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이론 ‘상호 간섭 다세계론’
우리가 현재를 선택하는 순간 모든 미래는 한가지로 결정이 난다. 다른 가능성은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분기에서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우리는 평행우주(패러렐 월드)라 부른다.
평행선상에 위치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그 세계와 합쳐질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연구에서 현실 세계와 평행우주가 미약하게 나마 서로 영향을 준다는 당치도 않은 소리가 나왔다.
*평행우주는 있으며 서로 영향을 받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기로에서(이를테면 진학, 취업, 결혼 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만약 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여기서 빠밤빠 빠밤빠 빰빠라라 멜로디가 들리는 듯 한다면 당신은 이미 30대 이상입니다.)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경험도 있을 것이다.
즉, 평행우주에 널리고 널린 나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이다. (밥은 먹고있냐?)
이러한 발상은 근래에 들어 새롭게 나온 것이 아니다. 영화나 소설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아마도 인류가 지능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알게 모르게 느끼면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욕심과 후회는 같은 단어 일지도 모른다. 평행우주의 개념은 1957년, 당시 프린스톤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휴 에버렛이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 기원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해석일 뿐이며, 평행우주가 있지 않을까 라고 가정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면 한결 설명이 쉬워진다는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결코 진짜 이런게 있어! 라는게 아니다.) 현실에서 평행우주는 증명 할 수도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지금의 우리 세계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완전히 독립된 세계’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2014년, 호주 그리피스 대학교와 미국 켈리포니아 대학교의 합동연구팀이 학술지 ‘Physical Review X’에서 발표한 연구는, ‘평행우주는 존재하며,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평행우주가 존재 할 뿐 아니라 우리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이제 너무 흔하지 않은가? 식상하다.)
*현실과 평행우주는 겹쳐져 있다?
합동연구팀의 하워드 와이즈먼 교수와 마이클 홀 박사는, 새로운 주장인 ‘상호 간섭 다세계(many interacting worlds)’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이 상호 간섭 다세계는 기존의 다세계 해석과 뭐가 다를까?
상호 간섭 다세계는 양자론에 기반을 두었다고 하고, 다세계 해석과는 다르게 ‘평행우주는 우리 세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겹쳐서 존재한다.’는 새로운 개념이라고 한다. (이들의 말을 때론 우리가 새로 만든 콜라는 기존의 코카인이 들어 가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 환각효과는 더 클 것이다 같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어들의 호소 같다…. 아무 생각없이 마셔 버리자…) 이것은 당신의 옆에 또 다른 수백, 수천의 자신이 서성거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든 것은 함께 포개어 지듯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이 가능 한가? 그들은 양자론에서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으로 설명되는 ‘양자 중첩(quantum superposition)’ 상태를 이야기 한다.
청산가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를 넣어 놓고, 이 불쌍한 놈이 죽었을까 살았을까 가정하는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시간이 지나, 상자 안에서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상자를 열어 확인하면 그 때 생사가 판명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욕하지 말자)
이것을 뒤집어 설명하면, 사람이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이 고양이는 살아도 있으면서 죽었기도 한 생사가 공존하는 상태로(왜 영화 스폰이 보고싶지?), 바로 이 상태가 ‘양자 중첩’인 것이다. 연구팀이 말하는 요지는 평행우주와 우리 세계가 ‘양자 중첩’ 상태에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치고(이것이 과학이다), 같은 공간에 여러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서로 간섭을 한다는 것인가?
*모두가 얼핏 생각 했을 것이다. 열쇠는 ‘관찰자’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설명에서 열쇠가 되는 것은 관찰자의 존재다. 양자론에서 존재감이 가장 큰 것은 관찰자 일 것이다. 이것은 이중 슬릿 실험에서도 같다. 관찰에 의해 양자의 움직임이 변한다는 이 실험은 다른 영상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요점은, 만약 어쩌다 불시에 ‘다른 세상의 나 (만약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등)’를 상상하게 되었을 때, 어쩌면 우리는 평행우주 속의 다른 자신이 현재의 나를 ‘관찰’하려고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평행우주의 다른 자신을 강하게 그림으로서 ‘관찰자’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관찰’로 인해 양자레벨에서 세상은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선조와 종교 또는 유대인들의 탈무드 등에는 많은 마음의 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쩌면 이들이 주장하는 마음의 수행과 성공을 위한 사고 등은 평행우주에 관찰자로서 참여 함으로 해서 미래를 바꿔보려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만약 이것이 통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삶의 평행우주로 가는 치트키를 얻은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