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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착한 사람은 남의 시선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착하게 살지말고 선하게 살자, 착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fiction-google 2024. 2. 1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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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사는 것과 선하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은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일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돕고 헌신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주 선량한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좋은’, ‘착한’이라는 단어는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이다.

외부에서 언뜻 좋게 보여지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많은 사람 중 상당수가 자신을 숨기는 이중적인 사람일 수 있다.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으로 있으려는 사람이 잘못된 점은,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되도록 세간의 평가에 맞추거나, 상식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남의 기대에 따르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을 방위하기 위한 의식이 꼭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잘 살고 있지 못하게 되는 모순을 발생시킨다. 결국 착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들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 산 인생이 없는 것 같고, 싫은 일도 묵묵히 했던 기억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여느 때와 같이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울컥하고 화가 치민다. 더 이상 그 단어가 진짜로 자신에게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강아지가 말을 잘 들으면 착한 개이고,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사고를 치는 개는 나쁘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주인의 관점이지 사실 개는 착한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주인은 단편적인 것으로 개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개로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때가 더 즐겁고 유익하다.

착한 사람은 남의 관점에서 좋은 사람이 되기도,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착하다는 것은 항상 그 관점이 변화한다. 어떤 사건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보는 관점이 변하고 해석이 달라지듯이, 변하지 않는 사실도 좋은 역사가 되었다가 잘못된 역사가 되었다가 한다.

좋은 사람이란, 결국은 결과가 말해준다. 의적 홍길동이나 일지매가 민중들에게는 착한 사람이지만 사실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양반집이나 부자 집에서는 악의 관점이 더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사원들을 쥐어짜서 이윤을 올리려는 회사 사장은 정말로 나쁜 사람처럼 보이고 욕심으로 똘똘 뭉친 뿔난 악마처럼 보이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고 사원의 수가 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사실 수혜를 입게 된다. 인간은 모든 시점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면 좋은 사람, 피해가 돌아오면 나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기 일수이다. 월급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고, 혼이 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고 돈은 받으면서 자신이 좋은 것 만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그런 일이 있다면 그 일로 전직을 하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부의 단면만을 보고 그 사람이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남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직접 들을 정도의 레벨이라면 그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위선적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건전하게 행동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점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없애고 자신을 치유하려고 하는 것도 매우 좋은 흐름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방향을 잘못 설정하게 되면 자신이 되려는 인간은 결코 될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의식을 갖는 사람의 상당 수는 마음이 여리고, 섬세하며, 상냥하고, 공감능력이 높고, 쉽게 겁먹는 초식동물과 같은 사람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의식에 빨려 들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해 버린다. 하지만 그 포장지는 점점 겹겹이 쌓여 자신을 억누르게 될 것이다.

남에게 잘 보여서 무얼 할 것인가? 돈을 위해서? 인간 관계를 위해서? 결국은 이것도 남을 잘 이용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장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남의 요구는 잘 들어 주는데 비해, 자신의 욕구를 잘 풀지 못한다면 지금의 상태를 돌아보는 것이 좋다. 만약 자신이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반성할 필요가 있다.

만약 다른 사람과 자신이 대등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싫은데도 ‘싫어’라고 말을 못하고, 좋은데도 ‘좋아’라고 말하지 못하고, 미안하지 않은 데도 ‘미안해’라고 말한다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남이 상처를 받을까 봐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도 비열한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이용을 당하고 희생양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멍청한 것이다. 위에 든 사람들은 평소에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생각해 보자. 자신은 이런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생각해 보자.

좋은 어머니는 자식을 엄하게 훈육하고, 잘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한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 나서서 모든 것을 해 주지는 않는다.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좋은 어머니이고 착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대신 해주고 자식이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만 하는 사람이 좋은 어머니는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마음 한 가운데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며, 섣불리 손을 내밀지 않음과 동시에 확실한 명분의 선을 그어두는 사람이다. 어정쩡한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고 있음에도 쉽게 남에게 손을 내밀며, 마치 안개 속에서 계란을 찾았다고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비유하겠다.

지금까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던 사람이면, 이제부터는 ‘자신’을 더 중요한 가치로 옮겨 두도록 해보자. 좋은 사람을 포기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주위에서 착한 사람은 사실 언제 사라져도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자. 진정으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내가 남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 되느냐이다.

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언행을 할 필요는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 자신이라면, 세상 탓을 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일단 솔직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하면 인생도 바뀌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은 그 선행의 기준이 되는 경계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과 거절할 것을 마음속으로 확실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거절을 잘 안 하던 사람이 확실하게 거절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로부터 처음에는 비난을 살 수 있지만, 얼마 안되 귀찮은 일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하나씩 인생을 고쳐 나가면, 착하다는 말보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갈 것이다. 착함과 선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착함은 현상이고 선함은 본질이다. 착한 것은 외부로부터 규정되는 것이고 선함은 선천적으로 내제된 것이다. 착한 사람은 불의에 굴복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선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불의를 그냥 넘기지 않는다.

착한 이미지를 버리면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까 혼란을 겪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보여지기 위한 탈을 쓰고 있으면 인생이 더 혼란스러워진다. 선이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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