시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 보우, 황 총무. 우리가 어린애요? 남의 말 듣고 베팅 하게? 판단은 우리가 할 테니 총무는 어서 경기나 진행하시오."
입을 열지 않던 곽 사장이 기어이 한마디를 던지며 못마땅한 눈으로 회장의 뒷통수를 바라보았다. 중립의 선을 넘은 회장의 발언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옳소."
"어서 진행합시다."
몇 사람이 곽 사장을 동조하고 나서자 황 총무는 얼핏 늙은 회장을 한 번 더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시간 관계상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견주 입장하세요."
좌우의 문에서 견주들이 각각 자신의 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진돗개는 견주와 보조자가 한 마리씩 맡고 있었다. 두 팀은 곧바로 철망 안으로 들어가 수건을 꽉 잡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이번 경기 역시 한 번의 베팅 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시어 베팅액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자, 롯드 와일러는 A, 진돗개는 B입니다. A와 B를 확실히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롯드 와일러는 A, 진돗개는 B입니다. 자 베팅들 하세요."
"야, 동우야, 정말 나 안 따라올래?"
"어차피 운인데 그냥 나대로 해 볼게. 둘 다 망하는 것보다 잃은 만큼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 아냐? 안 그러냐?"
"헛, 자식... 큰소리치는군, 좋아, 각자 알아서 하자."
조중구는 신동우가 액수를 적어 통에 넣는 것을 보며 자신도 서둘러 수첩에 B라고 쓴 다음 얼마를 쓸까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는 금세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지.'
조중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탁금 전액인 삼천만 원을 써서 통안에 던져 넣었다. 부대찌개 집에서 엿들은 정보 하나에 올인 한 것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한 행동일 수도 있는 베팅이었다.
"베팅 끝, 베팅 끝입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시이... 작."
'오늘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견판 2. 투견 게임(7) 달콤한 유혹 (1) | 2024.02.26 |
---|---|
투견판 2. 투견 게임(6) 횡재와 거래 (1) | 2024.02.26 |
투견판 2. 투견 게임(4) 월급쟁이 (1) | 2024.02.25 |
투견판 2. 투견 게임(3) 배팅 (2) | 2024.02.25 |
투견판 2. 투견 게임(2) 투견판 (2) | 2024.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