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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든 인생의 극단적 선택

fiction-google 2024. 2. 1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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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현재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인가? 끔찍한 현상들을 경험하며 고통이 늘어만 가는, 하루 하루가 불안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합니다. 매년 수 만 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이것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그런 결심을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선택으로 내몰리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는 병 등으로 인한 고통, 금전적인 문제로 인한 괴로움, 가정 내 인간관계, 직장 등 사회적인 인간관계의 갈등, 연애 등의 마음의 고통 등이 많이 꼽힙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실 이런 개별적인 문제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점점 우울한 감정이 자리잡게 되어 가면서 점차 검은 그림자로 변해감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져 가장이 실직을 하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과 아이들의 싫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점차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갑니다. 고통은 목을 조여오는데 딱히 탈출구가 없는 아래로 향하는 검은 웅덩이에 멀거니 발이 담겨져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다 그 감정이 우울함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다른 병으로 변이되어 진정한 물리적인 고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문뜩 ‘나 하나쯤 없어도‘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람은 고통이 극심할 때,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세상이라면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라는 환상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극단적인 길로 가는 첫 단추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가며 구원받지 못한다는 두려움 또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는 죽음 또한 선과 악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선물한 생명을 자신이 거두는 것은 신에 대한 불손함으로 간주하여 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살을 악으로 풀이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도음망(殺盜淫妄)은 4바라이죄(波羅夷罪)에 해당되어 무서운 인과를 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차이는 인생이란 신이 내린 것이 아니라 전생의 업이 모여서 만들어진 자율체이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해서 생명을 준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면 고통의 근본 원인을 소멸할 수 없게 됩니다. 전생의 업이 더해져 전보다도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생명으로 또 다시 태어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성자라면 이미 윤회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있어 자살을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 범인은 윤회하여 현세의 업이 내세에 더해져 삶은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불교는 자살을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곧이어 따르는 엄청난 고통을 짊어지게 되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가 길을 가던 중 젊은 여성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절벽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여성은 자신의 옷에 돌을 채우고 흐르는 강물을 원망 어린 눈길로 쳐다보며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에게 다가간 석가는 잠시 여성의 행동을 제지하며 물었습니다.

“사는 것은 힘들고 죽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 치거늘 어렵게 인간계에 태어나 어찌 자신을 버리려고 하십니까.” 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성은 자신의 서러운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부모님 모르게 사귀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배고 말았습니다. 몇 달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제는 점차 배가 나와 그러지도 못합니다. 사귀던 남자에게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책임을 못 지겠답니다. 부모형제들에게도 비난을 받고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여기서 몸을 던지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쌍한 저의 아이이지만 남자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 당하는 인생을 사느니 요번 생은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석가는 대답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당신의 여린 감정으로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습니다. 자 내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 줄 테니 들어보십시요. 어느 마을에 매일 매일을 무거운 짐 수레를 끌며 산을 넘어 물건을 나르는 황소가 있었습니다. 그 소는 가파른 비탈을 무거운 수레를 끌며 오르는 것이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는 생각했지요. 이 수레만 없어지면 좀 편해질 텐데하고요. 그런 생각을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결심을 했지요. 수레를 망가트리기로 말이에요. 황소는 비탈길을 내려오던 길에 일부러 바위에 수레를 부딪혀 망가트려 버렸습니다. 그리곤 한 달간은 수레가 없으니 짐을 나를 필요도 없고 외양간에서 지네니 너무도 좋았답니다. 이렇게 편한데 왜 진작 수레를 부수지 않았을까 하고 기뻐했답니다. 하지만 주인도 마냥 소를 놀릴 수는 없는 일이라 새로 수레를 만들어 왔지요. 게다가 주인은 소가 난폭한 것을 감안해 다시 수레를 망가트리지 못하도록 쇠로 된 더 튼튼하고 무거운 수레를 준비했던 것이지요. 소는 짐을 아직 싣지도 않았는데 예전보다 더 무거워진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짐을 실으니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지요. 걸음이 느려지자 주인이 채찍질을 하고 그 통에 피가 흘렀답니다. 소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예전을 그리워하며 후회했답니다. 내 보아하니 지금의 당신도 이 이야기 속의 황소와 닮은듯 하군요. 남자에게 버려지고 가족과 사람들에게 비난 받고, 여기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수레를 망가트리는 것과 매한가지지요. 미래에는 그것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 테니 그 때 가서 후회한들 두 번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하도록 하세요.“

석가의 말을 들은 여성은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다음에 어떤 세상이 있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문제를 찜찜하게 남겨두고 다시 시작하려는 것은 좋은 해결책으로 비춰지지 않습니다. 남의 일은 누구나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면 작은 가시가 손톱 사이에 찔린 것만도 엄청난 고통이 됩니다. 비틀어진 많은 감정들이 사실 자신에게서 생겨나고 그것을 온전히 마주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세계로 들어서게 되기도 합니다. 삶이 어려운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비추는 관점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려울 때 한 번 다시 밝은 면으로 생각을 해 보고, 그 밝음을 자신과 타인에게 보여보는 것이 우리 삶을 보다 살고 싶은 그리고 인간으로써 태어난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줄 것입니다. 주위의 동료, 가족, 형제에게 힘이드냐고 묻기보다 말없이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며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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